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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인류 문명의 대안, 중도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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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16 년 12 월 [통권 제4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0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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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대안, 중도와 선(禪)

 

지금 인류 문명은 과학 기술의 발달과 경제는 성장했으나 빈부 양극화, 지구촌 생태계 파괴, 사회 갈등 등등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를 해결해야 할 인간사회는 나-너, 좌-우, 남-북, 인종과 종교 간의 분열로 대립과 갈등이 끝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현실 문제에 지혜를 줍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는 계급사회였으나 부처님은 계급을 부정하고 평등한 대안 공동체인 승가를 만들어 인류의 가장 숭고한 가치를 전승하여 오늘에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생로병사를 해탈하는 길을 중도에서 찾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도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문명사적인 위기를 맞고 있는 이 시대에도 불교는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는 우주만물의 존재 원리로 누구에게나 보편되어 있습니다. 종교와 국가를 초월하여 누구나 중도연기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보면 정견(正見)이 서서 개인의 일상생활이든 사회 문제도 원만하게 풀어나갈 지혜가 나옵니다.

 

지금 서양 엘리트들이 불교와 참선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는 그만큼 위대한 사상이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한국불교도 그렇지만, 세계불교계가 중도와 선(禪)에 대한 가치를 너무 모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무아·사성제·팔정도의 위빠사나-사마타 수행체계를 강조하고, 티벳불교는 중관·유식·공 중심의 수행체계입니다. 남방불교의 불교관과 수행은 이론과 실천 수행을 잘 연결하여 세밀하고 자상한 수행체계를 만든 것은 큰 장점이나 중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본래부처와 직지, 돈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가 아니라 중생에서 아라한으로 가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수행을 강조합니다. 티벳불교 역시 불교 삼장(三藏)을 중심으로 교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수행으로 체험하고 보살행을 하도록 하고 있으나 역시 중도와 본래 성불 같은 깊은 안목의 불교는 아닙니다.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보면 대체로 선한 행을 강조하는 인과(因果)법문입니다. 중생이 착한 업을 쌓아서 끝없이 보살행을 하는 것이 훌륭하지만, 이것은 손가락이고 방편이지 달이나 법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이라마나 틱낫한 스님 같은 분들은 말 그대로 실천을 합니다. 언행일치, 이것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남방이나 티벳에 비하여 한국 불교는 달 불교입니다. 이것은 조사선, 간화선이 들어와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방에서 안거 몇 번 지낸 선승이라면 누구나 생사(生死)가 둘이 아니라는 말을 할 정도는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불교를 본래부처와 같이 깊이 보고 있으나, 이것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언행일치가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수행과 생활이 일치되지 못하고 말 따로 행동 따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불교의 병폐입니다.

 

불법에 대한 안목도 깊고 여름, 겨울 안거 때마다 열심히 정진하나 막상 법문이나 사회인들과 만나 대화하는 내용은 불교적 가치가 빈약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니 신뢰도 약하고 감동도 주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한국불자들이 근본적으로 불교의 핵심인 중도의 가치관, 세계관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성철 스님이나 자운 스님, 청담 스님 같은 분들이 봉암사결사를 하거나 해인총림을 만들어 ‘백일법문(百日法門)’을 해서 불교의 핵심이 중도라는 것을 밝혀놓았습니다. 부처님이 깨친 것도 중도이고, 육조 스님이나 마조, 임제,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 스님, 그리고 우리나라 의상 대사나 태고 스님 같은 분들도 모두 중도를 깨치고 법문하신 분들입니다.

 

만약 우리 한국불교가 중도를 공부하여 정견을 세우고 이를 체험하고 실천하는 선으로 바로 가는 수행체계를 정립하여 대중에게 안내해 나간다면 이 시대 인류에게 매우 유용한 지혜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연재를 마치며 

 

지금까지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란 깨친 분인데 우리도 중도를 깨치면 누구나 영원한 자유와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 말씀드릴 것은 중도를 체험하고 실천하는 선(禪)은 또 다른 특색이 있습니다. 중도 정견의 선은 우리가 본래부처이고, 현실 이대로 극락이라는 입장입니다. 선은 우주만물이 중도로 존재하니 일체가 본래 완성되어 있고, 깨달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중생이니 부처니, 깨달음이니 망상이니 하는 것은 다 착각일 뿐이고 우리는 본래 부처고 지혜와 복덕이 완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선의 본래부처 자리에서 보면, 이제까지 중도와 선을 말하며 부처니 중생이니 깨달음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해온 것은 모두 양변에 떨어진 거짓말이고 허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 역시 지금까지 중도와 선을 강조하기 위해 양변을 갈라놓고 말한 허물이 큽니다.

부처님도 『금강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방하는 것이다. 여래가 설한 바 법은 없다.”
“여래가 일체 중생을 깨치게 하더라도 한 중생도 깨치게 한 바가 없다”

 

우리 중생이라 하는 존재도 일체 만물도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본래 부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생이라 착각할지라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단지 착각에 빠져 있을 뿐 부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한테 ‘부처되어라, 깨달아라, 비워라, 놓아라, 수행하라’는 말은 사실 모두 거짓말입니다.
성철 스님의 임종게에도 이런 선의 가치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수많은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그 죄가 무간지옥에 떨어지는데… 붉은 수레바퀴가 푸른 산에 걸렸다.”

 

이 게송을 잘못 이해하면 ‘생불(生佛)이라는 성철 스님도 스스로 지옥 간다고 했으니 불교 믿어도 소용 없다’고 크게 오해하는데, 이것은 중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성철 스님이 ‘스스로 남을 속였다’ 함은 본래 부처님한테 ‘삼천배하라, 참선하라’ 한 말이 다 속인 것이고 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법문입니다. 성철 스님이 종정에 추대되자 KBS 기자가 해인사로 찾아와 인터뷰하자고 마이크를 대니까,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시오.”

 

이런 말이 양변에서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데, 중도의 가치관으로 보면 우리가 본래 부처이니 중생이란 거짓말이고 착각이니 무슨 수행해라, 절하라, 참선하라는 말이 다 속이는 말입니다. 선사들은 중생이 본래부처, 현실이 극락이라는 본분사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인공지능이 나올 정도로 인류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때이고 민주주의 제도가 가장 발달한 시절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도 그렇고 지구촌 전반적으로 인간의 불평등과 대립 갈등,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초래한 자연 파괴와 재해가 빈발하여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부처님이 깨치고 알려주신 중도와 우리가 본래 부처이고 현실 이대로 극락이라는 선은 우리에게 무한한 지혜와 평화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차별과 멸시, 심지어 살상이 만연하는 이 지구촌에 우주 만물이 하나이고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으니 절대 평등하며 고유의 가치를 지닌 고귀한 존재라는 가르침과 그것을 단박에 체험하고 실천하는 선은 매우 유용한 대안이자 지혜를 줍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중생이고 어리석고 부족하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본래 부처로 돌아가야 합니다. 괴로움과 짜증, 화는 내가 중생이라는 분별망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단박에 깨어나 본래 자성을 회복하여 지혜와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보면 자기가 우주 만물과 하나임을 깨달아 절대적이고 무한한 지혜와 복덕이 본래 다 완성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 불생불멸의 영원한 대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부디 대자유의 길에 용기를 내어 보십시오. 그동안 제가 지은 구업이 너무나 큽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인데, 속히 중생이라는 착각을 깨어 본래 자리로 돌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이 길이 영원한 행복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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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서 20여 년간 종무원 생활을 하다가 고우 스님을 만나 성철스님 『백일법문』을 통독하고 불교의 핵심인 중도에 눈을 뜬 뒤 화두를 체험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교인재원에서 생활참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유튜브 생활참선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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