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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및 특별기고]
“수행자는 수행자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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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6 년 9 월 [통권 제4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17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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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거 해제 특집 인터뷰 / 해인사 용탑선원장 중천 스님 

 

8월 15일 가야산을 찾았다. 날은 광복절이었지만, 백련암 아비라기도에 참석한 불자들은 결코 무더위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여름에도 시원하기로 유명한 백련암 마당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너무 낯설었다. 백련거사림회 회장 영암 거사도 “백련암에서 아비라기도를 한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렇게 뜨거웠던 적이 없었다.”고 할 정도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여법한 기도를 시작한 대중들의 의지를 확인한 뒤 목적지로 향했다. 해인사 용탑선원. 해인사 바로 옆에 있는 암자다. 얼핏 보면 해인사와 한 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간에는 암자 곳곳을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맘먹고 찬찬히 둘러보기로 했다. 용탑선원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다. 2010년을 지나면서 사격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중천 스님 

 

극락교 앞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용성 조사 유적도량’이라는 글이 적힌 두 개의 기둥이다. ‘용탑’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용성 스님의 사리탑을 모신 선원’. 극락교를 건너 칠불보궁으로 갔다. 용탑선원은 가야산에 있던 칠불암이 폐사되면서 칠불(七佛) 중 일부를 모셔와 중창했다고 한다.

 

단청 불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일곱 분의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용성 조사와 십이제자’를 모신 단(壇)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날의 현대 한국불교를 있게 한 용성 스님과 동산, 고암 스님 등 선지식(善知識)들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극락교에서 바라본 용탑선원 전경 

 

칠불보궁을 나와 석굴 형태의 미타굴, 시민선방인 용성선원, 종무소가 있는 육화당, 요사채인 감로당 등을 둘러봤다. 용탑선원장 중천 스님의 원력(願力)과 감원 도영 스님의 신심(信心)이 더해져 불사를 진행했다. 용성 스님 성지로서 이제는 제법 자리를 잡은 모양새다. 

 

상자당(祥慈堂)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고암상(祥)언 대종사의 자(慈)비로움’을 표현한 전각이다. 스승 고암 스님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해 온 중천 스님을 이곳에서 만났다. 

 

용성 스님과 고암 스님의 성지, 용탑선원

 

스님에게 먼저 칠불보궁에 모셔진 ‘용성 조사와 십이제자’가 이채롭다고 ‘소감’을 전했다. 

“용성 조사님은 우리 불교의 큰어른이십니다. 그런데 스님들도 용탑선원이 어떤 곳인지를 잘 몰라요. 그래서 현재 법손이 있는 용성 스님의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셨습니다. 그렇게 한 분 두 분 모시다 보니 열두 분이 됐습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들의 진영을 함께 모셔 놓은 곳은 없습니다. 

함께 모신 김에 합동다례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음력 9월 10일에 다례를 올리는데 그 날 용성 스님의 법손들이 한 자리에 모입니다. 용성 큰스님을 문중의 후손들이 함께 추모하고 또 그 가르침을 되새길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용탑선원 전경 

 

용성 스님의 생(生) 사리가 나와 세워진 용탑선원이 문도들의 구심점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중천 스님의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중천 스님과 용탑선원의 인연이 더 궁금해졌다. 시간은 중천 스님의 출가로 되돌려졌다. 

 

“저는 사실 불교에 문외한이었어요. 고향 집 주변에 절은 많았지만 그리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년이 되어 군대를 갔는데 그곳에는 정말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삶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불교에 답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대를 하고 출가를 본격적으로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해인사, 쌍계사, 다솔사 주지스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일 먼저 답장을 주신 분이 다솔사 주지 최범술 스님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쌍계사 주지스님의 답장이 왔습니다. 고심 끝에 다솔사로 갔습니다. 최범술 스님은 제헌 국회의원에 박학다식한 학자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솔사에 가 보니 제가 생각하던 불교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최범술 스님은 머리를 기른 대처승이었거든요. 하루는 제가 ‘스님은 왜 머리를 기르고 있습니까?’라고 여쭈니 ‘법당에 부처님은 머리가 있어? 없어?’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조금 낙담해 있던 차에 다솔사 인근 토굴에 살던 한 스님이 해인사 용탑선원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용탑선원 고암 큰스님을 찾아가라고 해 그 길로 짐을 싸서 이곳에 왔습니다.” 

 

스님은 1963년에 용탑선원에 왔다. 행자생활을 거쳐 사미계를 먼저 수(受)하고 나중에 받은 법명이 ‘중천(中天)’이었다.  

스님은 용탑선원에서 고암 스님을 모시며 해인사 강원을 다녔다. ‘통학’을 했던 셈이다. 스님이 학인이던 시절에 해인사는 해인총림이 되었고 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었다.  

 


칠불보궁에 모셔진 용성 조사와 십이제자 진영 

 

1969년 강원을 졸업하고 스님은 본격적인 납자(衲子)의 길에 들어섰다. 첫 철을 해인총림선원에서 보낸 뒤 인천 용화사, 기장 묘관음사, 통도사 극락암, 순천 송광사 등의 선방에서 정진했다. 10여년의 대중수행 뒤에는 토굴정진도 오랫동안 했다. 양양 낙산사 주지와 상주 남장사 주지도 ‘잠깐’ 했다. “사찰 주지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이어서 빨리 벗어버렸다.”고 한다. 제방에 다니면서도 틈틈이 용탑선원에 와 스승 고암 스님을 시봉했다.  

 

중천 스님에게 고암 스님은 어떤 스승이었을까?

“고암 큰스님은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실 정도로 선(禪), 교(敎), 율(律)에 두루 뛰어난 어른이셨습니다. 사람들은 큰스님을 ‘자비보살’로만 말하는데 선(禪)에도 밝은 분이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큰스님과 말씀을 나누다 ‘수첩’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그 수첩은 고암 큰스님의 모든 것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젊은 시절에 제방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나눈 선문답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습니다.” 

 


중천 스님이 고암 스님과 용성 스님의 문답이 적힌 수첩을 보여주고 있다 

 

중천 스님은 수첩을 직접 보여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눈에 들어온 것은 용성 스님과 고암 스님의 문답. 고암 스님이 36세이던 1934년 음력 6월 5일 내원사 천불선원에서 용성 스님과 나눈 문답이다. 중천 스님은 고암 스님의 말로 뜻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용성 선사께 여쭈었다. ‘금강경(金剛經)은 모두 공리(空理)입니까?’ 용성 선사 답하시길 ‘반야(般若)의 공리(空理)는 정안(正眼)으로만 보느니라’ 하시면서 ‘조주 무(無)자 십종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하고 물으시었다.

답하길 ‘但行劍上路라. 다만 칼 위를 걸어갑니다’ 하였다. 선사께서 다시 물으시었다.

‘世尊拈花 微笑消息의 意旨如何. 세존의 염화미소 소식이 무슨 뜻인가?’

나는 답하기를 ‘獅子窟中 別無異獸. 사자굴 가운데 다른 짐승이 없습니다’

 


중천 스님과 원택 스님 

 

용성 선사께서 다시 물으시었다. 

‘육조 대사께서 이르시길 비풍번동(非風幡動)이라 하였는데 그대 뜻은 어떠한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삼배를 올리고, ‘天高地厚,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습니다’ 하였다. 

 

나는 다시 여쭈었다. ‘선사님의 가풍은 어떤 것입니까?’ 용성 선사 답하시길 ‘나는 주장삼하(柱杖三下)이니라. 그대는 어떤가?’ ‘제자도 또한 주장삼하(柱杖三下)입니다’ 하였다.

이때 노사는 껄껄 웃으시면서 ‘만고풍월(萬古風月)이로다’ 하시었다.”

중천 스님은 “이 문답 끝에 용성 조사님께서는 고암 큰스님을 인가하셨다. 용성 조사님의 법(法)을 받은 법제자가 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고암 큰스님께서는 평소에 방청소도 직접 하실 만큼 소탈하고 솔선수범하셨어요. 시자들이 할 일이 없을 정도로 큰스님께서는 직접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종정에 추대되셨을 때도 ‘다른 좋은 스님께서 종정을 하시기 전에 내가 임시로 잠깐 맡는 것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께는 ‘아(我)’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항상 하심(下心)하시고 또 하심하셨던 분입니다.” 

 


중천 스님과 원택 스님이 용성 스님 탑비를 살펴보고 있다 

 

중천 스님과 자리를 함께 한 백련암 감원 원택 스님도 고암 스님과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해인사 산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일이 있으면 성철 큰스님께서는 산중의 어른들에게 꼭 의견을 여쭈라 하셨습니다. 일 때문에 고암 큰스님을 찾아뵈면 항상 절을 안 받으십니다. ‘우리는 신식으로 하자’시며 악수만 하십니다. 저야 어른께서 그러시니 ‘억지로’ 그렇게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어린 스님이어도 큰스님께서는 항상 평등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인정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셨던 어른이셨습니다.” 

 

“어른이 그리운 시절”

 

스승 고암 스님을 그리워하는 제자 중천 스님의 회고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해인총림에 주석한 다른 스님들에 대한 말씀도 빼놓지 않았다. 

“잘 아시듯이 해인사에는 대단한 어른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고암 큰스님을 비롯해 자운, 성철, 지월, 영암, 일타, 혜암, 법전, 지관 스님 등이 최근까지 후학들을 지도하셨어요.  

 

자운 큰스님은 조계종의 계율(戒律)을 살린 어른입니다. 철저한 율사였어요. 스님들에게 중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저는 율복(律福)을 먼저 꼽고 싶어요. 조계종 종정을 하셨던 분 중 어느 누구도 율(律)에 소홀한 분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지계(持戒)가 중요합니다. 선(禪)에는 뛰어났지만 율(律)이 부족해 종정이 못되신 분도 많지 않습니까? 

 


해인총림의 큰 어른이었던 성철 스님과 고암 스님 

 

자운 큰스님께서는 품이 넓었습니다. 그래서 자운 스님이 당신 품에 여러 큰스님들을 다 짊어지고 다녔다고 할 정도입니다. 산중에서 한국불교를 지탱해 가는데 자운 스님의 역할이 컸다고 봅니다. 해인사가 흔들리지 않도록 큰 울타리가 되신 분이 바로 자운 큰스님이십니다. 

 

성철 큰스님은 말이 필요 없는 분이죠. 큰스님께서 하신 것 중 가장 큰일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신 것이라고 행각합니다. 매듭을 확실히 지어준 것이죠. 큰스님께서는 견성(見性)의 기준으로 오매일여(寤寐一如)를 말씀하셨어요. 사람들이 찾아오면 다른 것은 말씀 안하시고 ‘오매일여 돼?’라고 물으셨잖아요. 아무리 깨달았다고 해도 오매일여가 아니면 견성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 계실 때 자칭 도인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큰스님께서는 오매일여는 본인만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속일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큰스님의 한글법어에는 정말 힘이 넘쳤습니다. 글만 봐도 기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큰스님의 1986년 신년법어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법어 중 ‘장엄한 법당에는 아멘소리 진동하고 화려한 교회에는 염불소리 요란하니 검다 · 희다 시비(是非) 싸움 꿈 속의 꿈입니다’라는 구절이 제 가슴을 쳤습니다. 너무 위대한 말씀입니다. 화장세계(華藏世界)를 노래한 이 구절이야말로 큰스님의 깨달음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라 생각해요.  

 


앞쪽은 고암 스님 부도탑과 탑비이고 뒤쪽은 용성 스님 사리탑과 탑비이다

 

 큰스님의 열반송 ‘生平欺誑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쾌벽산)이로다 -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불성(佛性)을 가진 부처임에도 모든 중생을 부처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평생의 서원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당신의 뜻과 바람대로 중생들을 부처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 죄가 수미산을 넘친다고 한 것이죠. 큰스님의 열정이 느껴지는 열반송이었습니다.” 

 

중천 스님은 자운, 성철 스님뿐만 아니라 다른 어른들을 모시면서 느꼈던 것들을 가감없이 전하기도 했다. 

 

기라성 같은 어른들에게 배워서일까? 중천 스님은 후학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구산 큰스님이 송광사 조실로 계실 때 효봉 노스님 사리탑 제막식이 있어 고암 큰스님을 모시고 참석했습니다. 마침 그날 주지스님이 새로 취임하셨습니다. 그 스님은 대중들에게 ‘취임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주지는커녕 원주도 못할 사람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주지를 맡아 송광사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정성껏 대중들을 모시겠습니다.’

짧았지만 그런 감동적인 취임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소임자로서 하심(下心)하는 마음가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임자 중에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합니까? 이런 스님이 진정한 수행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 스님들은 특권의식이 너무 강합니다. 스스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요. 스님은 수행자이지 특권층이 아니에요. 수행자는 수행자답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해제했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보다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중천 스님은 당신을 드러내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해야할 말씀’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중천 스님 같은 어른이 있기에 총림(叢林)의 역사는 계속 살아 숨 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다리를 건넜다. 짧았지만 극락교를 건너 중천 스님을 만났던 시간이 바로 극락(極樂)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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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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