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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불리문자(不離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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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  2016 년 9 월 [통권 제4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8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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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전개된 선종의 초기 역사를 보면,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신화적 요소가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한 송이 꽃을 들어 올리자, 많은 대중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가섭 존자 한 사람만이 미소를 지음으로써 부처님의 인가를 받은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를 그런 신화적 요소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꽃을 든 부처님과 미소 지은 가섭 존자 사이에 번개가 치듯 무언(無言)의 교류가 일어난 직후, 부처님은 곧장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마하가섭에게 전했다’라고 선언하셨다.

 


 

 

이 날 일어났던 부처님의 전법을 두고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이심전심(以心傳心)·교외별전(敎外別傳) 같은 용어를 통해 설명했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에게 언어문자를 매개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불법의 핵심을 곧장 전했음을 뜻한다. 한편 부처님은 성도 후 45년간 다양한 근기의 중생들을 위해 언어를 통해 불법의 진리를 설하셨는데, 이를 교(敎)라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와 같은 ‘교’의 방식을 벗어나 보다 특별한 방식으로 진리를 직접 전하기도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선(禪)이다.

 

7세기 이후 크게 발전한 남종선(南宗禪)에 있어 불립문자의 경향은 크게 강조되었다. 불립문자가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정신은 바로 언어와 문자로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불립문자의 정신은 불교학에서 언제나 강조하던 ‘언어와 실상의 어긋남’을 가장 핵심적으로 붙잡고 있는 구호로 생각된다. 우리가 아무리 진여, 법성 등과 같은 ‘말’을 많이 되뇌고 기억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진리가 아닌 말의 영역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선사들은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립문자라는 용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맥락을 보면, 많은 경우 그것이 ‘책을 보지 말라’거나 ‘글공부를 하지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진리가 말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긍정적 측면도 있겠지만, 불교의 근간이 되는 교(敎)에 대한 방치로 이어지는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唐) 이후 선사들이 남긴 어록을 보면, 그들이 불경에 매우 박식하였고, 학인을 지도하는 수단으로 불경을 매우 적극 활용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을 불리문자(不離文字), 곧 언어·문자를 여의지 않고 불법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명추회요』 역시 이 불리문자의 정신에 입각해 있다.

 

방편(方便)으로서의 교(敎)

 

영명연수 선사가 찬집한 『종경록』 100권과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그것을 촬요(撮要)한 『명추회요』 3권에는 수많은 불경과 논서가 인용되고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선사들의 말씀도 수록되어 있지만, 선사들의 발언은 하나의 ‘질문과 대답, 그리고 인증’ 가운데 보통 맨 앞이나 맨 뒤에 배치되어 언어와 문자로 주고받는 내용들이 결국은 선의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수 선사가 단지 불립문자만이 아닌 불리문자의 정신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조금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송의 유명한 문인인 소동파가 전하는 연수 선사의 생애를 보면, 선사는 젊은 시절 항주 인근에서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항구에 잡혀 오는 물고기를 가엾이 여겨 관전(官錢)을 사용해서 그 물고기를 놓아준 적이 있었다. 오늘날로 보면 공금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셈이다. 그래서 당시 오월의 국왕은 그를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정작 당사자인 연수 선사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뭇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조금의 사사로운 마음도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국왕이 그를 시장이 있는 번화가에서 참수하되, 만일 형장에서 그가 후회하는 것 같으면 곧장 형을 집행할 것이지만, 그가 여전히 평정을 유지할 경우 사면하라는 명을 내렸다. 연수 선사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담담히 후회 없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탄복한 국왕은 그의 평소 뜻을 따라 출가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연수 선사는 매우 치열하게 수행했는데, 천태산 천주봉에서는 90일간 좌선에 들어 새가 옷에 둥지를 틀어도 모를 지경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수행했던 연수 선사는 하루에 108가지 일과를 행했는데, 그 중 맨 마지막에 ‘글을 쓰는 작업’이 들어 있다. 연수 선사는 선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방편 가운데서도 특히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들의 말씀’을 나침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 역시 ‘말씀’인 한에는 진리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 진리를 가리킬 수 있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성철 스님께서도 같은 맥락을 말씀을 하셨다. 곧 대장경은 처방전이므로 처방전에 따라 직접 약을 지어 먹어야 병이 낫는다는 말씀이다. 처방전 자체는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에 따라 약을 지으면 실제로 병을 고치듯이, 언어·문자 자체는 진리가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 진리로 가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흔히 팔만사천법문으로 칭해지는데, 그 많은 법문 가운데서도 더욱 더 요긴한 것은 무엇일까? 연수 선사 역시 이러한 고민을 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의 『종경록』 100권에는 선사께서 요긴하다고 생각한 많은 불전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선사께서 먼저 수고로운 작업을 해주신 덕분에 후대의 선사들은 교(敎)와 선(禪)에서 중요시하는 법문들을 조금 더 수월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이런 이유에서 『명추회요』가 송나라 때 그렇게 각광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리문자와 교외별전

 

『명추회요』 320쪽에서 시작되는 ‘여러 가지로 말하나 모두 일심을 드러낸다’는 제목의 구절은 6페이지에 걸쳐 이어진다. 그 중 321쪽에 나오는 질문과 대답을 보면 불리문자에 대한 선사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이를 같이 읽어보자.

 

【물음】 위로부터 내려온 종승(宗乘)은 오직 학문을 끊고 단도직입케 하는, 교(敎) 밖에 따로 전한 이치인데, 어째서 지혜와 다문(多聞)을 빌려 자성과 모습을 자세히 논하는가? 말이 번다하면 이치가 숨고 물이 요동치면 구슬이 흐려지는 법이다.

 

【답함】 종지를 드러내고 집착을 타파하기 위해 배움의 길에서 토론하는 것을 방편으로 털어없애지만 종지를 통달하여 원융하게 소통하는 것은 문자해탈(文字解脫)을 벗어나지 않으니, 『법화경』에서 “만약 근기가 영리하고 지혜가 명료하며 많이 듣고 기억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말해 줄 수 있다.”고 하였다.

 

(중략)

 

그러므로 원통(圓通)의 경지를 밟아 본 사람이 어찌 말이 끊어졌다는 견해에 떨어지겠는가.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단멸(斷滅)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일 자심(自心)을 곧장 깨달을 수 있다면 단도직입하는 것이고 가장 긴요한 것이니, 한 가지를 알면 천 가지가 따라 이해되어 모든 법을 남김없이 거두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니, 이것을 떠나서 따로 기특한 도리는 없다.

 

연수 선사가 묻고 답한 내용을 보면, 한편에서는 언어·문자에 집착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지닌 적극적인 기능을 크게 긍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처방전과 실제의 약, 언어·문자와 실제의 깨달음의 관계를 정확히 아는 것에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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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불교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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