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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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2 월 [통권 제5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91회 / 댓글0건본문
서로 포용하며 굳건하게 서 있는 존재들
언제부터인가 출퇴근 전철은 뉴스를 읽는 공간이 되었다. 스마트폰 속에 세상의 모든 뉴스가 들어 있으니 손바닥에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문제는 그렇게 편리하게 접하는 소식들이 하나같이 삭막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김정은은 자신의 책상 위에 핵 단추가 있다고 엄포를 놓고, 트럼프는 그보다 더 큰 핵 단추를 가졌다고 맞장구를 친다. 어디 그뿐이랴! 아프리카는 여전히 굶주림과 분쟁으로 고통받고 있고,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과 유럽까지 세계 곳곳에는 증오에 가득 찬 테러가 되풀이되고 있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세상은 백인과 흑인, 기독교와 이슬람,남과 여, 진보와 보수,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 대립과 갈등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세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불안한 구조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더구나 그런 대립과 갈등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고, 인간에게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들은 끊임없는 갈등과 전쟁을 일삼아 왔고, 동물들의 삶 또한 약육강식의 질서 속에 먹고 먹히는 고달픈 삶의 연속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인류는 아직도 존속하고 있으며, 동물들도 인간의 과도한 개입만 없다면 생태적 균형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겉보기에는 그렇게 불안해 보였는데 어떻게 이들의 삶은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답을 화엄(華嚴)의 눈을 통해 찾을 수 있다. 화엄의 눈으로 보면 대립과 갈등이 빚어낸 불안한 모습은 무명(無明)에 싸인 중생들이 초래한 왜곡된 현상일 뿐이다.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존재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위태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 존재의 실상(實相)으로 들어가는 것이 화엄의 십현문(十玄門)이다. 십현문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모든 존재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의존과 조화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실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섯 번째 문이 바로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이다.
법장은 미세상용안립에 대해 “이것이 저것을 포섭하여[由此攝他] 일체가 나란히 포섭되며[一切齊攝], 저것이 포섭함도 또한 그러하므로 미세상용안립”이라고 설명했다. 어리석은 가치관이 빚은 세상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지만 법계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존재의 실상은 대립과 갈등 대신 “이것이 저것을 포섭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저것을 일방적으로 포용하고 품어 안는 것이 아니다. 실상의 세계에서는 “일체가 나란히 포섭한다[一切齊攝]”고 했다. 이것이 저것을 포섭하듯 저것도 이것을 포섭한다. 그와 같은 상호 포섭은 모든 존재들에게 확장되어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여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실상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것과 저것이 나란히 포섭하여 서로를 받아들임이 ‘상용(相容)’이다. 이것과 저것이 상호 포용을 통해 이것은 저것 속으로 들어가고 저것은 이것 속으로 들어감은 ‘상입(相入)’이다. 그리고 서로를 포용하여 서로에게 들어가 이것과 저것이라는 고립적 경계를 해체하고 이것과 저것이 하나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즉(相卽)’이다. 이와 같은 상호 포용은 우주적 변화와 같은 거시적인 것은 물론 아주 작고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므로 ‘미세상용(微細相容)’이라고 했다. 모든 존재들은 우리가 알지 못할 만큼 작고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 상호 의존하고 상호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의 작용으로 산소가 만들어지고, 미세한 박테리아들에 의해 식물은 또 자양분을 공급받고, 무수한 동물들은 이런 미세한 작용으로 먹이를 얻는다. 하나의 씨앗이 돋아나고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 얼마나 많은 미세한 것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알 수 없는 기적들을 만들어내는지 모른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미세하고 정밀한 관계 속에서 서로 기대고 서로 포용하고 있는 실상에 대한 설명이 ‘미세상용’이다.
존재는 상호 받아들임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관계가 확장되고,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안정되게 서 있다. 그와 같이 안정된 모습으로 서 있는 존재의 특성을 ‘안립(安立)’이라고 표현했다. 존재의 그와 같은 안정성 때문에 비록 겉보기에는 불안해 보여도 억겁의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드라의 그물로 연결된 우주
성철스님은 ‘미세상용안립’으로 표현되는 법계의 특징에 대해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지금 있는 그대로 서로 완전히 상즉상입해서 원융무애자재합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원융무애하면서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 서로가 분명하니, 은현(隱顯)과 광협(廣狹)에 무애하면서도 은현과 광협이 고스란히 성립합니다.”라고 설명했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완전히 들어감으로써 걸림 없이 소통한다. 개체를 둘러싼 관계는 우주적 범주로 그 연결성이 무한히 확장되고, 전체라는 우주는 작은 개체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이처럼 십현문은 존재의 우주적 관계성을 설명하는 교설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존재의 우주적 관계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또 다른 문이 바로 십현문의 일곱 번째 문에 해당하는 ‘제망무진문(帝網無盡門)’이다.
법장은 “서로 포섭하여 중중무진[互攝重重]하기 때문에 제망무진”이라고 제망무진문을 설명했다. ‘제망(帝網)’이란 제석천의 그물 즉 ‘인드라의 그물(Indrajāla)’을 말한다. 여기서 인드라는 ‘천주(天主)’ 또는 ‘천주의 세계’를 의미한다. 인드라는 ‘하늘의 주인’이므로 그가 머물고 있는 궁전은 하늘, 즉 광활한 우주 자체가 된다. 그 광활한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그물이 바로 ‘제망’ 또는 ‘인드라망’이다.
인드라망의 개념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첫째는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는 인드라망의 상징성이다. 인드라망은 존재의 우주적 관계성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개별적 존재들은 개체라는 작은 경계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드라망이 우주적 넓이로 무한히 확장되듯이 하나의 개체가 갖는 관계성 역시 무한히 확장되어 ‘끝이 없다’는 것이 ‘무진(無盡)’이라는 술어가 담고 있는 의미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 법계가 인드라의 그물 같다는 것을 다 아신다.”고 했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들이 인드라의 그물처럼 하나로 직조(織造)되어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존재들이 고립적 개체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지혜로운 통찰이자 부처님의 안목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법장은 이와 같은 끝없는 관계성에 대해 “제석천궁의 그물에 달려 있는 구슬과 같이 하나를 따라가면 무궁무진한 일체와 통하게 된다.”고 했다. 존재는 단절되고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무궁무진하고 미세한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드라망의 씨줄과 날줄의 교차점에 있는 구슬이 갖는 상징성이다. 모든 존재는 우주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통합성을 지니고 있지만 개별적 특수성과 고유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하늘 궁전에 드리워진 인드라의 그물은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매듭에 영롱한 보배구슬들이 매달려 있다. 그 구슬은 맑고 투명하여 각각의 구슬 속에는 전체 모든 구슬들이 투영되며, 전체 모든 구슬 각각에도 다른 모든 구슬들이 투명하게 반영된다. 이 역시 이것과 저것이 끝없이 겹쳐지는 존재의 연기적 관계성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나아가 무수한 구슬은 존재의 다양성과 개별적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십현문은 존재와 존재의 관계성이 끝없이 확산되고[周遍]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포용되는[含容] 실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인드라망의 개념은 불교 교리를 설명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생태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개념으로 각광받고 있다. 생태철학자들은 하나의 존재가 갖는 보편적 관계성을 설명할 때 ‘거미줄(web)’의 비유나 ‘생명의 그물(web of lif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특히 게리 스나이더는 인드라망의 사유에서 영감을 얻어 ‘먹이 그물(food web)’이라는 개념으로 생태계를 설명한다. 생태계의 모든 존재들은 먹이사슬을 타고 서로에게 에너지를 주고받는 상호관계성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십현연기는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담론에 머물지 않고 생명과 생태계를 설명하는 개념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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