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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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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6 년 6 월 [통권 제3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08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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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문득 “아! 내 나이가 벌써 40, 불혹(不惑)의 나이네.” 하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해 내내 “인생 칠십, 살기가 옛날부터 드문 것이라 하는데 이제 산 날보다 떠날 날이 적게 남았네.” 하는 생각에 ‘불혹앓이’로 한 해를 보냈던 기억입니다.

 

10년이 못돼 제 나이 쉰 살이 된 1993년 11월에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니 큰스님을 시봉한 절집 22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렸습니다.

 

29세 때 출가하였으니 세상 험한 일 한 번도 겪지 않고 편하게 살다가 절에 들어왔고, 또 출가해서도 해인사 최고의 자리에 계신 방장 큰스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밖에서는 부럽고 힘 있어 보이는 자리인지 모르고 저는 백련암의 큰스님 슬하에서 전전긍긍하며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성철 스님과 법전 스님 

 

하루는 성철 큰스님께서 부르시더니 “법전 스님이 해인사 주지를 재임할 터이니, 니가 내려가서 총무를 맡아서 대불 불사가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주지스님을 잘 보좌해라.”고 하셨습니다.

 

20년 가까이 살던 백련암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큰스님의 말씀에 따라 1990년 2월에 해인사 총무로 내려와서 소임을 사니, 백련암 때와 비교하여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백련암에서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저녁 9시 종소리에 맞춰 잠을 청할 때까지 항상 ‘5분 대기조’의 심정으로 큰스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매일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해인사 총무로 내려오니 위로는 주지스님이 계시고 해인사 행정은 5직이 있으니 총무가 바쁘다고는 하지만 백련암 시자생활에 비하면 한가로운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총무를 찾아온 모든 분들이 한 목소리로 “백련암 암자에서 큰스님 모시고 편안히 살다가 대중이 많은 큰 절에서 얼마나 고생이 되느냐?”고 위로의 말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백련암에서 큰스님을 모시고 숨 한번 크게 못 쉬고 엄격하고 긴장의 연속 속에서 고되게 살아온 세월을 이 분들은 정말 모르나 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이 편한데 사람들은 다 큰 고생하고 있다고 염려해 주시니 다행으로 생각하자.” 하고 총무직을 수행하고 있던 중, 큰스님께서 1993년 11월에 열반에 드시니 7일장 준비와 영결식 및 다비식 진행 등을 떠맡게 되었고, 10여 일에 걸쳐 밀려드는 수십만 인파속에서 대소사의 상중(喪中)의 일을 정성을 다해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음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성철 스님 다비 모습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난 후 저는 비로소 세상의 풍파를 겪게 되었습니다. 30세 즈음까지는 부모님의 덕으로, 50세 즈음까지는 큰스님 덕으로 세상풍파를 모르고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세상을 살아왔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순간들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일 괴로운 일은 “부처님 말씀대로 남에게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왜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요즈음 와서는 “그래! 내가 남에게 잘못한 일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내가 지금 거기에 있는 존재만으로도 내 업보와 상관없이 무조건 싫다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거기서 다시 관계를 잘 유지해 가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정리했습니다.

 

큰스님 추모사업을 진행하면서 2004년이 되니 환갑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고희를 바라보며 “나도 이제 잔명이 10년밖에 없는가?” 하는 허전한 마음이 밀려들기도 하였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서 “이제 내가 짊어지고 있는 짐도 언제까지 지고 갈 것인가? 사형사제들과 상좌들과 짐을 나누어야지.” 하고 저는 업무의 분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리스트 작성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암자 절집의 일이 무슨 조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일이 많아서 넝쿨처럼 엉켜 일이 그렇게 쉽게 나누어질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일을 나누지 못하고 후계의 일도 진척의 속도가 없이 오늘에 이르게 되어 책임을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우연히 스님들과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삼국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천하삼분론에 의지한 조조, 유비, 손권의 권력다움으로 재미있는 역사소설로 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어느 스님이 불쑥 말했습니다. “『삼국지』야말로 후계자를 두는 데 실패한 적나라한 역사소설이다.

 


고심정사 주지 일성 스님이 관불을 하고 있다 

 


주인공인 조조의 아들도 유비의 아들도 손권의 아들도 아닌 사마의의 아들이 천하를 제패한 역사 이야기다. 『삼국지』는 후계자를 세우는 데 실패한 예를 기록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모두 “후계자를 두는 일은 황가에서나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절에서나 다 어려운 일이다. 우리 속담에도 오죽하면 삼대부자가 나기 어렵다 하지 않은가.” 하며 가가대소하였습니다.

 

몇 년 전부터 조계종단에서 종단법인 관리법이 통과되어서 백련불교문화재단도 제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학원 등록문제로 법인 사찰 주지 임명 건이 마무리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움이 있어서 법인 주지 임명은 추후 통보가 있을 때까지 보류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여 무심히 지나고 있었는데 하루는 고심정사에서 총무를 보는 상좌로부터 “총무원 총무부에 연락을 해보니 법인 산하 사찰의 주지임명은 해당 법인의 대표자가 할 수 있다고 합니다.”는 말을 듣게 되어 사무장에게 알아보게 하니 “같은 답변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러면 아무리 상좌이지만 우리가 너무 무성의하게 보이지 않았나 말이지. 그런 일일수록 차질 없이 했어야지.” 하며 서둘러 상좌에게 주지임명장을 주고 저는 회주로 하여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5월 7일, 음력 4월 1일에 주지의 사형사제 20여 명과 해인강원 45회 동창 10여 명의 스님들과 신도들이 모여서 일성 스님의 주지 취임과 저의 회주 추대식을 봉행했습니다. 고심정사 주지 자리를 상좌에게 물려주고 나니, 한결 제 마음도 가벼워지고 편안해짐을 느꼈습니다.

 

공자께서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고 어디에서 말씀하셨나 해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干學), 30세에 주체성을 가지고 사회에 나갈 뜻을 세웠고(三十而立), 40세에 남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었고(四十而不惑), 50세에 인생의 소명을 깨달았고(五十而知天命), 60세에는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고(六十而耳順), 70세가 되니 마음 내키는 어떤 일을 해도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秬)”고 공자께서 73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희(古稀)라는 말의 출처를 찾아보니 당나라의 시성(詩聖)으로 존경받는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의 한 구절에서 생긴 성어였습니다. ‘인생 칠십은 옛날부터 드물도다(人生七十古來稀)’라는 구절에서 고희(古稀)라는 단어가 생겼는데, 정작 두보 자신은 70세까지 살지 못하고 59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은 바둑으로 겨루는 것이었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놀라움을 알게 해 준 큰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에 진행돼 온 인공지능에 대한 IBM의 왓슨과 구글의 알파고 연구는 빠르면 10년 이내에도 우리들이 전율할 발명품들과 생활 혁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고희(古稀)의 시대는 사라지고 100세 인생을 외치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세계역사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부처님과 공자님을 능가하는 현인의 출현만이 인류의 미래를 편안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세월은 물같이 흐릅니다.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시대를 맞이할 마음의 수양에 더욱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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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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