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의 뒷골목]
‘변화’와 ‘관계’로부터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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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6 년 2 월 [통권 제3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10회 / 댓글0건본문
음력 12월 8일은 성도절(成道節)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날을 기리자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올해는 양력으로 1월 17일. 전국 사찰에서 열리는 기념법회의 주제도 대부분 깨달음이다. 숭고하지만 그만큼 고원한 개념이다. 이른바 구경각(究竟覺)을 누리는 도인은 극소수이거나 주변에 없다. 중도(中道)만 이해해도 한결 살 만하다.
삼법인(三法印)은 불교 교리의 핵심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서 일체개고(一切皆苦)다. 각각 ‘변화’와 ‘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을 가리킨다. 병들고 죽으니까 애통하고, 너는 내가 아니어서 피곤하다. 결국 존재의 필연적인 한계를 수용하는 태도가 치유의 시작이다. 돈이든 명예든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걸 인정하고 독립된 자아란 없기에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한두 시름쯤은 충분히 덜 수 있다. 중도는 자족과 균형의 처세술이다.
얼음과 물의 비유를 자주 든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됐다고 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얾’이라는 인연에 따라 지금 당장은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얼음이 물이고 물이 얼음이다. 그리고 영원히 얼음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냉혈한을 만든다. 공(空)하니까 채울 수 있고, 허망하니까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사회에서 갈등이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모두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지나친 욕심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만한 정진도 드물다. 변화와 관계로부터의 자유가, 실용적 관점에서의 해탈이다.
앞서가려다 끝내 엇나가는 법이다. 그냥 보면 되는데, 엿보거나 넘보다가 기어이 사단이 난다. 반쯤만 갖는 절제와 늦게 가도 괜찮다는 여유가 필요하다. 눈부신 미래는 성실한 오늘에 있다. 세상은 결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내가 세상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할 의무도 없다. 답답한가? 섭섭한가? 당신은 그저 당신의 삶을 살면 된다.
제39칙
발우를 씻어라(趙州洗鉢, 조주세발)
어떤 객승이 조주종심(趙州從諗)에게 물었다. “제가 절에 들어왔으니,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조주가 말했다. “밥은 먹었냐?” “먹었습니다.” “그럼 밥그릇을 씻어야지.”
고이면 썩고 쌓이면 병이 된다. 무심(無心)이란 그래서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는 마음이다. 불우했던 유년시절, 주변의 질투와 시기, 억울한 세금고지서, 의절하고 잘 사는 친구 등등을 떨쳐내지 못하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되고 운이 나쁘면 신체적 종양으로 자라난다. 죄는 남이 저질렀는데 그 과보는 내가 받는 꼴이니, 전적으로 손해요 한심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처치해야 할 것이 번뇌인데, 이즈막엔 ‘마음치유’라는 방식의 수행법이 유행한다. 번뇌의 ‘무의미화’ 또는 ‘승화’가 주요한 코드로 보인다. 자신을 괴롭히는 원한의 본질이 한낱 망상임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또한 ‘자비명상’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열광한다. 원한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스트레스 없이 단출한 마음은 모든 사람의 로망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거룩한 가치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왜곡이자 눈가림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실컷 두들겨 맞았는데 고소는커녕 병원비도 받아내지 않는 격이고 이불속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격이다.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은 현실을 솔직하게 바라볼 줄 아는 눈이 관건이다.
이러한 연유로 무의미화 또는 승화가 아닌 ‘소화(消化)’라는 화두에 집중하는 편이다. 번뇌를 피하거나 번뇌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삼키려는 시도다. 돌이켜보면, 아무리 어쭙잖은 능력이라도 그것은 모멸감과 열등감을 이겨내려는 노력이었고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 인생에도 공짜는 없다.
아무리 깨끗이 밥을 먹어도, 밥그릇엔 지저분한 흔적이 남는 법이다. 마음치유든 자비명상이든 내막을 살피면, 밥을 먹었으면 똥을 누러 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가지, 밥그릇을 씻을 생각은 않는 것과 같다. 밥그릇을 씻으면 밥그릇도 깨끗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팔뚝에 힘이 붙는다. 아팠던 만큼만 강해지는 것이다.
제40칙
운문의 흑과 백(雲門黑白, 운문흑백)
운문(雲門) : 대답해주십시오. 건봉(乾峰) : 무슨 대답? 운문 : 제가 늦었군요. 건봉 : 뭐가? 뭐가? 운문 : 후백(侯白)만 있는 줄 알았는데, 후흑(侯黑)도 있었군.
중국 송나라 최고의 시인이었던 소동파(蘇東坡)는 당나라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백(李白)을 존경했다. 이백은 고숙계(姑熟溪)를 비롯한 열 가지 절경을 한시로 노래한 바 있다. 이름하여 ‘고숙십영(姑熟十詠).’ 그런데 소동파는 위작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 말이 천박하고 비루하여 태백의 글이란 게 의심스러웠다. 『동파지림(東坡志林)』” 그의 육감은 정확했다. 『동파지림』에 “손막이 왕안국에게서 들은 말이라면서 이것은 이적의 시다. 비각 아래에 있는 이적의 시집 속에는 이 시가 들어 있고, 정작 이백의 시집에는 이 시가 없다.”고 적었다. 이적은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작품이 오래고 널리 읽히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남의 명성을 도둑질해 이문을 취하는 양아치보다야 낫지만, 여하튼 짝퉁이다.
‘후백’은 이백, ‘후흑’은 이적을 가리킨다. 곧바로 기봉(機鋒)을 드러내지 못한 건봉을 두고 ‘호떡선생’ 운문이 골리는 형국이다. 생몰연대조차 알 수 없는 선승이 장난기 심한 선승을 만나 천하의 멍청이로 역사에 기록됐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 이미 틀린 것이다. 우물쭈물하거나 중언부언할 때를 떠올려 보라. 진실은 멀찌감치 떠나버리고 이익만이 입안을 맴도는 법이다.
제41칙
낙포의 임종(洛浦臨終, 낙포임종)
임종을 앞둔 낙보원안(樂普元安)이 대중에게 말했다. “지금 한 가지 일이 생겼기에 그대들에게 묻겠다. 그것이 만일 옳다면 머리 위에 머리를 포개는 격이요, 옳지 못하다면 목을 베이고서 살기를 바라는 격이다.” 어느 수좌가 나서서 말했다. “푸른 산은 항상 움직이고 밝은 대낮엔 등불의 심지를 돋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낙보는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딴 소리를 하느냐.”고 다그쳤다.
언종(彦從) 상좌라는 이가 있다가 나서서 일렀다. “그렇다 아니다라는 분별적인 질문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낙보는 “틀렸다. 다시 일러라.” “저는 말로는 다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대가 말로 다할 수 있든 다할 수 없든 신경 쓰지 않는다.” “저에게는 화상께 대답해줄 시자가 없습니다.”
낙보는 저녁에 언종을 따로 불렀다. “그대의 오늘 대답은 심히 타당하다. 협산 선사가 이르기를 ‘눈앞에 법이 없으니 뜻이 눈앞에 있다. 눈앞의 법이 아니므로 귀나 눈으로 미칠 바가 아니니라.’ 하신 뜻을 알았을 것이다. 말해 보라. 어느 구절이 객이며 어느 구절이 주인가.” “모르겠습니다.” “아니다. 그대는 알았을 것이다. 생각 좀 해봐라.”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 괴롭구나 괴롭구나.”
어떤 승이 물었다. “화상의 높으신 뜻은 어떠하십니까?”
이에 낙보가 이르되 “자네의 배는 아직 맑은 파도 위에 뜨지도 않았는데, 검협(劍峽)에서는 공연히 나무거위를 날리느라 헛수고만 했구나.”
주관이 헛것이든 객관도 헛것이다. 주관적 견해가 나의 거짓말이라면, 객관적 사실은 남들의 거짓말일 뿐. 사바세계에서 ‘옳음’은 곧 ‘이김’이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한 자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바다 위에선 날린 종이비행기는, 어디로 날아가든 바다로 떨어진다. … 바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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