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깨달음에 대한 두 가지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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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6 년 1 월 [통권 제3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92회 / 댓글0건본문
잘 이해함이 깨달음이다
성철 스님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며, 깨달음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난다면 불교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깨달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제기되어 파문이 일고 있다.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마음을 깨닫는다고 하지만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으며, 깨달음이란 어떤 경지를 말하는지 모호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교만큼 마음에 대해 철저하게 파고들고, 세밀하게 설명하는 종교나 사상은 없다. 초기 불교의 12처설에서부터 유식(唯識)의 8식설까지 나아가 선종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핵심주제는 온통 마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응 스님의 주장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대목이다. 스님은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깨달음은 말을 떠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이며, 마음의 작용이 사라진 심행처멸(心行處滅)의 경지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필자에게 이런 주장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선가의 전통적 입장이나 현대를 대표하는 수행자였던 성철 스님의 입장은 어떨까? 우선 영가현각 스님의 말씀을 눈여겨 볼만하다. 스님은 『증도가』에서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애는 것은 심의식(心意識)을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마음을 물리치고 생겨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간다.”고 했다. 영가 스님은 심의식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작용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했다. 따라서 설법을 열심히 듣고 ‘잘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인식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마음의 작용을 물리치는 것(却心)’이 선문(禪門)의 요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성철 스님은 ‘물리쳐야하는 마음(心)’은 단지 이해하는 등의 인식작용뿐만 아니라 마음을 구성하는 8식 전체라고 보았다. 이 말은 깨달음이란 잘 이해함과 같은 6식의 작용을 넘어서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있으면서 “자성을 깨치는 데에 근본적으로 방해되는 아뢰야식부터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의 번뇌를 유발하는 근원적 무명은 제8식이므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제6식 차원의 ‘인식’이 아니라 제8아뢰야식 차원으로 내려가 무명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응 스님이 말하는 ‘잘 이해함’이란 스승의 말씀을 잘 새겨듣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내용을 이해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성철 스님의 주장에 따르면 아무리 잘 이해해도 그것은 언어적 범주에 불과하며, 인식작용의 영역일 뿐이다. 유식학에 입각해 본다면 ‘이해’는 제6식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며, 표피적 인식작용에 불과하다. 불교에서 깨달음과 해탈을 이야기할 때는 이와 같은 표피적 인식의 전환이 아니라 근원적 무명을 밝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잘 이해함’이 깨달음이라는 주장은 제8아뢰야식의 단계로 내려가 근본무명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성철 스님의 구경각(究竟覺) 설과는 서로 상반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이 ‘잘 이해하는 것’이라면 굳이 아뢰야식을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근본무명에 대해 고심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잘 이해함’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8식설과 같은 마음에 대한 교설을 부정하고, 생사윤회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불교의 기본적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경각만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잘 이해함’과 구경각의 차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컴퓨터의 작동원리를 응용해 볼 수 있다. 컴퓨터의 메모리는 크게 ROM과 RAM으로 구분되어 있다. ROM은 컴퓨터가 만들어진 이후 켤 때마다 변함없이 작동하는 BIOS 정보를 담고 있고, RAM은 컴퓨터가 작동할 때 구동되는 응용프로그램의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다. ROM에 저장된 BIOS라는 정보는 가장 하위 단위에서 컴퓨터의 모든 조작을 관장하지만 사용자 환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RAM은 사용자가 모니터에서 확인하는 각종 응용프로그램의 내용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구체적인 정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RAM에 담긴 정보는 컴퓨터의 본질적 구동영역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전원을 끄는 순간 모든 정보는 사라지고 만다.
이 두 개의 메모리를 유식학에 근거하여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ROM은 자아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제8아뢰야식에, RAM은 금생에서만 작동하는 제6식에 각각 비유할 수 있다. 제6식은 카메라, 마이크, 자판 등과 같은 입출력 장치의 정보를 취합하고 저장하는 RAM과 유사하다. 6식은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기관의 정보에 근거해 작동하지만 삶이 끝나는 순간 RAM에 저장된 정보처럼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아뢰야식은 ROM에 저장된 정보처럼 자아정체성과 생사윤회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으며,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다음 생까지 계속 작동한다. 마치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프로그램이 ROM에 저장된 BIOS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제8식도 보이지는 않지만 자아의 근원이 되고, 생사를 관통하여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모든 번뇌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 유식학의 설명이다.
따라서 유식학에서는 연기와 중도를 설명한 뒤에 그 이치를 바로 알려면 아뢰야식의 근본무명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화면에 나타난 RAM의 정보가 컴퓨터를 끄는 즉시 사라지듯이 6식 차원의 정보 역시 살아있는 동안에는 유효하지만 죽는 순간 모두 사라진다. 이런 관계로 본다면 의식차원에서 움직이는 인식의 변화가 생사해탈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설사 제6식에 해당하는 의식 차원에서 무엇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은 전원을 끄면 사라지는 RAM의 정보와 같아서 생사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선에서는 제6식단계의 작용인 ‘잘 이해함’과 같은 인식으로서는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해심밀경』에 따르면 제8아뢰야식은 인간의 업을 모두 저장하고, 윤회의 주체가 되는 동시에 억겁에 걸쳐 퇴적된 근본무명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중도와 연기와 진여를 바로 깨치려면 심의식의 근본무명인 아뢰야식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원적 무명을 밝히지 않고는 “중도나 연기나 불성을 깨칠 수 없다.”는 것이다. 『백일법문』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유식설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이란 일상 속에서 법문을 잘 듣거나 문자를 해독하여 머리로 잘 이해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삶이 지속되는 순간에는 작동하지만 죽음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고통은 생사윤회라는 것은 불교의 기본적인 전제에 해당한다. 따라서 해탈은 그와 같은 근원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토론과 대화를 통해 얻어진 인식은 전원을 끄면 사라지는 RAM의 기억과 같아서 생이 끝나는 순간 소멸하고 만다. 따라서 성철 스님이 말하는 구경각은 단지 제6식 차원에서 나타나는 인식의 변화, 이성적 차원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스님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유식의 심의식설을 수용하여 근원적 무명의 단절, 생사의 종언, 윤회전생의 종결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철 스님은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치려면 아뢰야식을 두드려 부수지 않고는 절대로 대자유한 대열반을 증득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 이유는 “공부를 아무리 잘 해서 오매일여가 완전히 되어 무심경계에 이르러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마계이지 견성은 아니다.”는 것이다. 근본무명을 깨지 못하면 아무리 스승의 법문을 잘 기억하고, 좋은 말을 되새김질하고, 밤 새워 토론해도 깨달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응 스님은 스승의 법문을 잘 듣고, 마음에 새기고, 대화와 토론으로 잘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을 가는 방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제6의식의 사량분별 속에서 경계가 좀 바뀌고 지견이 좀 생겼다고 해서 이것을 견성이라고 알면 자기만 망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 남에게 가르치면 남까지 전부 망한다.”고 했다.
제6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표피적 인식의 변화를 깨달음으로 착각하면 도적을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런 것을 깨침으로 알면 자신이 잘못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까지 망치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은 구경각을 견성이라고 했지 6식은 물론 제8아뢰야식까지도 견성이 아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분별이 작용하여 객진번뇌가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면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스님 말씀과는 근본적으로 틀린다.”는 것이 성철 스님이 말하는 구경각론의 핵심요지다.
물론 깨달음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하고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한 논의는 불교의 핵심적 주제이고,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축적된 풍부한 교설이 있다.
따라서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가 유의미한 논쟁이 되려면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선행하는 교설에 대한 검토와 비판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전통적 입장과 새로운 입장의 차이가 명료해지고, 무엇이 옳고 그런지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번 문제 제기가 깨달음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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