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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록의 뒷골목]
‘내 안의 나’와 친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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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5 년 12 월 [통권 제3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2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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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보니 살아오면서 남에게 분노한 적은 많지만 실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들 조금씩은 썩었고 조금씩은 뒤틀려있다는 믿음은, 요지경의 인생을 한결 수월하게 건너게 해준다.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걸어온 길은 하나같이 천양지차다. 기질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며 그리하여 재능과 역사가 다른 법이다.

 

각자의 몸에 묶인 마음은 각자의 몸 안에서만 유효하다.
누군가가 제시하는 길은 사실 그에게만 평탄했을 길이다. 자신에게도 탄탄대로일 줄 알고 함부로 따라갔다가는 벼랑을 만나기 십상이다. 참고는 하되 의지해서는 안 된다. 불신보다 위험한 것이 맹신이다.

 

【제33칙】
삼성의 금빛 잉어(三聖金鱗, 삼성금린)

 

삼성혜연(三聖慧然)이 설봉의존(雪峰義存)에게 물었다. “그물을 꿰뚫은 금빛 잉어는 무엇으로 먹이를 삼습니까?”
“그대가 그물에서 벗어나면 말해주지.” “1500명이나 거느린 큰스님이 말귀도 못 알아듣는군요.” “다 늙어서 주지(住持) 일을 하려니 여간하겠나.”

선사들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다. 생사의 경계를 초탈했으니 두려울 것이 없고, 시비(是非)가 헛것임을 아니까 다투고 으스댈 것도 없다. 심지가 굳어서 좀체 흔들리질 않는다.
그들에겐 아무리 찬란한 문명이라도 쓰레기장이요 모든 이념은 말장난일 뿐이다. 존재의 본질을 통찰한 자의 여생은 심심하고 심심하다.

 

그러니까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짐작하다시피 삼성이나 설봉이나 ‘그물을 꿰뚫은 금빛 잉어’들이다. 삼성의 질문은 ‘깨달아서 정말로 심심할 텐데 당신은 어떻게 지내느냐’는 안부인사다. 설봉의 대꾸는 짐짓 삼성을 깔보는 모양새인데, 거기에 욱할 삼성이 아니다. 화를 내면 지는 거다.

 

삼성은 설봉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고 ‘깨달은 자에게 쓸데없는 걸 물어본다’고 면박을 줬다. 설봉 역시 삼성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지 않았다. ‘셀프디스’로써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렸다. 자고로 상대가 흥분을 해줘야 놀릴 맛이 나는 건데. 이렇듯 도인의 삶이란 별 게 아니다. 져줄 줄 알고,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이다.

 

【제34칙】
풍혈의 티끌(風穴一塵, 풍혈일진)

 

풍혈연소(風穴延沼)가 다음과 같이 수어(垂語)했다. “만약 티끌 하나를 세운다면 나라가 흥성하고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이에 설두중현(雪竇重顯)이 주장자를 들어 올리며 일렀다. “나랑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사람 없는가?”

 



티끌이란 어떤 일을 시작하는 발단을 뜻한다. 나라를 세우려 할 때 그 출발은 ‘명분’에서 비롯된다. 군왕의 폭정에 대한 불만이든 새로운 세상을 향한 대망이든, 일단 명분이 세워지고 명분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야 거사를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다.

 

 

본칙에 대한 평창에선 은(殷)의 주왕(紂王)을 척살하고 주(朱)를 개국한 무왕(武王)의 고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이즈음의 역사에 기록된 충신들이다. 형제는 잘났건 못났건 주군을 폐하는 건 불의라며 무왕의 역성혁명을 반대했다. 끝내 무왕이 집권하자 함께 산속으로 숨어든 뒤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살았다. 주나라의 곡식은 더러워서 못 먹겠다는 게 이유였다. 명분을 부정한 자들의 선택은 은둔이었고, 이는 산승(山僧)의 보편적인 일상과 닮아 있다.

 

주의 건국에 기여한 주요 인물이 바로 유명한 강태공(姜太公)이다. 평생을 낚시로 소일하다 책사를 찾던 무왕의 눈에 들었다. 마침내 여든의 나이에 재상에 오르며 인생역전에 성공한 절치부심의 표본이다. 평창에는 “높은 이름은 백이와 숙제요 위대한 업적은 태공의 것”이라고 적혔다. 어느 한쪽을 두둔하는 모양새로는 보이지 않는다.

 

“백발의 늙은이가 위수에서 낚시를 드리웠으나, 그 어찌 수양산의 굶어죽은 이와 같으랴? 다만 한 티끌에 따라 변화가 생겼을 뿐이니, 높은 명성 혹은 위대한 업적 모두 잊기 어렵다”는 송고(頌古)에서 중립적 관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강태공은 강태공대로 백이와 숙제는 백이와 숙제대로, 결단하고 실천했을 따름이다. 아울러 결단과 실천에 대한 업을 고스란히 받았다.

 

전자는 나라를 죽인 공으로 나라의 흥성을 맛봤고, 후자는 나라를 사랑한 탓에 나라의 멸망을 방치하고 말았다.
‘한 티끌’에서 싹튼 세상의 양상은 이처럼 양면적이고 모순적이다. 또한 명분의 전리품은 소수에게만 집중되게 마련이다. 99%는 오늘도 똑같고 내일도 별 볼 일 없을 일상을 살아간다. 대다수의 촌부들에게 임금은 없어도 되는 존재이며 빼앗아가지만 않으면 성은이 망극한 존재다.

 

한편 ‘말을 드리운다’는 수어(垂語)란 곧 상대를 은근히 떠보는 말이다. 권력의 무상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사들이겠으므로, 풍혈의 수어는 ‘궐기’의 의도로 여겨지진 않는다.
‘의기투합’을 외치는 설두의 선언 역시 그냥 장난으로 보인다. “시골 노인 앞에선 조정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이마를 찡그릴 일이 없다(樂普元安, 낙보원안).” 한바탕 꿈 때문에 쓸데없이 칼을 가는구나.

 

【제35칙】
낙포의 굴복(洛浦伏膺, 낙포복응)

 

낙보원안(樂普元安)이 협산선회(夾山善會)에게 도를 물으러 갔다. 그는 절도 하지 않은 채 뻣뻣하게 마주섰다. 건방지다는 투로 협산이 일렀다. “닭이 봉황의 둥지에 깃들이려는 것이냐, 당장 나가라!” 낙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스님의 도력을 듣고 먼 곳에서 달려왔습니다. 한번 제접해 주소서.” “지금 여기에는 그대도 없고 노승(老僧)도 없다”는 협산의 대답에 낙보가 할(喝)을 질렀다. 이에 협산이 혼쭐을 냈다. “그 입 닥쳐라. 까마귀 울음소리 따윈 걷어치워라. 구름과 달이 하늘에 있는 것은 같지만, 산에서 보는 것과 계곡에서 보는 것은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이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의 혀를 끊어버릴 순 있어도, 혀 없는 사람의 경계는 아득하여 미치지 못한다.” 낙보는 말을 잃었다. 협산은 그를 한 대 후려쳤다. 그때서야 낙보는 절을 했다.

제접(提接)은 깨달은 자가 깨닫고 싶어 하는 자를 가르치는 일이다. 강의가 아니라 상담에 가깝다. 선문답을 통해 깨달았는지 평가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바로잡아주는 형식이다. 여하튼 ‘깨달음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낙보의 요청에 ‘할 말 없다’며 협산이 물리는 모양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은 낙보다. 선객은 매사에 당당해야 한다는 통념 때문에 절을 하지 않았고, ‘임제할’이 멋지다는 풍월 때문에 “할!”을 했다. 협산의 혼찌검은 매우 이성적이고 상식적이다. 세간을 모방하는 일이 우습듯 출세간을 모방하는 일도 볼썽사납다. 세상에 떠도는 이런저런 ‘구라’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닭대가리를, 협산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에는 그대도 없고 노승도 없다”는 말은 서로 못 본 셈 치자는 핀잔이고 멸시다.

 

달마는 자질구레한 것 다 내버린 채 오직 본성만 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불성(佛性)이란 결국 자기다움이다. 타인이 규정할 수 없고 훼손할 수 없다. 이른바 ‘마음의 소리’ 또는 자기의 내면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둔중한 계시와 같다. 자기다움은 자기만이 안다. 그냥 알아지진 않는다. 오랜 사유가 만들어낸 퇴적물이다.
물론 자기의 불성을 따르는 길은 만만치 않다. 아무나 갈수 없는 길이기에 고되고, 아무도 몰라주는 길이기에 외롭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살길 찾아가게 마련인 게 남들이다.
장기적으로는 ‘내 안의 나’와 친해지는 게 유리하다. 죽는 순간까지 나를 위해 살다 갈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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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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