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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새롭게 태어난 해인사 구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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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6 년 1 월 [통권 제3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61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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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4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불사로 인한 해인사 큰절의 변화와 암자들의 환골탈태를 보노라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 70은 되어 보이는 보살님이 백련암에 올라와서 저에게 묻습니다. “스님! 백련암은 어디로 가야 하능교?” “예? 여기가 백련암입니다. 여기 말고 따로 백련암 어디 없습니다.” “아니라요, 스님! 여기는 예전 백련암이 아니라요. 옛날 처녀 때 찾아왔던 백련암은 참 소박하고 아담한 암자였는데 지금 이 절은 그때 백련암보다 집도 많고 부티가 나는구만요. 내가 찾아온 그런 질박한 백련암이 아닙니다. 내가 절을 잘못 찾아 왔으니 저 위에 있을 백련암으로 다시 올라 갈라요.”

 


다로권경실이 들어서기 전의 해인사 전경 

 

할머니는 지금 당신이 보는 백련암에 실망하고 옛날 보았던 질박한 백련암이 그리워서 죽기 전에 한 번 가 본다고 온 길인데 옛날 백련암을 찾아 가겠다고 한사코 고집이었습니다.

 

맥 빠져 하시며 돌아서 내려가는 노보살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빠져 들었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본사나 말사나 암자들은 40년 전의 모습은 다들 어디로 가버리고 크고 작은 불사를 이루어 옛날의 소박한 절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 되었다 생각하며 그 노보살님께 떳떳함보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40여 년 전의 해인사 큰절 모습과 지금의 해인사 큰절 모습을 드론을 띄워 촬영해 본다면 장경각과 큰법당, 구광루, 해탈문, 봉황문, 일주문,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윤곽은 그대로이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평가는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보경당이 크게 들어서 있는 자리의 앞마당에는 ㄱ자의 명월당 건물이 있었고, 그 옆의 해우소를 돌아나가면 1층의 목조창고에 유가의 목판이 1만장 넘게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도견 스님이 주지를 하실 때 두 건물을 헐어버리고 지금의 보경당을 지었는데 해인사 구광루 앞마당에서 보면 1층이지만 극락전 쪽에서 바라보면 지하 1층의 콘크리트 150평의 건물과 그 위에 목조건물로 전각을 크게 지으니 지붕 높이가 마당에서 보면 명월당 시절보다는 2배나 높아져 기존 주변의 경관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때까지 해인사 일주문에 오르기 직전에 직경 3m 정도의 영지(影地)가 있었고, 거기에 가야산 정상이 비치는 신령스런 곳이라고 다들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보경당 지붕이 높아지는 바람에 영지에 상봉이 비치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큰 못 형태로 개울을 막아놓으니 전에는 영지에 상봉이 훤하게 보이던 모습이 지금에서는 상봉이 못에 비쳐 보이기는 보이는데 전체가 아닌 주봉이 잘려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일로 사중이 시끄러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규모가 큰 만큼 요긴하게 쓰이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가야산 중봉에서 발원하여 퇴설당 옆으로 흘러 목공소를 지나가는 개울물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보광 스님이 강사로 오시면서 그곳을 막아 작은 못을 만들어서 겨울에 꽁꽁 얼면 학인스님들이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곤 했습니다.

 


다로권경실이 들어선 해인사 구광루  

 

법전 스님께서 주지로 부임하시면서 해우소 옆 개울을 매립하여 큰 하수도관을 묻고 바윗돌로 옹벽을 쌓아 올려서 V자 골짜기를 평지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곳을 지나다 보니 극락전에 계시는 봉주 큰스님께서 총무, 재무스님 등을 불러놓고 “해인사는 풍수지리설로 행주형국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니요? 그런데 그 한쪽을 막아버리면 배가 나아가지 못하고 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해인사는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꼼짝 못하고 망하는 것 아니냐 이 말이여. 당장 공사를 때려치우고 행주형을 살려 놓아요!” 하시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시며 야단을 치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이 스님 저 스님 모여들어 “옳다” “그르다” 하며 즉석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 봉주 큰스님께 한 말씀 올렸습니다. “큰스님, 해인사가 배가 나아가는 행주형이라 하지만 그것은 돛단배 정도 아니겠습니까? 이제 주지스님께서 큰 불사를 하시려고 계곡을 막고 땅을 넓히려 하시니, 이 계곡이 막아지면 큰절과 극락전이 연결이 되어 항공모함형이 될 것인데, 그러면 해인사가 더 안정되어 크게 발전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봉주 큰스님께서 “뭐요? 풍수지리에는 행주형만 있지항공모함형이란 말은 없단 말이요.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다 허튼소리요. 행주형을 다시 살려내요.” 하시며 더 크게 화를 내시는데, 저는 민망하기도 해서 얼른 백련암으로 올라와 버렸습니다. 지금은 해인사가 행주형이 아닌 항공모함형으로 지형이 바뀌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후에 1990년 2월에 법전 스님 2기 주지임기가 시작될 때 성철 큰스님의 당부를 받들어 제가 해인사 총무국장으로 임명되어 소임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강원 현당 불사를 마치고 강사채도 거의 불사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강원 관음전 불사를 2년 만에 마치고 구광루를 해체 복원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건물들을 해체 복원할 때는 그리 큰 물의가 없었는데 구광루 해체 복원을 두고서는 이런 말 저런 말이 쏟아져 나와 한참 시끄러웠습니다.

 

“나는 저 구광루를 바라볼 때마다 해인사 제일 중앙에 우뚝하게 세워져 있는 건물로써 실용적으로는 전혀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요긴한 곳은 정면 1층인데 내부구조가 주춧돌들로 인하여 울퉁불퉁하여 전 면적이 고르지 못하니 소금과 쌀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구광루 1층과 2층을 같은 넓이로 정리하여 해체복원 한다면 해인사의 명물로써 제일 요긴한 장소가 될 것이고, 해인사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옛날 구광루는 1층 건물 내 끝 공간으로 계단을 만들어서 올라가게 되는데 그 끝 계단에서 해인사 대적광전과 주위 경관을 바라보는 시야가 끝내줍니다. 그러니 구광루를 해체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그러면 스님들이 같이 가봅시다. 벽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옛날에 계단 돌을 붙였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광루 건물 내로 계단을 내기 전에 건물 밖으로 계단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갑론을박을 하다가 오늘의 구광루 형태로 건물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청을 끝마치지 못하고 총무 소임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단청장도 정하고 재료도 준비 중이었는데 뒷날 마무리 된 단청을 보고서는 많이 아쉬워했던 기억입니다.

 

그렇게 구광루는 내부를 잘 정리하였으니 사중에서 요긴하게 사용해오고 있었습니다. 불교도서전을 비롯하여 팔만대장경 전시실 등 해인사 홍보관으로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오신 향적 주지스님이 구광루가 해인사 제일의 문화공간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해서 정종섭 행자부 장관에게 부탁하여 ‘다로경권실(茶爐經卷室)’의 현판을 달아서 문을 열었습니다.

 


다로권경실 내부 모습 

 

해인사 해탈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면 구광루 2층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1층 7칸의 전통식 벽을 헐고 4칸은 장경각 수다라 입구 형태를 차용하고 3칸은 전통 사각 형태로 하여 유리 창문으로 디자인을 변형해 놓으니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찾으려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게 느껴졌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전체 75평의 넓은 공간에서 해인사를 찾은 사람들이 편하게 앉아 차와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볼 수 있는 ‘문화살롱’이 나타납니다. 이곳은 신행상담은 물론 각종 전시와 공연 및 저자와의 만남의 장, 불교 동아리 모임 등이 가능한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저의 구광루 해체 복원의 꿈이 향적 스님 시대에 와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듯해서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해탈문을 지나서 구광루를 바라보는 모든 분들에게 해인사의 맑은 정신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해인사의 격을 한껏 높여주신 주지 향적 스님과 주변에서 애써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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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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