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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 이야기 ]
운문종 ❻ 절단중류와 수파축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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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  2025 년 6 월 [통권 제146호]  /     /  작성일25-06-04 10:20  /   조회23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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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51

 

운문종을 창립한 문언은 『단경』과 남종선, 그리고 위앙·임제·조동의 조사선과 같이 기본적으로 본래현성과 당하즉시를 바탕으로 삼고 있고, 그러한 견지에서 운문삼구의 제일구인 ‘함개건곤’을 제창하고 있음을 앞에서 논했다. 그렇지만 운문의 한결같은 입장은 그에 대한 천착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예컨대 문언은 “건곤乾坤과 대지大地, 그 속의 미세한 티끌마다 부처들이 가득함.”(주1)이라고 하여 ‘함개건곤’을 승인하면서도 “설령 네가 털끝 하나를 집어 들어 그걸로 온 대지大地를 한순간에 밝힌다 해도, 그것은 또한 자기 살을 도려내어 상처를 내는 짓일 뿐이다.”(주2)라고 강조한다. 미세한 티끌에도 부처가 담겨 있으니, 털끝 하나의 깨달음에도 우주법계를 밝힐 수 있음이 온당한 것인데, 문언은 그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방법이 정리되어 나온 것이 운문삼구의 제이구인 ‘절단중류’이다. 

 

절단중류截斷衆流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문언은 운문삼구의 제이구를 ‘목기수량目機銖兩’이라고 제시하지만, 이는 『운문광록』에서도 한 차례 언급되었으며,(주3) 다른 자료에서는 그 용례를 찾을 수 없다. 다만 ‘목기目機’는 ‘눈의 기틀’, 혹은 ‘눈과 기틀’로 해석될 수 있고, ‘수량銖兩’은 흔히 아주 미세한 무게를 헤아리는 의미이므로 “눈의 기틀로 (상대방의 근기根器를) 미세하게 헤아린다.”로 해석할 수 있다.

 

사진 1. 운문사 탑 원경.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는 ‘눈’, 즉 우리의 안근眼根과 대기大機의 관계를 미세하게 저울질하는 것, 즉 남종선의 화법으로는 육근六根과 심心의 관계를 논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아마 이러한 모호함으로 덕산연밀은 그를 ‘절단중류’로 바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운문삼구가 결국은 제접법提接法의 공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눈의 기틀로 상대방의 근기를 미세하게 헤아린다.”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덕산연밀은 「송운문삼구어頌雲門三句語」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제시하고 있다.

 

절단중류截斷衆流

산처럼 바위처럼 쌓이는 것은

하나하나가 티끌이구나.

다시 현묘한 이치를 논하려 하면

얼음이 녹듯 기왓장 부서지듯 없어지리라.(주4)

 

이러한 연밀의 게송의 내용은 바로 ‘석공析空’을 떠올리게 한다. 불교에서는 물질과 우리 정신의 관계를 처절하게 분석, 다른 말로 하자면 철저히 해체하여 그것에 자성自性이 비었음[空]을 논증하는 석공관析空觀을 많이 사용하는데, 연밀이 그를 원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게송에서 연밀은 궁극적인 선리는 바로 ‘함개건곤’인데, 그에 계합하지 못하고 자꾸 현묘한 이치를 논하려고 하니, 헛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렇게 현묘한 이치를 찾으려는 일이 바로 중류衆流이니, 이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절단중류는 앞에서 언급한 운문의 ‘일자관一字關’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언은 학인들이 어떤 질문할 때 한 글자로 답하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이 운문의 일로一路입니까?”라고 묻자 “친親.”(주5)이라고 답한다. 이러한 예는 상당히 많은데, 『운문광록』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보인다.

 

사진 2. 운문사 천왕전.

 

“무엇이 도道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한 글자[一字]를 꿰뚫어라.”라고 하자 다시 묻기를, “꿰뚫은 뒤에는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천리千里와 같은 바람이 분다.”라고 하였다.(주6)

 

이로부터 문언은 ‘일자관’을 중요한 제접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일자관으로부터 ‘절단중류’를 도출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문언의 ‘목기수량’은 학인의 근기를 미세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그에 맞는 일자관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절단중류의 전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반대로도 해석할 수 있다.

 

『오가종지찬요』의 ‘절단중류구’

 

성통의 『오가종지찬요五家宗旨纂要』 권3에서 이 ‘절단중류구截斷眾流句’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본래 이해하거나 깨달음이 아니요 없애버리고 오게 함이니, 일자一字를 사라지게 함이 아니라 만기萬機가 모두 쉬는 것이며, 언어와 사량思量의 길이 끊어지고 모든 견해가 남지 않으니, 현중현玄中玄이다.(주7)

 

여기에서 성통도 절단중류를 운문의 일자관을 통해서 발현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절단중류’를 임제의 삼현三玄 가운데 ‘현중현’으로 배대하고 있는데, 『오가종지찬요』 권1에서 ‘현중현’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첫째, ‘현중현’. 조주趙州가 답한 ‘뜰 앞의 잣나무’의 화두와 같다. 이 말은 체體 위에서 또한 ‘체’에 머무르지 않고, 구句 가운데 있으면서 또한 ‘구’에 집착하지 않는다. 묘하고 현묘함이 다함이 없으니 일을 기機에 두지 않는다. 마치 기러기가 드넓은 하늘을 지나면서 그림자가 차가운 물에 잠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또한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칭한다.(주8)

 

임제의 삼현 가운데 ‘현중현’은 최고의 단계이니, 성통은 ‘절단중류’를 선리를 완성한 단계로 보고 있다고 하겠다. 심체心體로부터 언어가 나오지만, 결코 그 ‘체’와 ‘구’에 머물지 않으며, 마치 기러기가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우는 것과 같아 이를 ‘용중현’이라고도 칭한다고 한다.

 

이러한 성통의 평가는 앞에서 언급한 ‘함개건곤’의 평가와 같이 상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역시 운문삼구를 임제의 삼현과 같이 단계로 보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수파축랑隨波逐浪

 

운문삼구의 제삼구는 ‘수파축랑隨波逐浪’이다. 운문의 말로는 불섭춘연不涉春緣으로 역시 ‘목기수량’과 같이 『운문광록』에서도 한 차례 언급되었고,(주9) 그에 대한 다른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운문광록』에서는 ‘불섭춘연’으로 표기하지만, 『인천안목』에서는 ‘불섭만연不涉萬緣’으로 표기하고 있는데(주10), ‘불섭만연’이 보다 의미가 분명하다고 하겠다. 덕산연밀은 「송운문삼구어」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제시하고 있다.

 

수파축랑隨波逐浪

날카로운 말[口利], 예리한 질문[舌問]을 잘 분별하고

높고 낮음에 모두 어그러짐이 없으니

병에 따라 약을 주듯 상황에 따라 진단診斷하네!(주11)

 

이로부터 연밀은 ‘수파축랑’을 학인을 제접하는 과정의 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어떠한 학인이 온다고 해도 함개건곤의 자리에서 마치 파도와 파랑을 타고 따르며 선리를 깨우쳐 준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이로부터 운문의 ‘불섭춘연’ 혹은 ‘불섭만연’의 의미와 통하는데, 만연萬緣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깨달음으로 이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로부터 무수무증無修無證의 임운자재任運自在와 역시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금강경金剛經』에서 여래가 출세한 이후 무량한 중생을 멸도滅度에 이르게 하였지만,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없음을 강조하면서 무상無相을 도출하는 것(주12)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3. 운문사의 게심정憩心亭

 

또한 수파축랑은 바로 언어의 문제와 관련이 있고, 운문삼구를 제시하게 된 직접적인 소이연所以然임을 앞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다만 『운문광록』에는 “만약 (도를) 얻은 사람은 불을 말해도 입을 데지 않고, 종일토록 말을 하지만 입술이나 이빨에 걸린 적이 없고, 한 글자도 말한 적이 없으며, 하루 종일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면서도, 쌀 한 톨이나 실 한 가닥조차 건드린 일이 없다. 비록 그렇지만, 이는 여전히 문정門庭의 설법일 뿐이다. 일을 말해도 일찍이 입술과 치아가 걸리지 않는다.”(주13)라고 하는데, 이는 ‘수파축랑’의 경계를 설한다고 하겠다.

 

『오가종지찬요』의 ‘수파축랑구’

 

성통의 『오가종지찬요』 권3에서는 ‘수파축랑구’를 다음과 같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학인이 다가오면 허용해 마주하며, 그 근기에 따라 이끌어 주고, 무심無心으로 사물에 응하며, 말을 따라 사람을 알아보고, 어린싹에 따라 땅을 골라주고, 간택揀擇함이 없으며, 알맞은 방편으로 상황에 따르니, 구중현句中玄이네.(주14)

 

성통은 ‘수파축랑’을 임제의 삼현 가운데 ‘구중현’과 유사한 것으로 배대하고 있고, 『오가종지찬요』 권1에서는 ‘구중현’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둘째, ‘구중현’. 마치 장공張公이 술을 마셨는데 이공李公이 취한 것과 같다. 앞이 삼삼三三이고, 뒤가 삼삼이다. 육육六六은 삼십육三十六이요, 그 가운데 뜻으로 헤아릴 길이 없다. 비록 체體에서 발현된 것이지만, 이 일구一句는 ‘체’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주15)

 

이로부터 성통이 ‘수파축랑’을 임제의 삼현 가운데 ‘구중현’으로 파악하는 까닭을 여실하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구중현’은 임제선 가운데 바로 언어와 문자의 공능을 논하는 것이므로 이 같은 배대는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연밀의 게송에서 제시하는 사상과도 일치한다고 하겠다. 

 

사진 4. 운문사 후문.

 

이상으로 운문종의 대표적인 운문삼구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사실 운문삼구에 들어 있는 선리禪理를 세세하게 논하고자 한다면 상당히 많은 분량의 논술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그 핵심적인 부분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리고 청대 성통의 『오가종지찬요』에서 해석한 운문삼구와 임제의 삼현을 배대한 부분을 언급했는데, 이는 좀 더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임제의 삼현은 임제삼구와 마찬가지로 선리를 깨우치는 데 표면적인 단계로 설정하지만, 운문삼구는 깨달음의 단계라기보다는 서로 유기적 관계로 보아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렇다. 그렇지만 성통이 임제종의 한월법장漢月法藏 계통임을 고려한다면, 운문삼구를 삼현과 배대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주1) [宋]守堅集, 『雲門匡眞禪師廣錄』 卷上(大正藏47, 549a), “乾坤大地, 微塵諸佛.”

(주2) 앞의 책(大正藏47, 546b), “直饒拈一毛頭, 盡大地一時明得, 也是剜肉作瘡.” 

(주3) 앞의 책, 卷中(大正藏47, 563a), “示衆云: 天中函蓋乾坤, 目機銖兩, 不涉春緣.”

(주4) 앞의 책, 卷下(大正藏47, 576b), “截斷衆流: 堆山積岳來, 一一盡塵埃. 更擬論玄妙, 氷消瓦解摧.”

(주5) [宋]守堅集, 『雲門匡眞禪師廣錄』 卷上(大正藏47, 550b), “問: 如何是雲門一路? 師云: 親.”

(주6) 앞의 책(大正藏47, 551a), 問: 如何是道? 師云: 透出一字. 進云: 透出後如何? 師云: 千里同風.

(주7) [淸]性統編, 『五家宗旨纂要』 卷3(卍續藏65, 279c), “截斷衆流句: 本非解會, 排遣將來, 不消一字, 萬機頓息, 言思路絕, 諸見不存, 玄中玄也.”

(주8) 앞의 책, 卷1(卍續藏65, 257a), “第一玄中玄. 如趙州答庭柏話. 此語於體上又不住於體, 於句中又不著於句. 妙玄無盡, 事不投機. 如雁過長空, 影沈寒水. 故亦名用中玄.

(주9) 앞의 책, 卷中(大正藏47, 563a), “示衆云: 天中函蓋乾坤, 目機銖兩, 不涉春緣.”

(주10) [宋]智昭集, 『人天眼目』 卷2(大正藏48, 312a), “師示衆云: 函蓋乾坤, 目機銖兩, 不涉萬緣.”

(주11) [宋]守堅集, 『雲門匡眞禪師廣錄』 卷下(大正藏47, 576b), “隨波逐浪: 辯口利舌問, 高低總不虧, 還如應病藥, 診候在臨時!”

(주12) [姚秦]鳩摩羅什譯, 『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藏8, 749a),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即非菩薩.”

(주13) [宋]守堅集, 『雲門匡眞禪師廣錄』 卷上(大正藏47, 545c), “若是得底人, 道火不能燒, 口終日說事, 未嘗挂著脣齒, 未曾道著一字, 終日著衣喫飯, 未曾觸著一粒米挂一縷絲. 雖然如此, 猶是門庭之說.”

(주14) [淸]性統編, 『五家宗旨纂要』 卷3(卍續藏65, 279c), “隨波逐浪句: 許他相見, 順機接引, 應物無心, 因語識人, 從苗辨地, 不須揀擇, 方便隨宜, 句中玄也.”

(주15) 앞의 책, 卷1(卍續藏65, 257a), “第二句中玄. 如張公喫酒李公醉. 前三三後三三. 六六三十六. 其言無意路. 雖是體上發, 此一句不拘於體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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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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