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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❹ 13종사와 13강사의 부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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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5 년 6 월 [통권 제146호]  /     /  작성일25-06-04 10:37  /   조회20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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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것은 한나라 때에는 가장 잘 쓴 글씨가 석비石碑에 새긴 것이었는데, 육조시대로 오면서 위나라에서는 잘 쓴 글씨를 비석에도 새겼지만 글씨의 미학과 유통의 발달로 종이나 비단에 쓰게 되면서 서첩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명필이 쓴 유명한 비석들의 글씨는 놔두더라도, 이 시대의 명필로는 위나라의 종요鍾繇(151∼230)와 장지張芝(?∼?), 오나라의 황상皇象(?∼?), 서진의 색정索靖(239∼303), 육기陸機(261∼303), 위부인衛夫人(272∼349), 왕도王導(276∼339), 동진의 왕희지王羲之(303∼361), 왕헌지王獻之(344∼388), 왕순王珣(349∼400), 사안謝安(320∼385), 양흔羊欣(370∼442), 남송의 왕승건王僧虔(426∼485), 양나라의 무제武帝(464∼549), 도홍경陶弘景(456∼536), 북위의 정도소鄭道昭(?∼516) 등이 있다. 지금까지도 이들의 글씨는 서법의 전범으로 서예가들이 공부하고 있다. 

 

사진 1. 중국 동진시대의 명필 왕희지(303〜361).

 

추사 선생의 서법론

 

이런 사정으로 인하여 나중에 ‘북비남첩北碑南帖’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비파碑派와 첩파帖派라는 말도 생겨났다. 여기에서 서법을 이해할 때 비의 글씨를 중시할 것인가 첩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추사 선생의 서법론은 이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추사 선생은 학문에 있어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태두인 운대芸臺 완원阮元(1764∼1849), 담계覃谿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스승으로 삼아 새로운 학문세계를 탐구해나갔고, 서법에서도 이들의 학문적 엄정함을 따랐기 때문에 완원의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에 의거하여 북파인 비파碑派 서법을 정통으로 보고 남파인 첩파帖派 서법을 낮추어 보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추사 선생의 글씨도 당연히 비파 서법을 중심을 놓고 탐구해간 것이다. 추사 서예의 대표인 추사 예서도 당연히 한나라의 예서 즉 고예古隸=한예漢隸를 전범으로 삼아 공부한 결과 얻은 성과이다. 그래서 추사 선생은 첩파 글씨에 바탕을 둔 윤순의 글씨나 그의 영향을 받은 이광사의 글씨에 대해서는 서법의 궤도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았다. 

 

사진 2. 완원 글씨 경저소원잡시京邸小園雜詩.

 

첩파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303∼361)의 글씨를 최고 전범으로 삼는데, 문제는 왕희지의 진적眞蹟이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특히 조선 지식인들이 왕희지 글씨라고 따라 쓴 자료들은 중국에서는 이미 모두 왕희지 글씨가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이었는데, 추사 선생은 이 점을 강조하였다. 「악의론樂毅論」은 이미 당나라 때 진적이 없어졌고, 「황정경黃庭經」은 육조시대에 어떤 사람이 쓴 것이고, 「유교경遺敎經」은 당나라 직업 서법가인 경생經生이 쓴 것이며, 「동방삭찬東方朔贊」이나 「조아비曹娥碑」도 왕희지 글씨라는 증거가 없으며, 조선에서 최고로 높이 치는 탁본집인 『순화각첩淳化閣帖』은 왕착王著이 베낀 것을 다시 번각飜刻한 것으로 오류도 많기 때문에 중국 지식인들은 서법의 기초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때문에 이런 글씨를 왕희지의 진적으로 알고 따라 쓴 글씨가 올바른 서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당나라 서법가인 구양순歐陽詢(557∼641), 저수량褚遂良(596∼658), 정무본定武本(=정무계定武系의 각본刻本)의 글씨를 공부하여 왕희지 글씨에 다가가는 것이 그나마 합당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서는 당연히 동한東漢과 후한後漢의 비석을 철저히 공부하여 그 예서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하였다. 그래야 고예古隸와 팔분예八分隸의 서법도 구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진 3. 왕희지 글씨 모본 「쾌설시청첩」.

 

오늘날에는 조맹부趙孟頫(1254∼1322)도 왕희지의 진본이라고 발문을 썼고,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재위 1735∼1796)도 학자들과 함께 감정한 후 천하에 비길 글씨가 없는 신품神品이라고까지 평한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도 당나라 때 쌍구법雙鉤法으로 만든 모본模本으로 밝혀졌다. 결국 오늘날까지 왕희지의 진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셈이다. 

 

더 나아가 추사 선생은 중국에 가서 보니 붓을 잡는 법, 필법筆法, 묵법墨法, 점과 획의 운필법運筆法 등에서도 그동안 조선에서 해온 방법과는 매우 다르다고 하며 조선 서법의 기초부터 비판을 하였다. 그러니 당시 조선에서 풍미해온 백하·원교류의 글씨가 그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진 4. 윤순 글씨(좌). 사진 5. 이광사 글씨(우).

 

서법에 대하여 조예가 깊고 명필이기도 한 정약용 선생은, 도가적 사상에 기울고 마음을 중심에 놓는 양명학적 사유에 기초하여 활달하게 운필을 하는 원교 선생의 글씨에 관하여 평을 하면서, 작은 글씨의 해서, 행서, 초서는 법도가 갖추어진 것이 있으나 큰 글씨의 반행서半行書는 전광기도顚狂攲倒하여 법도가 없고 모양도 좋지 않으며 획법劃法도 무디고 막혀서 본받을 것이 없다고 했다. 아무튼 원교 선생과 추사 선생은 서법에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 6. 이광사 반행서 글씨

 

대흥사가 배출한 고승들의 부도전

 

대웅보전의 좌우측에 백설당과 대향각大香閣이 있다. 이 건물에 대해서는 북원의 대화재 후 새로 중건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웅보전 동편으로는 하나의 건물을 두 공간으로 나누어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으로 명명한 건물이 있다. 응진당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應眞堂」의 현판은 김성근 선생이 해서로 쓴 것이다. 

 

사진 7. 김성근 글씨 응진당 현판.

 

아라한이 붓다나 보살보다는 그 경지가 아래이기 때문에 이를 봉안한 당우를 ‘전殿’이라 하지 않고 ‘당堂’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사찰에 따라서는 이를 구별하지 않고 응진전이라고 한 경우도 있으나, 응진당 또는 나한당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산신각의 현판은 추사풍의 예서로 쓴 것인데, 추사 선생의 글씨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불교와 어울리지 않는 산신각의 현판을 과연 추사 선생이 썼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응진당 앞에는 대흥사에서 가장 오래된 삼층석탑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시기에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믿기 어렵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 양식의 탑이다. 북미륵암北彌勒庵에도 동일한 양식의 삼층석탑이 조성된 것을 보면, 그 당시 남쪽 지방의 끝까지 이런 양식의 탑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8. 대흥사 부도전.

 

대흥사에서 내리막길을 걸어 나오면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비석 80여 기가 가득한 부도전浮屠殿이 있다.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인데, 54기의 부도와 27기의 탑비가 있다. 이 부도탑과 비는 우리들로 하여금 대흥사의 역사와 무게감을 진하게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는 조사인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풍담, 월저, 화악, 설암, 환성, 설봉, 상월, 호암, 함월, 연담, 만화萬化, 연해燕海, 영파影波, 운담雲潭, 벽담碧潭, 완호 등 13종사와 13강사 등의 부도탑과 비가 서 있다. 초의선사의 부도탑도 이곳에 있다. 당대 큰 획을 그은 고승들이다. 어떤 것에는 오랜 세월과 함께 이끼가 끼어 있고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풍화된 것도 있다.  팔각원당형으로 된 서산대사의 부도는 기단부와 상륜부에 독특한 장식을 하였고, 지붕돌의 낙수면이나 처마의 목조건물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어 주목된다. 

 

사진 9. 서산대사 부도탑.

 

나는 대흥사에 왔을 때마다 고승 대덕들의 부도와 비를 살펴보며 고승들이 살았던 시대를 반추해 보기도 하고, 그들은 무엇을 찾아 속세를 떠났을까? 그리고 무엇을 찾았을까? 하는 질문도 해보며 땅거미 지는 시간에도 주위를 서성거리곤 했다. 이들이 남기고 간 지혜와 삶의 족적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지는 우리들 각자의 그릇 크기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초의선사가 주석한 소박한 일지암

 

대흥사의 본찰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면 대흥사의 가풍을 대변하듯 시와 차에 모두 능한 초의선사가 40여 년 동안 머물렀던 일지암一枝庵을 만난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39세이던 1824년(순조 24)에 조성되었는데, 강진에 유배당한 다산 선생이 학문과 차를 벗 삼아 살다가 해배되어 경기도 마재[馬峴] 돌아간 지 어느덧 7년이 되는 해였다. 일지암은 본시 초의선사의 또 다른 호였다. 초암草庵을 자우산방紫芋山房이라고도 했는데, 그 당호를 추사 선생이 써주었다. 초의선사는 여기에 주석하며 선다일미禪茶一味, 선다일여禪茶一如의 선풍을 펼치며 13대 종사로 대흥사를 장식하였는데, 이 일지암에서 『동다송東茶頌』을 짓고 『다신전茶神傳』의 원고를 정서하였다. 1840년 55세 때에는 나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사진 10. 초의선사 부도탑. 

 

현재는 소실된 일지암의 터로 추정되는 곳에 초암 형태로 지은 방 한 칸과 마루를 낸 일지암과 연못 위에 누마루를 내고 기와로 잘 지은 자우홍련사紫芋紅蓮社가 있다. 초암에는 서예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 선생이 쓴 「一枝庵」의 현판이 걸려 있고, 주련은 『동다송』에서 취한 문구를 서예가 완도인頑道人 김응현金膺顯(1927∼2007) 선생이 썼다. 「紫芋紅蓮社」의 현판도 김응현 선생이 예서로 쓴 것이다. 

 

자동차가 다니는 넓은 진입로와 근래 신축한 대웅전, 요사채, 설림당蔎林堂의 건물은 어색하게 들어서 있다. 원형을 고증할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잘 지은 부잣집 한옥채와 다실 같은 느낌이 든다. 나뭇가지 하나[一枝]에 집을 짓는 뱁새(추료鵻鷯)처럼 조그만 집에서 소요유逍遙遊를 즐기며 무애無碍의 삶을 추구했던 초의선사가 스스로 호號도 일지암으로 정하고 살았다. 그런데 이토록 경치가 빼어난 곳에 재벌가도 가지기 힘든 근사한 누마루가 나온 기와집과 차옥茶屋에서 생활했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그 옛날 초의선사의 글이나 추사 선생과 주고받은 글을 보아도 초의선사가 이런 집에 살며 호사를 즐긴 것 같지는 않다. 초의선사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 저어된다. 앞으로 조망이 확 트인 산중에 작은 차밭과 대숲 사이로 난 소로小路와 작은 연못, 채전菜田, 차 절구 등이 있는 보다 겸손하고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초암草庵 한 채로만 구현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지난날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중건하고 이를 <중성일지암重成一枝庵>의 시로 읆었다. 당시 풍경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하다. 초의선사가 거처하는 방을 추사 선생은 「죽로지실竹露之室」이라고 이름을 짓고 현판 글씨도 써주었다.

 

구름과 산안개 옛 인연을 잊지 못하여

물병과 발우 들고 문득 몇 칸 집을 지었네

연못을 파서 밝은 달을 담고

대나무통을 이어 흰구름 샘물 끌어왔네

영약을 찾아 향보에 새로 보태고

때로 「법화경」 펼치고 깨달음을 접하네

눈 가리는 꽃가지 싹둑 잘라버리니

멋진 산이 해 떨어지는 하늘에 우뚝 서 있구나

 

연하난몰구인연 烟霞難沒舊因緣

병발거연옥수연 甁鉢居然屋數椽

착소명함공계월 鑿沼明涵空界月

연간요취백운천 連竿遙取白雲泉

신첨향보수령약 新添香譜搜靈藥

시접원기전묘련 時接圓機展妙蓮

애안화지잔각료 礙眼花枝剗却了

호산잉재석양천 好山仍在夕陽天

 

초의선사와 추사 선생의 인연

 

초의선사와 한양 명문대가의 추사 선생은 동갑내기로 1815년 가을날에 경기도 수락산 학림사鶴林寺에서 해붕海鵬(1717∼1790)대사를 뵙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해붕대사를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당시 초의선사는 서울로 올라와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 정학유丁學游(1786∼1855) 형제, 추사와 김명희金命喜(1788∼1857), 김상희金相喜(1794∼1861) 형제,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 선생 등을 만나며 지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연을 이어가게 되는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평생 유불학儒佛學의 지식과 시와 선의 세계 그리고 차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함께한 도반道伴과도 같은 사이였다.

 

추사 선생이 관로에서 명성을 떨치던 시간에도 함께하고 고난의 긴긴 유배 기간에도 정신적 교유를 함께한 사이였다. 백파긍선白坡亘璇(1767∼1852) 대사의 『선문수경禪門手鏡』을 놓고 초의선사 등 불교계에서 논쟁이 있었을 때는 추사 선생은 물론이고 신헌 등과 같은 유학자들도 이 논쟁에 참여하여 백파대사에 대하여 비판적인 초의선사와 견해를 함께하였다.

 

백파대사는 중종中宗(재위 1506∼1544)의 여덟째 왕자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1530∼1559)의 후손이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 선조이다. 유학자의 길을 가는 추사 선생이 불교와 차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불교에 대한 집안의 분위기와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1766∼1837)을 따라 24살 때 북경에 갔을 때 만난 스승 옹방강과 완원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그는 소동파蘇東坡(1037∼1101) 현창운동뿐만 아니라 불교도 깊이 탐구하고 차에 관해서도 많은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사진 11. 일지암과 자우홍련사.

 

김노경 선생이 1833년 강진 고금도古今島에서 3년간의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 아들과 각별히 지내는 초의선사를 만나보고자 이 일지암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초의선사가 내놓은 차를 음미하며 일지암의 물맛이 소락酥酪보다 낫다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차에는 물이 생명인지라 일지암의 물이 찻물[茶水]로 뛰어났던 것 같다.

 

3년 전 초의선사는 서울로 올라와 추사 선생의 집에 머물며 입적한 스승 완호화상의 탑명塔銘을 받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김노경 선생이 고금도로 유배되는 사태가 생기는 바람에 대신 정조의 사위인 해거재海居齋 홍현주洪顯周(1793∼1865) 선생의 별서 청량산방淸凉山房에 머물며 홍현주 선생과 처음 인연을 맺고 다산 선생과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1785∼1840) 선생을 방문하는 등 여러 문사들을 만나 시와 지식을 놓고 교류하는 기회를 가졌다. 홍현주 선생으로부터 완호화상의 탑명(비문)도 받았다. 김유근은 순조純祖(재위 1800∼1834)의 장인으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경화거족京華巨族의 종장宗匠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아들이다. 김유근 선생은 집안끼리는 적대적이었지만 추사 선생과는 절친이었다. 이렇게 서울에서 광폭행보를 하며 교유관계를 넓힌 초의선사는 1831년 가을에 대흥사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10년 후 55세의 추사 선생이 동지부사에 임명을 받고 이제 북경으로 가 그리운 북경의 문우文友들과 상봉하게 될 부푼 마음으로 있는데, 졸지에 장동김문의 대사헌 김홍근金弘根(1788∼1842)이 고인이 된 김노경을 탄핵하여 그의 관직을 모두 삭탈하고 추사 선생도 추국推鞫한 끝에 제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배를 보냈다. 제주도는 고려 말에 고려를 장악한 몽골이 제주도를 직속령으로 만들고 고려 왕실에 저항하거나 위협이 되는 170여 명의 신하들을 귀양 보내면서 유배지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는 2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유배되는 곳이 된다.

 

추사 선생은 귀양길에 일지암에 들러 초의선사와 산차山茶 한 잔을 앞에 놓고 만났다. 추사 선생은 태장을 맞은 참혹한 모습이었지만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달마대사의 「혈맥론血脈論」과 「관심론觀心論」에 관해서도 생각을 주고받으며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초의선사는 제주도로 가는 추사 선생이 부디 험한 길에 안전하게 목숨이라도 유지하기를 빌면서 「제주화북진도濟州華北津圖」를 손수 그려 정표로 주었다. 그로부터 또 9년의 세월이 흐른 후 추사 선생은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가는 길에 이 일지암에 들러 초의선사와 상봉을 하게 되는데, 이는 한참 뒤의 일이다.

 

추사 선생은 오늘날 서귀포시인 대정현大靜縣의 배소지에 온 후 2년째 되는 해 그간 자주 서신으로 안부를 물어오던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도 겪었다. 고독한 유배 생활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난 벗은 초의선사였다. 추사로부터 여러 차례 서신을 받은 초의선사는 1843년 봄에 드디어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 제주도에 왔다. 이때는 10여 년 전부터 친교를 가져온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祖(1792∼1871) 선생이 마침 제주목사로 있어(재임 1841∼1843) 그의 배려로 제주목 관아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말을 타다가 부상을 입어 몸져눕게 되었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안 추사 선생의 독촉으로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렸던 상봉相逢을 하지 못하고 그해 가을에 대흥사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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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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