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천사와 사리각의 운명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흥천사와 사리각의 운명


페이지 정보

이종수  /  2025 년 6 월 [통권 제146호]  /     /  작성일25-06-04 11:03  /   조회194회  /   댓글0건

본문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후 1394년(태조 3) 10월 28일 수도를 개경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겼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한씨이고, 두 번째 부인은 신덕왕후 강씨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황해도 권문세족의 딸로 태어나 20살가량 나이가 많은 이성계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으며, 그 슬하에 방번, 방석, 경순공주 등 2남 1녀가 있었다.

 

170칸에 달하는 조계종의 본사 흥천사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신덕왕후 강씨가 조선의 첫 번째 왕비로서 현비顯妃에 책봉되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둘째 아들 방석이 왕위를 물려받도록 하기 위해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던 정도전과 정치적 연합을 하였지만 방석의 왕위 계승을 실현하지 못하고 1396년 8월에 사망하였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죽음을 슬퍼하여 궁궐에서 가까운 도성 안 황화방皇華坊(현재의 서울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부근)에 정릉貞陵을 조성하고 그 옆에 흥천사를 지어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삼도록 했다. 태조는 흥천사 공사를 완료하고 권근을 불러 조성기를 짓도록 하였는데, 그 「정릉 원당 조계종 본사 흥천사 조성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 1. 조선의 첫 번째 왕비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 사진: 서재영.

 

1396년(태조 5) 8월 13일에 왕비인 현비 강씨께서 훙서하시었다. 임금께서 애도하는 마음으로 담당관에게 명하여 추존하는 시호를 올리되 ‘신덕왕태후’라 하고 왕궁 서남쪽 몇 리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장지를 정하였다. 장지는 산세가 감아 돌아 풍수가 길하게 호응되는 곳이었다. 그 이듬해 정월 7일 정릉에 장사지내고, 또 묘역 동쪽에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를 창건하였다. 흥천사 공사가 1년이 못 되어 끝나니, 불전·승방·대문·행랑·부엌·욕실 등 무릇 1백 70여 칸이었는데, 서까래와 기둥에 금빛 채색이 찬란하였다.

 

위의 「조성기」를 통해 신덕왕후 강씨 사망 후 곧바로 흥천사 공사가 시작되어 일주년이 되는 1397년 8월에 완성되었으며, 그 규모가 170여 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흥천사가 당시 선종을 대표하는 조계종의 본사本寺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는 상총尙聰을 흥천사 감주監主로 임명하고 신덕왕후의 대상재大祥齋를 비롯하여 국가의 각종 의식을 흥천사에서 베풀었다. 그리고 1년 전(1396)에 개성 송림사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두골사리와 패엽경을 봉안하기 위해 사리전舍利殿을 흥천사에 짓도록 명하였다. 부처님 두골사리와 패엽경은 1377년(우왕 3)과 1379년(우왕 5)에 왜적이 통도사까지 와서 사리를 약탈해 가려 하자, 통도사 주지 월송月松이 사리를 가지고 개경으로 가서 문하평리 이득분李得芬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이득분이 임금에게 아뢰자, 태후 근비謹妃가 송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사진 2. 흥천사 전경. 정동에 있던 정릉이 1409년(태종 9)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능침사찰로 창건된 신흥사新興寺가 현재 흥천사의 모태다. 사진: 서재영. 

 

태조는 사리전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여러 차례 거둥하여 시찰하였고, 마침내 1399년(정종 1) 음력 10월 19일 사리전이 완성되자 태상왕이 된 태조는 낙성을 고하고 수륙재를 베풀어 신덕왕후의 죽은 아들과 고려의 역대 임금들을 위해 제사지냈다. 사리전의 구조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3층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8면 5층 규모의 목조 전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리전 내부에 있는 3층 석탑에는 석가모니의 치사리·두골사리·패엽경·가사 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1401년(태종 1)에는 해인사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인출하여 사리전에 봉안하였다. 아마도 3층 석탑을 둘러싼 사리전 내부 벽면을 대장경으로 장엄하였던 것 같다.

 

이후 흥천사 경내에 환조桓祖로 추증된 태조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진영을 모신 계성전啓聖殿을 조성하고 직접 거둥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승하한 후 정릉이 도성 밖으로 이장移葬됨에 따라 흥천사도 큰 변화를 겪었다. 태종 이방원은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자식들을 제쳐두고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위에 앉히려 했던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래서 부왕 이성계가 승하하자 곧바로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 기슭(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 매장하라고 명하였다.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외국 사신이 묵는 관사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태종실록』 9년(1409) 2월 23일)라는 의정부의 주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이는 태종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태종은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다. 정릉에서 나온 목재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 건물 수리에 사용하도록 했고, 병풍석과 난간석 그리고 정자각의 석물들은 1410년 홍수로 무너진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를 보수할 때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그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그 후 선조 대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두 차례나 후궁으로 강등된 강씨를 다시 왕후로 회복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가 1669년(현종 10) 우암 송시열(1607~1689) 및 삼사三司와 유생의 건의에 따라 순원현경順元顯敬이라는 존호가 정해지고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여 제사지내게 됨으로써 왕후능으로 회복되었다. 

 

세종 대의 흥천사 중수 불사

 

세종 대 이후 흥천사 사리전의 중수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이 갈등을 빚었다. 1429년(세종 11)에 사리전 건물이 기울고 파손되자 세종이 수리를 명하였다. 그런데 1435년(세종 17)에 또다시 건물이 기울어지자 또다시 사리전 수리가 논의되면서 왕실과 유신의 갈등이 표면화하였다. 세종이 사리전을 수리하는 일을 효령대군에게 담당하도록 하고 교서敎書나 권문勸文을 지어 임금의 도장을 찍어 하사하겠다고 했다. 이에 유신들은 효령대군에게 맡기면 될 일이지 굳이 임금의 도장을 찍은 교서나 권문이 필요하지 않다며 반대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권채에게 명하여 권문을 짓도록 하였다. 세종이 유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권문에 임금의 도장을 찍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권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상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근일에 흥천사 승려가 와서 말하기를, ‘썩고 기울어진 것이 전보다 더욱 심하니 만일 층각層閣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석탑도 따라서 무너질 것이 뻔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그 말을 듣고 슬프게 여겼었다. … 지금 석탑 위의 층각을 없애고 그 앞에 새 전각을 지어 층각을 대신하면 선대 임금의 남긴 뜻을 배반하지 않게 되고 자주 수리하는 폐단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역의 번거로움을 백성에게 미치게 할 수는 없으니 만일 뜻있는 승려들에 의해 공사가 이루어진다면 어렵지 않게 완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 『세종실록』 17년(1435) 5월 20일.

 

사진 3. 흥천사명 동종. 사진: 국가유산청.

 

세종은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통해 승려 신분증이라고 할 수 있는 도첩을 주는 조건으로 승려들을 불러 모아 관가에서 식량을 주고 공사를 하도록 하였다. 이에 사방에서 수천 명의 승려들이 모여들어 공사에 참여하자 유신들은 도첩이 남발된다며 흥천사 중수를 반대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다. 하지만 세종은 가뭄이 들어 다른 공사는 중지시켜도 흥천사 공사만큼은 지속시켰으며, 마침내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낙성을 고하는 사리각경찬회舍利閣慶讚會를 개설하였다.(『세종실록』 24년(1442) 3월 24일)

 

흥천사 중수가 끝난 이후 왕실에서 주관하는 기우제 및 구병의례와 보공재報供齋 등이 설행되었으며, 1458년(세조 4)에는 해인사에서 인출한 대장경 3질이 흥천사에 봉안되기도 하였다. 또 1461년(세조 7)에는 사리가 스스로 쪼개져 늘어나는 사리분신舍利分身을 기념하여 세조와 세조비인 자성왕비慈聖王妃가 함께 동종을 주조하였다.(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외국 사신들이 흥천사를 방문하여 공양하였고, 명나라 황제가 보내온 불번佛幡 등을 봉안하였다. 

 

성종 대에도 두 차례에 걸쳐 흥천사 중수가 있었다. 1480년(성종 11)에는 교종의 도회소인 흥덕사興德寺 중수에 이어 선종의 도회소인 흥천사 중수가 진행되었고, 1491년(성종 22)에는 죽석竹席을 설치하고 문을 중수하였다. 이때에도 유신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성종은 선대 임금이 창건하고 수리한 곳이며 외국 사신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므로 폐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유신들의 흥천사 폐지 요구는 연산군 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흥천사 폐지 요구와 화재로 인한 폐사

 

그런데 1504년(연산군 10) 12월 흥천사에 화재가 일어나 사리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고 말았다. 1년 전에는 흥덕사가 화재로 소실된 데 이어 흥천사마저 소실되면서 도성 내에 있던 선·교 양종의 도회소가 모두 폐사되고 만 것이다. 연산군은 흥천사를 재건하지 않고 마구간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중종 5년(1510) 3월 28일에는 사리전마저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전교하기를, “대비전에서, 흥천사(정릉사)에는 조종조부터 책가위에 싼 불경과 보물이 많이 있었는데, 유생과 절 곁에 사는 사람들이 드나들며 훔쳐가므로, 엊그제 내관內官을 보내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유생들이 모여들어 내관을 욕하고 데리고 간 사람을 때리고 결박하고, 크게 성을 내어 말하기를, ‘이 절을 후에 보겠느냐?’고 하였다. 대비전에서 이 때문에 마음이 상하셨으나, 특별히 광동狂童이라 하여 버려두고 문책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절에 불이 났으니, 이 무리가 한 짓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비록 절집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공적인 관청이라 할 수 있는데, 불을 질러 도성을 환하게 비췄으니, 어찌 크게 놀랄 일이 아니랴? … 절 근처에 사는 유생과 가까운 이웃 사람들을 의금부에서 조사하여 불을 일으킨 원인을 추문하게 하라.” 하였다.                           - 『중종실록』 5년(1510) 3월 29일.

 

중종은 유생들이 흥천사에 불을 질렀을 것이라고 강하게 의심하였다. 그래서 한성부에 있던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붙잡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각 부서의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유생에 대한 조사의 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사진 4. 일제강점기 시절 흥천사 전경(성베내딕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서울 사진).

 

사간원의 관리가 모두 아뢰기를, “근래 문치를 높이고 교화를 흥기하여 이단의 도道를 심하게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사리전에 화재를 일으킨 일 때문에 정승을 보내어 큰 옥사를 일으키고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잡아들임이 지나쳐 죄 없는 이들에게까지 미쳐서 성안이 소요하니,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또 국가의 큰일이 아니면 정승을 보내어 추국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가령 이보다 더 큰일이 있다면 무엇으로 더하시렵니까? … 신 등은 지금의 직책에 있을 수 없으니, 다른 임무로 옮겨주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지금의 직책을 회피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우선 중부학당의 유생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 『중종실록』 5년(1510) 4월 2일.

 

유신들의 반발로 결국 사리전의 화재 원인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제 흥천사는 빈터만 남게 되었다. 대신들은 화재로 소실된 흥천사 빈터를 사대부의 집터로 사용할 것을 요청하였다.

 

대간들이 아뢰기를, “근래에 도성 안의 인구가 날로 번성하여 도성 안의 사대부들이 집 지을 땅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산등성이 땅을 받아 집을 짓다 보니 간혹 국법을 범합니다.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도성 안의 흥덕사·흥천사·원각사 등 세 곳이 폐사되어 빈터가 되었으니, 집이 없는 사대부들에게 나누어주어 살도록 하소서. …” 하였다.                                            - 『중종실록』 7년(1512) 6월 15일.

 

중종은 대간의 요청을 받아들여 빈터만 남은 흥천사 땅을 집이 없는 사대부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로써 황화방의 흥천사는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편, 1409년(태종 9) 사을한 기슭에 이장된 신덕왕후의 능 근처 함취정含翠亭 터에 분향을 담당할 능침사찰을 짓고 신흥사新興寺라고 하였다. 이때는 신덕왕후 강씨가 후궁으로 강등된 후 조성되었으므로 초라한 후궁의 무덤으로서 원園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다시 왕후능으로 복원된 것은 1669년(현종 10) 송시열 등의 건의에 따라 새로 조성된 이후이다. 사을한의 능을 왕후능의 규모에 맞게 새로 넓혀 조성하는 과정에서 신흥사를 석문石門 밖으로 옮겨지었는데, 지금의 흥천사가 그곳이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종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 교수와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월봉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가 있다.
su5589@hanmail.net
이종수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