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불교윤리 ]
선명상의 시대, 선禪의 윤리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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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결 / 2025 년 9 월 [통권 제149호] / / 작성일25-09-04 15:07 / 조회38회 / 댓글0건본문
대한불교조계종이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선명상의 열기가 뜨겁다. 여러모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출가자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던 선수행법의 대중화와 함께 여전히 출세간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 전통불교가 동시대의 흐름과 소통하려는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개인의 사적인 고민까지 친절하게 상담해 주는 인공지능(AI)이 출시되어 인간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당에 중생들의 팍팍한 삶을 지혜와 자비의 손길로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던 불교 고유의 역할과 기능이 날이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선불교에는 ‘윤리’가 없었나
유명한 선사들의 어록에는 일반인들의 눈으로 봤을 때 더러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언급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일본의 유명한 도겐[道元] 선사는 제자들에게 “계율을 최우선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 바탕 위에서 수행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며, 이를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으로 삼아서도 안 될 것이다.”(주1)라고 가르쳤다. 이는 선수행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을 얻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럴 때 계율은 저절로 지켜지고 공덕 또한 자연스럽게 쌓일 것이란 점을 강조한 말이다. 이런 종류의 말들은 선불교가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선악의 판단기준을 제시하는 데 무관심하거나 윤리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종종 선불교를 “그 자체의 윤리를 갖고 있지 않은 하나의 전통”이라고 여기는가 하면, 심지어 그것은 본질적으로 “도덕폐기론적(antinomian)”(주2)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선불교를 포함한 불교일반을 가리켜 “규범 없는 윤리(Ethics without Norms)”(주3)라고 성격 규정짓는 것과 관련된 논쟁의 역사도 결코 짧지 않다. 실제로 윤리 없는 종교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종교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이기도 하다.
선불교의 역사에서 가끔 일반인들의 상식과 어긋나는 독특한 방식으로 계율의 묵수보다는 선수행의 의미를 역설한 사례들이 더러 발견되기도 하지만, 선불교의 전통 안에서도 불교윤리의 공통적인 관심사인 계율과 자비 및 보살의 이상을 외면하지 않았다고(주4) 보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에 더 가깝다.
선불교에도 ‘윤리’가 필요하다
마음의 깨침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선불교에서 윤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분별심을 조장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윤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혹은 ‘좋고 나쁜지’를 가려내는 일련의 사고체계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윤리는 법과 정치, 인간관계 및 역할-정체성의 지적 토대인데, 이 모든 것은 실상(reality)을 가리고 나아가 자기인식(self knowledge)과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자비심[의 발현]을 가로막는 인공 구조물(artificial constructs)”(주5)에 불과했던 것이다. 선불교의 입장에서 윤리적 접근법이 처음부터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상적 배경이다. 그러나 20세기 일본의 세계적 선불교학자였던 스츠키(Daisetz T. Suzuki)조차 선불교를 비롯한 대승불교에서 윤리가 결여되어 있음을 꼬집은 바 있다.
붓다는 분명히 계戒·정定·혜慧의 균형잡힌 실천을 가르쳤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게 되었고…[셋 가운데] 한 가지 요점을 강조하다 보니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게 되었다. 특정한 의미의 대승주의는 사변적으로 너무 멀리 나간 나머지 그것의 윤리적 코드인 율장을 거의 망각하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반면, 소승주의의 지지자들은 스스로 너무 보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불러왔을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자발적으로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 오늘날 신실한 불교도들에게 당면한 문제는 소승주의의 도덕적 규율과 대승주의의 사변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완벽하게 조화시킬 것인가이다.(주6)

여기서 스츠키는 대승과 테라바다의 전통이 서로의 윤리적인 관점을 통합할 필요가 있음을 거듭 일깨워주고 있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스츠키는 선불교 고유의 가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세상과의 대화 창구인 윤리의 프리즘이 없는 선불교는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확장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그는 윤리, 즉 계율의 시대착오적인 경직성도 날카롭게 질타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변화하는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각종 방편들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개인과 사회의 조건들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에서 선불교 역시 시대가 요청하는 변화의 모습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화이트힐(James Whitehill)이 제안한 ‘선의 윤리(Zen ethics)’란 개념은 숙고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선의 ‘윤리’가 왜 필요한가
그는 현대적 의미의 철학적 선의 윤리가 필요한 이유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선의 철학적 어젠다에서 윤리가 너무 오랫동안 배제되어 왔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여태껏 선의 철학적 자화상은 어딘가 불완전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적절하게 가다듬어진 윤리가 추가되지 않으면 선의 철학적 해석은 포괄성뿐만 아니라 실천적 유용성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선의 윤리는 선수행과 해탈 및 통찰력의 도덕적 결과에 대한 다원주의적 검토 과정의 하나인 만큼 다양한 환경 속에서 활동하는 선수행 집단과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보편적 검증 절차이기도 하다. 그들에겐 서로의 수행에 대한 윤리적 투명성과 토론 및 의견의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

셋째, 현대사회의 변화된 상황에 호응하는 선의 윤리를 개발하는 것은 선수행 공동체 외부의 문제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개인의 도덕적 관심사들인 성, 평등, 교제, 직업 등에 대한 선불교적 통찰은 개인과 공동체 안에서 폭넓고 감수성 있는 양심의 개발을 촉진할 수도 있다고 본다. 미래사회는 새로운 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이전의 선불교적 침묵을 더 이상 간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윤리가 선불교에서 말해왔던 것처럼, 하나의 감옥이고 함정이며 환상이자 방해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우리는 윤리가 수행의 결과에 대한 검증의 과정이자 수행자의 겸손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방편(upaya)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주7)
이런 문제의식의 적극적 반영인 ‘선의 윤리’는 대략 두 가지 요구조건을 충족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윤리적 정당화의 문제에 대답하는 과정에서는 그동안 즐겨 사용해 왔던 우화나 선문답, 화두, 고함, 몽둥이, 침묵 등의 방법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반대중의 학력과 생활수준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윤리적 소통을 할 경우에는 우화나 법담 및 독특한 선불교적 표현을 굳이 배제할 필요가 없을 것이란 점이다. 오히려 선의 윤리에서 요구되는 검증 가능하고 공유 가능한 원칙과 전략은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방법으로부터도 유용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선의 윤리적 진리에 초점을 맞춘 개념적 형식이나 그것이 구체화되는 삶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공성(sunyata)’에 바탕을 두어야 함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선의 윤리는 사상과 실천의 양 측면에서 선 공동체 자체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결국 “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선의 윤리를 통해서만” 선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제임스 화이트힐이 선의 윤리를 강조하고자 했던 이유가 아닌가 싶다.(주8)
거의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카슐리스(T.P.Kasulis)는 선의 윤리를 전통적인 의미의 ‘책임의 윤리(an ethics of responsibility)’가 아니라 ‘반응의 윤리(an ethics of responsiveness)’(주9)로 해석할 것을 제안하면서 선의 현대적 수용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전자를 가리켜 ‘공정하기를 추구하는(to be fair)’ 원칙의 윤리인 ‘성실성의 도덕(integrity moral)’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가리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to be there for)’ 사랑이나 자비의 윤리인 ‘친밀성의 도덕(intimacy moral)’이라고 부른다.(주10) 이러한 인식은 선의 윤리를 서구의 윤리 전통에서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개념적 틀을 사용해 그것의 현대사회적 의미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모색해 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선명상의 상업화를 경계해야 한다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선명상 보급 운동은 내부적으로 전통 수행법인 간화선의 근본을 잃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은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하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다만 세상이 변한 만큼 종교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명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간화선의 명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방식의 선수행법을 과감하게 접목하려는 ‘선명상’의 시도를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닐 것 같다. 요즘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불멍, 물멍, 산멍, 파도멍 등 각종 ‘멍’ 때리기 놀이문화를 보면 더욱더 그런 인식을 갖게 된다. 그것들의 이면에 숨어 있는 시대적 코드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한국 선불교의 당면한 과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현대인의 캐주얼(casual)한 소비문화는 수행종단을 추구하는 한국의 선불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미리 정립해 놓는 것도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이 와중에 일부에서 지적되고 있는 선명상의 상업화 경향에 대한 우려에도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선명상이 “단기적 효과에만 머물 것인지, 아니면 존재 구조의 근본적 전환을 이끄는 [말 그대로] 수행이 될 것인지는 수행의 맥락, 강도, 지속성, 그리고 그 철학적 지향에 따라”(주11)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도 우리는 선명상 본래의 윤리적, 해탈적 지향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잠시도 게을리할 수 없다.
<각주>
(주1) Christopher Ives, “Ethics in Zen”, eds., by Daniel Cozort, James Mark Shields, The Oxford Handbook of Buddhist Ethics(Oxford:Oxford University Press, 2018), p.221.
(주2) James Whitehill, “Is There a Zen Ethic?”, The Eastern Buddhist(vol.20, no.1, 1987), p.9.
(주3) Dan Arnold, “Ethics without Norms?”, in eds., by Daniel Cozort, James Mark Shields(2018), pp.359∼381. 논문에서 저자는 선불교와 윤리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관점을 제시한다.
(주4) Christopher Ives(2018), pp.221∼222.
(주5) James Whitehill(1987), p.16.
(주6) Daisetz T. Suzuki, The Awakening of Zen, ed. Christmas Humphreys(Boulder, Colorado:Prajna press, 1980), pp.2∼4. James Whitehill(1987), pp.16∼17에서 재인용.
(주7) James Whitehill(1987), pp.18-20.
(주8) James Whitehill(1987), pp.31-33.
(주9) T.P.Kasulis, “Zen as a Social Ethics of Responsiveness”, Journal of Buddhist Ethics(vol.13, 2006), pp.1∼12.
(주10) T.P.Kasulis(2006), p.11.
(주11) 박정아, “초기불교 명상의 현대적 변용과 가치”, 『불교학연구(제83호)』(2025년 6월),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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