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고타마, 사유의 반전으로 성공의 길에 접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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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12:58 / 조회1,711회 / 댓글0건본문
전통적 선정수행에서 만족스러운 해법/깨달음을 확보하지 못한 고타마 싯다르타. 그는 당시의 수행 전통에서 채택되던 또 하나의 수행법인 고행에 몰입한다. 고행은,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관 욕구를 자발적이고 격렬한 방식으로 거세시키려는 수행이다. ‘감관적 쾌락과 그에 대한 욕망’ 자체를 아예 지우려 한다. 모든 즐거움은, 거부하고 부정해야 할 감관적 쾌락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극한의 고행에도 불구하고 고타마 싯다르타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고행의 한계와 문제점을 체험적으로 확인한 그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한다. 사유의 반전을 시도한다. 어릴 적 나무 밑에 앉아서 경험했던 즐거움을 떠올린 것이 반전의 계기였다.
니까야는 어릴 적 경험했던 즐거움이 초선初禪의 즐거움이었다고 하면서 초선의 정형구로 기술하고 있다. 붓다의 사선四禪 설법을 고타마 싯다르타의 수행과정에 소급 적용한 윤색으로 보인다. 어릴 적 즐거움에 대한 붓다의 회고를, 고타마 싯다르타가 아닌 붓다를 기준으로 삼아 각본화시키고 싶은 후인들의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후인들에 의한 윤색이나 각색 이전의 붓다 육성은 아마 이런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어릴 적 나무 밑에서 경험했던 즐거움은 감관 쾌락을 추구한 결과도 아니고 해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즐거움이라면 거부하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행의 길을 걸을 때, 모든 즐거움은 ‘무조건’ 거부해야 할 감관적 쾌락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릴 적 나무 밑에서 경험했던 즐거움은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얻어진 즐거움이라 할 수 없었다. 어린애가 무슨 감관적 쾌락을 추구했겠는가. 또 심신의 평안과 수준을 훼손하는 해로운 즐거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런 즐거움마저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거나 거부해야 할까?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는 위대한 반전의 순간이다.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고타마 싯다르타가 붓다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분기점이라 생각한다. 실패의 길에서 성공의 길로 접어드는 반전이었다. 이 사고의 반전이 깨달음을 예비한다. 연이어 성취하는 사선四禪, 삼명三明은 이 생각의 반전이 실마리가 되어 발생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이 생각의 반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건적 발생에 대한 개안, 이지적 연기 깨달음
선정의 두 대가가 인정하는 성취로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던 고타마 싯다르타. 그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한다. 고행이다. 감관을 토대로 무한히 증폭하는 쾌락의 불안과 오염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관욕구를 가학적으로 거부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그렇게 하면 깨닫는다고 하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과거·현재·미래의 그 누구라도 나만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할 정도의 극한 고행이었다. 겨우 목숨만 근근이 유지될 정도의 고행이었다. 죽음 문턱에까지 밀어붙인 고행이었지만, 소득은 없고 몸만 망가졌다.
진퇴양난의 고비에 봉착했다. 가던 길은 끊어졌고, 새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새 길을 찾아야 한다. 못 찾으면 인생 실패다. 환속해서 세간 관행에 묻혀 살며 허무에 시달리거나, 제 길 못 찾아 방황하는 유랑자가 되어야 한다. 가히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기로岐路이다. 모든 것 걸고 감행한 여정인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나,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의 불안과 고뇌가 전해진다.
구도의 길에 올라 남들 하는 대로 다 해보았다. 남들 하라는 대로 격렬하게 끝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실패했다. 하라는 대로, 체득해 보라는 대로, 해보지 못해서가 아니다. 길 따라 끝까지 갔는데 도달한 곳이 엉뚱했다. 길에 문제가 있었다. 목적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다. 기대와는 다른 곳으로 안내한 길 끝에 앉아 황망한 고타마 싯다르타. 온갖 사념이 덮쳐왔을 것이다. 좌절에 따른 회한悔恨과 불안이 엄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웅의 면모는 항상 낭떠러지 앞에 설 때 빛을 발하는 법. 그럴 때 영웅은, 후회와 체념, 절망과 포기의 념念이 아니라, 해법을 찾으려는 용기와 의욕에 몸을 맡긴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모든 영웅의 공통점이다.
새 길을 찾으려는 형형한 눈빛으로 그때까지의 경험을 복기復棋했을 것이다. 무엇을 추구했던가, 어떤 방법을 선택했는가, 그 방법으로 무엇을 성취했는가, 성취한 것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무엇이 문제이고 원인은 무엇인가를, 거듭 숙고하고 성찰했을 것이다. 그 성찰적 복기는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자연현상 앞에서 유달리 커다란 정신적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궁금했고, 그런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기 위해 가정과 사회적 역할까지 포기하고 탐구했다. 이미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해법을 추구해 온 사람들을 만나 배우고 그들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수용해 보았다.
그들이 하나같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감관적 쾌락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었다. 몸/감관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욕망이 유별나다는 것, 인간은 그 유별난 감관욕망에 노예적으로 끌려다니고 있다는 것, 따라서 감관욕망에 대한 노예적 반응을 극복해야 인간 특유의 혼란과 고통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극복 방법으로 채택되어 온 것이 선정 수행과 고행이었다.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집중해 가는 노력을 통해, 감관욕망으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아 마침내 감관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이 선정 수행이었다. 또 감관욕망의 토대인 감관 기능 자체에 따르기를 거부하며 감관의 본능적 요구를 최대한 거세시켜 가다 보면, 감관욕망에서 풀려나고 진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이 고행이었다. 나는 이러한 방법론을 수용하여 철저히 실험해 보았다. 그들의 노력과 성취의 정점까지 가보았다. 그러나 목표 달성에는 실패였다. 무엇을 놓쳤던 것일까?”
그때 섬광처럼 올라오는 기억이 있었다. 어릴 적 부친을 따라 그해 농사를 여는 농경제에 참석했다가 홀로 나무 밑에 앉아 마치 선정과도 같은 마음상태를 경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한 그 경험은 분명 감관이 작동하는 살아있는 몸에서 발생한 어떤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 보거나 먹고 싶은 것 먹었을 때 경험하는 ‘감관욕구 충족의 즐거움’은 아니었다. 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들뜨게 하거나 불안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고, 타인의 손해나 희생을 요구하는 즐거움도 아니었다. 감관적 쾌락을 추구해서 생겨난 즐거움도 아니었고,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로움을 끼치는 즐거움도 아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기존의 사고방식을 전복시키는 반전이 일어났다. 그때까지는 ‘모든 즐거움’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감관적 욕망에 대한 노예적 반응에서 풀려나려면 당연히 감관과 연관된 ‘모든 즐거움’을 부정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모든 즐거움’을 거부한다고 해서 감관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발상의 전제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감관에 기초한 ‘모든 즐거움’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과, 감관적 욕망에 대한 노예적 종속에서 풀려나는 것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모든 즐거움’을 장애와 오염으로 간주하여 ‘무조건’ 거부하려는 발상 자체가 잘못일 수 있다.
악기베싸나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없는 즐거움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악기베싸나여, 나는 이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가 없는 즐거움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고타마 싯다르타가 붓다로 바뀔 수 있었던 결정적 실마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런가? 이 발상의 전환이 어떻게 깨달음과 연관되는가? 이것은 모든 현상을 ‘조건적 발생’으로 보는 사유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연기緣起 깨달음의 초기 형태, 이지적理智的 연기 깨달음이 이렇게 밝아졌다.
지복至福의 문이 열리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즐거움’이라는 경험현상을 ‘조건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해로움과 연관되는 즐거움’과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해로움과 무관한 즐거움’을 구분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즐거움’이라 지칭하는 현상을 ‘조건에 따라’ 달리 판단·평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즐거움’이라는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발생시킨 조건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실로 위대한 사고의 전환을 의미한다.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 발생시키는 ‘조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현상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것, 같은 용어로 지칭되어도 ‘그 현상을 발생시킨 조건에 따라’ 내용이 다르다는 것, 따라서 어떤 현상을 이해하거나 문제 삼을 때는 “지칭하는 용어보다도 발생 조건을 주목해야 한다.”라는 것에 눈뜨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복至福의 길을 보여주는 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세간 일상의 고품질 행복을 성취하는 것에서부터 진리 지평의 궁극적 행복까지 모두 이 길에 닿아있다. 개인 치유와 사회 치유의 다층 다양한 성취가 이 길에서 이루어진다. ‘언어 인간’이 된 이후 아직까지도 맹위를 떨치는 ‘언어 환각’에서 깨어날 수 있는 명약도 이 길에서 얻을 수 있다. 집단과 국가, 문명의 요구에 따르다가 병들어 버린 실존의 깊은 병을 근치할 수 있는 영약靈藥도 이 길에서 제조할 수 있다.
이후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성취해 가는 과정은, 초기 형태의 이 이지적 연기緣起 개안을 더욱 완전하게 하고 체득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붓다로서 펼친 모든 법설은, 완전해진 연기 깨달음의 다채로운 변주였다. 인류가 누려야 할 모든 지복이, 이 사고의 전환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의 마지막 진화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는 영성적 돌연변이 현상이 막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니체가 꿈꾸었던 ‘마지막 인간’은 그의 상상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이미 그렇게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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