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정의와 소통을 바라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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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7 년 6 월 [통권 제5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113회 / 댓글0건본문
선거가 끝났다. 급작스레 치러진 선거여서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나는 투표를 잘 하기 위해서 공부를 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책을 찾아 비교하고, 토론회와 뉴스를 보고, 팩트 체크를 다시 체크하는 데 매일같이 두어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 공덕인지 부작용인지, 누굴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친구에게 후보들의 상세정보를 알려줄 수 있었다. 싫어하는 후보들에 대해서는, 아는만큼 욕할 수 있어서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모른다.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친구와 피 튀기는 토론을 해서 마음을 돌려놓기도 했는데, 불교신자를 개종시키려는 예수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보니, 가만 있자, 내가 원래 뭘 이렇게 열성적으로 하는 인간이 아닌데 어쩌다가 선거에 이런 열성을 쏟는 걸까.
이유를 스스로 설명해 보려다가 내 마음을 잘 대변해준 사람이 있기에 그의 입을 빌린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말이다.
투표는 왜 하는 걸까요? 국민의 권리, 민주주의, 민의, 심판. 여러 단어로 수많은 답변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왜 투표하십니까? 민주주의, 주권. 다 맞는 말이죠. 제 이유는 좀 덜 거창합니다. 저는 일상 중 겪는 고충의 밑바닥에 정치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된 어느 날부터, 저를 위해서 투표합니다. 한 사람이 성장해 사회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 중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습니다. 입시, 취업, 결혼, 주택, 출산, 양육, 질병, 부양, 노년, 그리고 세계관. 이 중 정치와 관련 없는 영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일상적 스트레스의 근본에 정치가 있고, 그 정치로 인한 나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노력, 그 노력이 바로 투표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래서 투표합니다.
- (교통방송, 뉴스공장, 5월 8일 오프닝 멘트)
미디어 활동을 시작한 때를 보면, 그는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은 듯하다. 나는 사십 즈음, 가족부양 스트레스를 심하게 겪으면서부터 선거에 관심을 가진 늦깎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부양 스트레스 말고도 위에 열거한 대부분의 영역에서 언제나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 입시~부양까지는 지나왔지만 앞날이 불안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의 노년을 위해 투표했다.
투표 결과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고 대통령이 된 다음 날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일의 우선순위를 결정하여 신속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 없다던 몇 년 전의 그 사람이 맞나 싶다. 자신의 일정을 공개하고 직접 브리핑하는 모습을 보면, TV토론회에서 공격받고 쩔쩔매던 그 사람이 맞나 싶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발탁한 사람들이다. 우선 외모 때문에 화제가 되었는데, 대통령과 민정수석을 필두로 청와대 출연진들이 뉴스에 등장하면 ‘잘 생긴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자들은 이거야말로 ‘증세 없는 복지’라며 흐뭇해하고 남자들은 ‘외모 패권주의’라며 시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발표될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외모보다 더 돋보인다. 온 인생을 어디다 걸고 살아왔는지가 분명하여, 각각 적재적소에 배치되었다는 믿음을 준다. 그럴 만한 사람들이 때가 되어 만나서 큰 꿈을 꾸는 스토리는 삼국지를 연상시킬 만큼 기대가 크다. 새 정부는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선거가 끝나고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물었는데, 몇 가지 항목 중 ‘정의와 소통’을 꼽은 사람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지난 정부는 이것이 부족해서 막을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정의와 소통은 지금에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 옛날 부처님께서도 『증일아함경』에서 국왕의 자리를 오래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열 가지 덕목을 가르쳐주셨다.
1.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으며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
2. 신하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 말을 거스르지 말 것
3. 항상 보시를 좋아하여 백성과 함께 즐거워할 것
4. 법도에 맞게 재물을 거둘 것
5. 남의 여자를 탐하지 말고 자기 아내만 잘 보호할 것
6. 술을 마셔서 마음이 어지럽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7. 실없이 웃거나 놀지 말 것
8. 법을 살펴 다스릴 것
9. 신하들과 절대 다투지 말고 화목할 것
10. 병이 없고 기력이 강성할 것
또 『중아함경』에서는 나라를 쇠퇴하지 않게 하는 일곱 가지 법 중 ‘집회를 자주 갖고 바른 일을 의논할 것’을 첫 번째로 꼽으셨다.(『불교사회경제사상』, 박경준, 2010, 동국대학교출판부 139, 148쪽에서 재인용)
두 경전에서 하신 말씀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 시민들의 요구와 놀랄 만큼 일치하는 것을 보면, 정의와 소통은 시대를 관통하는 화두이다. 그러니 나라의 지도자가 부처님의 이 말씀을 통치기준으로 삼는다면 장기집권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 훌륭한 지도자를 갖는 것은 인민의 홍복이겠지만 그 지도자를 누가 만드는지도 잊지 말아야겠다.
지난 두 번의 대선을 돌이켜 보면,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에서 전과자를 대통령으로 뽑았고 과거의 향수에 붙들려 허수아비를 권좌에 앉혔다. 환(幻)에다가 환(幻)으로 투표한 셈이다. 그 결과, 부자가 되기는커녕 살림은 거덜 날 지경이고 시스템은 엉망이 되었다. 표를 잘못 던진 과보를 모두가 혹독하게 치르고 나서야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아가는 중이다. 이런 각성이 있었기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을 바꾸기에 이른 것이다.
‘부자 되게 해 주세요’에서 ‘정의와 소통이 실현되는 사회’를 요구한다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정도가 아니라 방향을 돌려 큰 발자국을 뗀 것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런 변화를 이룬 데 자부심을 느낀다. 작년과 올해,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대선이 있었다. 미국은 뽑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탄핵이야기가 나오고, 프랑스는 ‘오로지 똥차를 피하기 위해 쓰레기차에 받힌 격’이라면서 자괴감에 빠진 사람이 많다고 한다.
투표장까지 가서 일부러 백지를 낸 사람, 투표용지에 게임 캐릭터를 붙이거나 똥 닦은 휴지를 붙여서 무효표를 만든 사람 등등. 프랑스답게 매우 창의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지만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가. 헬조선을 만들어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해준 지난 정부에게 이 공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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