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
첫 번째 걸음, 성철 스님이 보신『명추회요』의 자취를 찾아
페이지 정보
박인석 / 2015 년 10 월 [통권 제3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05회 / 댓글0건본문
이번 호부터 동국대 불교학술원 박인석 교수님의 ‘『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연재를 시작합니다. 박 교수님은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최근 백련불교문화재단에서 펴낸 『명추회요』의 ‘해제’를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박 교수님은 이번 연재를 통해 『명추회요』의 전반을 독자 여러분께 쉽게 전할 계획입니다. - 편집자
<선림고경총서> 2집으로 올해 7월에 간행된 『명추회요』의 해제를 쓰기 위해 필자는 5월 초에 백련암을 방문하였다. 그곳에 소장된 성철 스님의 고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필자가 무척 궁금하게 여겼던 점은 성철 스님께서 쓰신 『선문정로』의 제1장에 가장 먼저 인용된 “견성을 하면 즉시에 구경무심경(究竟無心境)이 현전하여 약과 병이 전부 소멸되고 교와 관을 다 휴식하느니라.”는 『종경록』 「표종장」의 문구를 성철 스님께서 『종경록』을 직접 보고 인용하신 것인지, 아니면 『종경록』의 촬요본인 『명추회요』를 보고 인용하신 것인지 하는 데 있었다.
왜냐하면 『종경록』은 권수만 해도 1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므로 이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인용한다는 것은 무척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문정로』 앞부분에서 성철 스님은 『종경록』뿐 아니라 그것의 촬요본인 『명추회요』 역시 소개하고 있으므로, 필자는 성철 스님께서 『종경록』의 촬요본인 『명추회요』를 보고 『선문정로』에다 『종경록』의 문구를 인용하시지는 않으셨을까 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백련암에 도착했는데 원택 스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스님께서는 성철 스님께서 보시던 고서가 있는 서고의 문을 열어주시면서 그 속에 있는 책들을 열람하게 해주셨다. 필자는 2013년에 작성된 목록을 통해 백련암에 모두 다섯 질의 『종경록』이 소장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섯 질 가운데는 지금도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본 『종경록』에서 찍은 인출본이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고, 또 그것을 저본으로 삼아 활자로 찍은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에 수록된 『종경록』이 또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세 질 가운데 두 질은 중국에서 찍어낸 가흥대장경에 들어 있던 『종경록』이고, 마지막 한 질은 조선말에 이를 붓으로 필사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종경록』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바로 해인사에 소장된 고려시대의 판본이다. 명대 이후로 나온 판본을 이와 비교해보면 글자의 출입은 거의 없지만, 『종경록』의 체제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오대 시기 항주에서 활동했던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스님이 편찬한 『종경록』 100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종지를 표방하는 「표종장」, 종지에 대한 의문과 대답을 기술한 「문답장」, 그리고 종지에 대한 경론의 문구를 인용한 「인증장」의 세 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고려의 판본에서는 「표종장」의 위치를 1권에서 61권 전반부까지로 본 반면, 명대 이후의 판본에서는 「표종장」을 『종경록』 1권의 전반부까지로 보는 점에서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다.
필자는 성철 스님의 『선문정로』에서 『종경록』 인용이 나오는 구절을 살펴보던 중 『종경록』의 「표종장」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할 때면 스님께서 꼭 “『종경록』 「표종장」”이라는 표시를 해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백련암에 소장된 다섯 질의 『종경록』의 체제와 비교해 보았더니, 이는 「표종장」의 위치를 1권의 전반부로 보고 있는 가흥대장경의 『종경록』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성철 스님께서 가흥대장경에 들어 있는 『종경록』을 해인사의 『종경록』 인출본보다 먼저 보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백련암에는 『명추회요』가 따로 소장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원택 스님께 직접 여쭤볼 수 있었다. 원택 스님께서 『명추회요』의 발간사에 쓰신 것처럼, 『명추회요』는 국내에서 판본을 구할 수 없어서 1990년대 들어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사제스님을 통해 어렵게 복사본을 구해올 수 있었다고 하셨다.
가흥대장경 내 종경록 중 선문정로 첫째 인용이 나오는 대목
이처럼 백련암에 소장된 다섯 질의 『종경록』을 열람하고, 또 『명추회요』와 관련된 원택 스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보니, 필자가 백련암에 오는 동안 가졌던 의문은 점차 해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즉 성철 스님께서 『선문정로』(1981)를 쓰시는 데 있어 인용한 『종경록』의 문구는 『명추회요』와 같은 촬요본이 아니라 『종경록』 100권 전체를 두루 열람한 뒤 뽑아낸 것이고, 스님께서 직접 보셨던 『종경록』은 가흥대장경에 들어 있던 명대 이후의 판본이라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를 확인한 뒤, 필자는 가흥대장경의 『종경록』을 유심히 들춰보았다. 혹시 『선문정로』에 인용된 대목을 전후해서 성철 스님께서 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신 것은 없나 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종경록』을 보시다가 필요한 문구는 따로 메모해서 기록해두신 것으로 생각된다.
하루 동안 백련암에서 확인했던 사항들을 원택 스님께 말씀드린 뒤, 필자는 서울로 올라와서 『명추회요』의 해제 작성에 매진하였다. 그런데 성철 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하셨던 원택 스님께서는 이 날 필자가 확인한 몇 가지 내용들을 듣고서 조금 남다른 소회가 있으셨던 것 같았다. 『명추회요』가 출판된 후 들은 말씀이지만, 원택 스님께서는 『선문정로』의 제1장 견성즉불(見性卽佛)에 나온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사상이 영명연수 스님의 『종경록』 「표종장」의 견해에 입각한 것이라고 직관적으로 생각하셨다고 한다. 이 말씀을 듣고 나서 필자는 영명연수 스님의 돈점론을 연구한 성과들을 찾아보았는데, 올해 초 일본에서 나온 연구서 가운데 『종경록』이 돈오돈수의 입장에서 선종의 수행론을 종합하였다는 관점을 찾을 수 있었다.
국내에서 『종경록』을 연구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받은 것은 필자가 처음이지만, 2010년을 전후해서 중국, 대만, 일본에서는 영명연수 스님과 『종경록』에 대해 거의 10편에 달하는 박사학위논문이 나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종경록』을 보는 관점이 연구논문마다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연수 스님의 근본입장이 중관(中觀)에 있다고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화엄(華嚴)에 있다고 보기도 하는 등 관점의 차이가 상당히 큰 것이다. 이는 아마도 『종경록』 속에 중국 불교의 제반 가르침이 종횡무진으로 인용되고 있고, 따라서 같은 『종경록』을 보더라도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그것의 핵심을 여러 가지로 다르게 파악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결국 『종경록』을 보는 연구자의 관점이 각각의 논문들에 크게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근대의 대선사(大禪師)였던 성철 스님께서 보신 『종경록』에 대한 관점 역시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남아 있는 문헌 기록으로 본다면, 『종경록』에 대한 관심과 언급은 고려시기에 비교적 성하게 이루어졌다가, 조선시대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이후 성철 스님에 이르러서야 이 문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철 스님께서 이 문헌을 높이 평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만 『종경록』은 분량이 너무 방대하므로, 그것을 십분의 일 가량으로 축약해서 요약한 『명추회요』를 통해 그런 연구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종경록』은 100권에 달하는 큰 분량의 책이지만, 그것은 결국 마음을 종지로 삼은 뒤, 마음 거울을 통해 일체법을 골고루 비추어보려는 시도를 담은 문헌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비추는 거울은 하나이지만 그에 비춰지는 대상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음 거울에 비춰지는 다양한 것들에 대한 기록이 『종경록』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면, 『명추회요』에서는 그 내용이 보다 간추려져서 나타나는 셈이다.
현재 출판된 『명추회요』는 대략 350여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서 앞으로 다시 30여 가지 정도를 추려서 소개하는 것이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명추회요』, 그 숲을 걷다’의 기본적인 구상이다. 또한 『종경록』을 편찬한 영명연수 스님과 『명추회요』를 간행한 회당조심 스님, 그리고 이 두 문헌을 모두 언급한 성철 스님의 공통점은 세 분이 모두 선사(禪師)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루게 될 내용은 선사들의 관점에 의해 새롭게 파악되는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들의 가르침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많이 본 뉴스
-
‘옛거울古鏡’, 본래면목 그대로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불면석佛面石 옆 단풍나무 잎새도 어느새 불그스레 물이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포행을 마치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2024년 10월호 『고경』(통권 …
원택스님 /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다네
어렸을 때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시절에 화장실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거든요. 무덤 옆으로 지나갈 때는 대낮이라도 무서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무덤 옆으로야 좀체 지나…
서종택 /
-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없다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
성철스님 /
-
구루 린뽀체를 따라서 삼예사원으로
공땅라모를 넘어 설역고원雪域高原 강짼으로 현재 네팔과 티베트 땅을 가르는 고개 중에 ‘공땅라모(Gongtang Lamo, 孔唐拉姆)’라는 아주 높은 고개가 있다. ‘공땅’은 지명이니 ‘공땅…
김규현 /
-
법등을 활용하여 자등을 밝힌다
1. 『대승기신론』의 네 가지 믿음 [질문]스님, 제가 얼마 전 어느 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글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여쭙니다. 그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 중에 일심一心, 이문二…
일행스님 /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