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불성과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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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7 월 [통권 제2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53회 / 댓글0건본문
도구적 가치와 불성을 가진 존재
얼마 전 천재 수학소녀가 탄생했다는 뉴스가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미국의 한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국계 여고생이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등에 합격했고, 두 대학의 간청으로 이들 대학을 동시에 다니게 됐다는 뉴스였다. 하지만 이는 오래지 않아 거짓으로 판명 났다. 명문대학 진학에 대한 압박감에 스스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꿈 많은 소녀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세태가 작용했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지닌 학벌과 스펙, 직장과 연봉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가 지닌 조건에 의해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이런 세태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존엄성과 평등성을 해체시킨다. 외모, 학벌, 연봉, 사회적 지위 등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호가 되고, 그런 척도로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인간의 목적적 가치는 설 땅을 잃고 만다.
존재를 바라보는 이와 같은 도구적 가치관은 단지 인간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존재는 도구적 유용성이라는 척도에 의해서 그 가치를 평가받는다. 인간을 비롯한 존재의 가치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돈으로 환산되는 양만큼만 부여된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해야 하며, 스스로 온갖 사회적 기호를 덧칠하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이 무력화된 시대에 우리들에게 정신적 위안과 안도감을 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성론이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일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설하고 있다. 목적적 가치의 해체, 인간 존엄성의 실종으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우리들에게 이 가르침은 정신적 위안이 됨은 물론 도덕적 척도로 삼기에 충분하다.
해석하기에 따라 이 가르침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성불할 수 있다는 종교적 의미이고, 둘째 모든 인간이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인간존엄에 대한 증언이다. 따라서 불성사상은 교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가치 상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불성론이 담고 있는 의미를 바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이에 대한 오해와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하면 ‘있다’는 언어적 진술에 집착하여 그것이 담고 있는 언어적 기호에 나포되고 만다. ‘있다’는 의미에 매달려 어떤 실체적 실아(實我)로서의 불성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불성을 이렇게 이해하는 순간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불성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 반문으로 이어진다.
중도로서의 불성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가르침은 분명 우리의 존엄성을 확인해주는 교설인데 왜 그와 같은 반문이 제기되는 것일까? 이는 불성을 ‘있다’와 ‘없다’의 범주로 이해하면서 생겨난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인간의 사유방식은 ‘있다’와 ‘없다’와 같은 이항대립적 사유방식으로 작동한다.
‘있다’고 하면 ‘없음’이 배제되고, ‘없다’고 하면 ‘있음’이 배제되는 것이 언어가 가진 약속이고 논리가 가진 규칙이다. 이런 논리에서는 ‘있음’은 ‘없음’을 전제로 해야 성립되고, ‘없음’은 ‘있음’을 부정할 때만 가능해진다. 여기서 ‘있음’과 ‘없음’은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되고 만다. 불성을 이와 같은 이항대립적 범주로 인식하는 순간 불성도 ‘있다’라는 개념에 국집하게 되고, 어디에도 ‘없음’이 허용되지 않는 ‘완전한 있음’, ‘실체적 존재’로 불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사유방식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진술이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대립적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관점으로 불성을 보면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듣는 즉시 그 말에 집착하여 불교는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므로 불성론은 교리적으로 충돌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없음’을 완전히 배제한 ‘실체로서의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불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견(斷見)이나 영원불변의 실체로써 존재한다는 상견(常見)에 빠지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주장은 성철 스님의 독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경전에 근거한 말씀이다.
『대반열반경』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지만 그것을 ‘있다’와 ‘없다’와 같은 이원적 범주로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열반경의 말씀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구절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진술에만 집착한다. 하지만 열반경에서 말하는 불성은 ‘있다’거나 ‘없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불성을 중도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성철 스님 역시 이와 같은 교설에 입각하여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있는 것[有]도 아니고 없는 것[無]도 아니며, 단절된 것[斷]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常]도 아니기에 중도”라고 설명한다. 물론 『백일법문』의 이 내용은 『대반열반경』 32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 대한 설명이다.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非內非外), 또한 안이고 또한 밖이므로(亦內亦外)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 중생의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非有非無], 또한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다[亦有亦無].”
인간이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있다’와 ‘없다’는 이분법적 사유이다. 하지만 불성은 그와 같은 사유방식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즉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불성은 또한 있고 또한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불성은 중생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차별과 변견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불성에 대한 이와 같은 중도적 설명은 인간이 가진 이원적 사유패턴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킨다. 만약 불성을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실체론에 빠져서 존재의 가치를 지킬 생각과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불성은 본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성 같은 것은 본래 없다고 이해하면 허무주의에 떨어져서 정신적 공허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차별적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로 설명된다.
『열반경』에서 말하는 ‘비유비무(非有非無)’는 있음도 부정하고, 없음도 부정하는 것이다. 있다거나 없다는 두 가지 극단적 사유를 부정하는 것을 쌍차(雙遮)라고 한다. 따라서 아트만과 같은 실체화된 불성은 애초에 경전에서 설한 바 없다. 실체화된 불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를 『열반경』은 ‘또한 있고, 또한 없다’고 표현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또 있고, 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있음과 없음을 철저하게 긍정하는 것을 쌍조(雙照)라고 한다.
‘있다’는 상견에도 빠지지 않고 반대로 ‘없다’는 단견에도 빠지지 않는 중도적 인식에 대해 열반경은 ‘십이인연을 보는 지혜’라고 설명했다. 불성은 어떤 세포나 물질 같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보는 지혜’이자 ‘십이연기를 깨닫는 지혜’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반열반경』에서는 “만약 어떤 사람이 십이인연을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것은 부처를 보는 것이니, 부처는 불성이다.”라고 설했다. 성철 스님 역시 “십이연기를 바로 보는 사람이 불성을 바로 보는 사람이고, 불성을 바로 보는 사람이 십이연기를 바로 보는 사람이니, 이 사람이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이라고 정리한다.
결국 불성은 연기의 진리이며, 그 진리를 깨닫고 내면화하는 인식이다. 불성이 있음을 믿고 그 이치를 깨닫고 삶 속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하면 불성은 엄연히 존재하고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불성의 존재를 믿지 않고 이해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불성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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