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명추회요』를 받아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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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5 년 8 월 [통권 제2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466회 / 댓글0건본문
준비하고 준비했던 『명추회요』를 책으로 받아드니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흥이 일었습니다. 앞으로 언제 다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며 낼 이만한 책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해 출간한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상・중・하)과 올해 초에 낸 『아침바다 붉은 해 솟아 오르네』, 그리고 이번의 『명추회요』 등 3책을 묶어서 제방에 계신 종단어른스님들께 올리는 것으로 기쁨을 대신했습니다.
원택 스님이 부처님 전에 명추회요를 봉정하고 있다.
『명추회요』를 출판하고서 교계 언론과 일간지 종교 담당기자님들을 초청해서 신간소개를 부탁하고자 『명추회요』발간 보도자료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자료를 보던 중 이번 『명추회요』의 해제를 써 준 동국대 불교학술원 박인석 교수에게 돈오돈수론을 전하는 『종경록』 연구논문이 없을까하고 문의했더니 다음날 야나기 미키야스(柳幹康) 교수의 논문 한 편을 보내왔습니다.
“종밀(780~841) 스님이 세상을 떠난 뒤 약 100년 후에 활약했던 연수(904~976)는 종밀의 이론을 환골탈태하여 독자적인 수증론(修證論)을 구축하였다. 연수와 종밀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양자가 상정한 수행자의 차이에 있다. 종밀이 아직 해탈을 얻지 못한 범부의 입장에서 동일하게 아직 깨닫지 못한 범부를 향해 책을 저술한 것에 대해 영명연수는 깨달은 조사의 입장에서 가장 높은 근기인 상상근(上上根)에 대하여 돈오돈수론의 『종경록』을 저술하였다.
연수 선사는 종밀 스님의 돈오점수 등을 상근 이하의 사람에 대한 방편으로 유지하는 한편, 돈오돈수는 부처로서 살아가는 길을 상상근(上上根)에게 개시(開示)하고 각종 근기의 사람들을 평등히 돈오돈수로 이끄는 일원적인 수증론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이 글을 읽고서 『선문정로』 출간으로 한국불교학계에 폭풍같이 몰아친 ‘돈점(頓漸) 논쟁’은 아직도 성철 스님의 폭넓은 선교 불교관을 살피지도 못한 채 ‘보조 국사의 돈오점수 비판’에만 머물러 있음을 이번 『명추회요』의 출간으로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불교학계에 『종경록』에 대한 선행연구가 깊이 있게 진행되어 있었다면 성철 스님의 돈점 논쟁은 또 다른 불교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리란 생각입니다.
부처님 전에 올려진 성철 스님 사상 선양 서적들. 모두 70여종에 이른다.
오는 2017년은 봉암사 결사 70주년, ‘백일법문’ 개당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앞으로 2년 남짓 동안 교계의 여러 학자분들과 의논하여 성철 선사의 선교관과 수증론에 대한 학술회의를 2017년 11월 중에 개최하여 한국 선학과 수행론의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종밀 스님이 입적하신 841년은 당나라 무종의 회창법난(會昌法難)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그 후 100년 간의 중국사를 간략히 살펴봅니다.
회창의 폐불사건(845~847)은 규모와 철저함에 있어서 특히 유명합니다. 파괴된 사원은 4,600여 개소, 무명사원은 4만여 개, 환속한 승려와 비구니는 26만 5백 명이라 하고 모든 불구와 불경들이 불타 없어졌다고 합니다.
875년에는 황소의 대란이 발발하여 884년에 종식되고 그 후 혼란으로 907년에는 후량 태조 주전충에게 300여 년간 이어져 온 당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이어서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후량(907~923), 후당(923~936), 후진(936~947), 후한(947~950), 후주(951~960)의 시대를 5대라 합니다. 후주 3대인 세종이 재위하여 배불정책을 실시해 일종(一宗)인 세종의 극단적 파불의 법난이 일어납니다. 그 뒤를 이어 조광윤이 후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워 등극하니 송 태조가 됩니다.(960)
23년만에 빛을 보게 된 명추회요
5대 시대에는 화북의 위 다섯 왕조 외에 화중, 화남, 사천, 산서에서 10국이 명멸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오월(吳越, 907~978)국이 있으니 항주 자사 전류가 항주에 있으면서 절강성과 강소성의 일부를 영유하여 후량의 태조 때 오월왕으로 봉해졌습니다. 전류는 자신이 불교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자인 충의왕(錢弘俶, 948~978)에 이르러서는 불교를 더욱 융성케 하였습니다. 영명연수는 904년에 태어나 934년에 출가하고 960년 충의왕의 초청으로 궁에 머물고, 다음해 961년에 영명사의 주지가 되어 『종경록』을 영명사에서 편집하였습니다. 당 후기에 비하여 5대 10국시대의 인구는 그 1/3 또는 1/2까지 줄었다고 할 정도의 난세였고, 또한 당말과 5대 10국에 걸쳐서 대규모적인 불교 파불의 탄압행위가 2번이나 단행되어 불교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10국 중의 하나인 오월국만은 불교를 극진히 외호했기에 각파의 승려들이 모여들어 소위 종파의 울타리를 넘어 불교가 성한 가운데서 제종을 결집한 영명의 『종경록』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마침 자료를 만들어 준 박인석 교수의 원고를 실어 『명추회요』 발간에 대한 이해를 더할까 합니다. 박인석 교수는 “『명추회요』는 『종경록』 100권의 요점을 발췌한 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명추회요』는 『종경록』 100권의 요점을 발췌한 책
1. 성철 스님과 영명연수, 『종경록』, 그리고 『명추회요』
성철 스님(1912~1993)은 평소 영명연수(904~975)와 『종경록』에 대해 높이 평가했고, 그런 맥락에서 『종경록』 100권의 촬요본인 『명추회요』가 선림고경총서의 제2집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 책이 출판된 이후 원택 스님은 스승인 성철 스님이 쓰신 『선문정로』의 돈오돈수론이 영명연수의 『종경록』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그간 전혀 지적되지 못했던 점으로, 그간 한국불교계에 있어 돈점론이 주로 <규봉종밀(돈오점수) → 보조지눌(돈오점수) ↔ 퇴옹성철(돈오돈수)>이라는 좁은 틀에서 논의되던 시각을 벗어나, <마조도일(돈오돈수) ↔ 규봉종밀(돈오점수) ↔ 영명연수(돈오돈수)→ 퇴옹성철(돈오돈수)>이라는 선종사의 보다 넓은 지평에서 이 문제가 논의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2. 돈·점(頓漸) 논쟁
이는 선종(禪宗)의 수행관(修行觀)과 관련된 논쟁이다. 선종의 6조인 혜능의 시기에 본격적으로 부각된 문제로서, 수행자가 자신의 본성을 보고서[見性] ‘단박에 깨달음[頓悟]’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 혜능의 동문이었던 신수의 선법은 ‘점차로 깨닫는 방법[漸]’으로 간주되어 선종사에서 방계로 간주되었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성철 스님은 혜능의 선법이 ‘돈오돈수’(=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닦음)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 ‘돈황본 『육조단경』’을 간행하기도 하였고, 『선문정로』에서 선종 수행론의 지표가 ‘돈오돈수’에 있음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이는 특히 중국의 규봉종밀(780~841)이 선종 수행론의 지침을 ‘돈오점수’(=단박에 깨닫고 점차 닦음)로 보고 고려의 보조지눌이 이 ‘돈오점수’를 적극 수용한 점을 극렬하게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80년대로부터 20여 년간 지속된 돈점논쟁은 한국 선종의 수행관 정립과 관련하여 치열한 토론의 장으로 전개되었다.
3. 성철 스님의 ‘돈오점수’ 비판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 곧 깨닫는 순간 모든 번뇌가 단박에 끊어지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깨달음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규봉종밀과 보조지눌의 ‘돈오점수’에 언급된 ‘돈오’는 철저한 깨달음인 증오(證悟)가 아니라 ‘이해해서 깨달은 상태[解悟]’에 불과함을 지적하였다. 여기에는 지적인 이해에 근거한 앎[解悟]을 진정한 깨달음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간곡한 경책이 들어가 있다. 성철 스님의 ‘돈오점수’ 비판은 이 주장을 적극 옹호했던 규봉종밀과 보조지눌로 향했고, 이로 인해 성철 스님의 돈점론은 기존 전통에 대한 강한 비판과 부정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했다.
4. 마조도일, 규봉종밀, 그리고 영명연수의 돈점론
선종사를 보면, 마조도일의 선풍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됨을 볼 수 있다. 선종을 대표하는 임제종 역시 마조도일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다. 마조도일은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 ‘작용이 그대로 본성의 드러남이다[作用是性]’,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道不用修]’ 등의 주장을 남겼다. 마조의 견해는 ‘돈오(頓悟=無事)’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규봉종밀은 마조도일의 수행관이 방일에 떨어질 문제가 있는 것을 우려하여 ‘돈오’ 이후 ‘점수’를 추가한 뒤, 마조도일의 ‘돈오’를 불완전한 돈오로 보았다.
한편 영명연수는 규봉종밀이 불완전한 돈오로 본 마조도일의 ‘돈오’를 그야말로 마음의 실상을 보아서 부처로서 행위하는 ‘돈오돈수’로 보고서, 돈오돈수에 입각하여 선종의 수행론을 일원화시키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돈오돈수는 상상근(上上根)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근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돈오점수’ 등을 방편으로 제시하여 각종 근기의 사람들을 ‘돈오돈수’로 이끌려고 하였다.
5. 『명추회요』 번역의 의의
선종사에 있어 영명연수의 위상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그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철 스님이 평소 영명연수와 『종경록』, 그리고 『종경록』의 촬요본인 『명추회요』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종사에서 논란이 있었던 돈점의 수행론이 영명연수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돈오돈수’로 굳건히 정립되었음을 일찍부터 주목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영명연수는 수행의 출발점을 ‘마음에 대한 믿음을 일으킴’으로 보고, 수행의 종점을 ‘돈오돈수’로 보고 있다. 불교에서 마음을 중시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명연수만큼 마음과 일체법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든 선사는 드물다. 그는 마음과 부처·보살의 관계, 마음과 경전의 관계, 마음과 정토의 관계, 마음과 수행방법의 관계 등과 같이 ‘마음의 탁월한 공능’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 ‘질문-대답-인증’의 구조를 빌려 『종경록』에서 300여 가지의 주제를 논하고 있다. 이 구조는 『명추회요』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들 논의는 ‘마음과 일체법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일관되지만, 구체적으로는 대부분 서로 다른 소재를 통해 진행되므로 독립적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영명연수로 대표되는 법안종(法眼宗)은 고려 광종 대에 이미 고려로 전파되었고, 이후 고려에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보조지눌의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 역시 영명연수의 가르침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영명연수와 『종경록』, 그리고 『명추회요』에 대한 주목은 앞으로 한국불교의 수행관과 관련된 정체성을 정립하고 해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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