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아름다운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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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5 년 5 월 [통권 제2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514회 / 댓글0건본문
작년 사월은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리만치 한해가 지나고 다시 봄을 맞았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은 다 어디로 갔나. 어느새 천지가 연록색이다. 찬란한 봄을 느낄 틈이 없었던 것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미안하게도, 살 궁리에 바빴기 때문이다.
경론을 읽는 것이 생계수단이 되니 복 받은 인생임에 틀림없지만, 작년 봄부터는 그조차 편치가 않다. 요즘 알바하는 틈틈이 읽는 책에, 목숨과 관련해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목숨이 다하는 경우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 중에 타살이나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아니라, 스스로 죽는 예로 희망념천(戱忘念天)과 의분에천(意憤恚天)을 들고 있다. 전자는 강력한 쾌락이 지배하는 하늘이고 후자는 강력한 분노가 지배하는 하늘이다. 전자는 유희에 탐착하다가 지쳐서 실신 내지 정신을 잃고 죽는다. 후자는 분노가 사무쳐서 원한을 품고 서로 째려보다가 분노가 극에 다다라 죽는다. (『구사론』권5, 분별근품, 『순정리론』권13, 변차별품 제2)
수미산 어느 층엔가, 욕계 삼십삼천 저 어드멘가 있다고 한다. 선업을 닦아서 즐거운 과보를 받은 것이 천(天)이라고 분명 배웠는데 분노의 힘으로 제풀에 죽는 하늘이 있다는 게 좀 의외라는 의심을 하다가 “아! 저기 어디가 아니고 바로 여기가 의분에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대와 오십대가,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자식 잃고 단식투쟁하는 부모와 그 옆에서 폭식 퍼포먼스 하는 또 다른 분노인이 서로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이곳이 바로 의분에천이 아닐까.
1년 만에 광화문에 나가 보았다. 안국역에서부터 겹겹이 둘러쳐진 경찰차 방어막을 한참 빙 둘러 지나서 겨우 광장에 들어가고 나니 유난히 두텁고 높은 검은 차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물대포와 카메라가 장착된, 다기능의 트랜스포머라고 알려진 신종 차량이다. 세금을 이런 데다 쓰는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의분에천에 다녀왔다.
얼마 안 되는 집회인들을 그 몇 배나 되는 경찰이 에워싸고 있었다.
시위가 격렬하지 않았는데도 자진해산 하지 않으면 물대포를 쏘겠다는 경고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다. 스피커 성능이 너무 좋아서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저 스피커, 얼마 주고 구입했을까. 또 의분에천이 속에서 올라왔다. 소리가 괴롭고 배도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겁도 나고 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서 시위현장을 나왔다. 나오면서, 나는 뭐하는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가 후지다고 생각했던 젊은 날, 시민의 힘으로 왕정을 끝장낸 프랑스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 뒤에 알게 된 61년 가을 파리에서 있었던 알제리인 학살은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 봄에 한 감독이 파리 시내에서 마주친 시민들을 인터뷰해서 만든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오늘의 광화문을 떠올릴 때 머릿속에 저절로 재생되는 필름이다. 제목이 ‘아름다운 5월’이다. 감독 크리스 마르케가 2012년에 91세로 별세하여 이 영화가 다시 조명을 받은 일이 있다. 전문가의 평을 들어 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파리의 아름다운 전경들이 펼쳐진다. 공중과 첨탑 등에서 부감으로 촬영된 멋진 풍경!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파리. 그리고 울려나오는 이브 몽땅의 고혹적인 목소리. “확인하고 싶었다.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가?”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 <아름다운 5월>은 이렇게 시작된다. (중략)
61년 10월 파리에서 자행된 알제리인 대량 학살(이때 희생당한 알제리인 200여명은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채 세느강에 던져졌다)에 대한 지식인의 죄의식과 트라우마, 제국 프랑스의 전승비 앞에 아직도 사열하는 군국주의자들의 행진들, 수탈당하는 이민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의 양태들, 돈을 숭상하며 주식거래장 앞으로 모여드는 군중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파리 사람들에게 5월은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이상기온을 꼽았고, 알제리에 대해서는 국수주의적 적대를 보였으며, 여성들은 정치를 남성의 전유물로 여겼다. 행복의 조건으로 돈을 꼽았고, 직면한 문제로는 연애와 결혼, 휴가에 관한 것을 언급했다.
크리스 마르케는 제국 프랑스, 근대적 자본주의 프랑스의 지배와 정치가 어떻게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욕망 속에 관철되어지는가를 들여다본다. 미시적 일상에 갇힌 사람들. 지배 논리와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군중들. 그러나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파리의 곳곳을 포착하던 카메라는 이윽고 파리의 감옥으로 향한다. 높은 담장과 팔각형의 건물은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고,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적대를 키워나간다. (중략) 무언가 잔뜩 화가 난 얼굴들,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얼굴들.
이어지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나레이션. “슬픔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 부자가 있을 수 없다. 감옥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정지연, 영화평론가, 2012.12.28.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다큐멘터리 KMDb에서 인용)
1961년의 파리를 오늘의 광화문에 오려다 붙여놓은 듯한 데자뷰다. 사월의 광화문에서 이 나라를 생각할 때 여전히 저런 영화가 만들어진 프랑스가 부럽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족을 잃고도 모자라서 갖은 모욕을 당하는 유가족에게 어떤 위로를, 부처님의 어떤 말씀을 전해줄 수 있을까.
자식 잃고 실성한 여인에게 부처님께서 내려주셨다는 처방, 한 번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깨 한 되 얻어오라는 비유를 들려줄 수 있을까. 그랬다간 째려봄을 당하기 십상이겠다. 그 대신에 동병상련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짧은 한마디를 그분들에게 바친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5.18 기념재단이 진도에 붙인 현수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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