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근현대 간화선의 중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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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15 년 5 월 [통권 제2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581회 / 댓글0건본문
「고경」에서는 ‘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고우 스님은 출가 후 평생 선원에서 정진해 오셨으며, 지금도 참선 대중화를 위해 진력하고 계십니다. 화두 참선의 의미와 방법, 그리고 효과에 이르기까지 고우 스님이 직접 경험한 내용을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 편집자
일제강점기 선학원 설립
개화기에 유교국가 조선왕조의 무능과 일제의 침략 야욕은 나라를 망하게 하지요.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고 총독부를 세워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합니다. 일제 총독부는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사찰령(寺刹令)’을 만들어 사찰의 주지 인사권과 재산 처분권까지 행사합니다. 불교도들은 개화기에 교단을 재건하려 했으나 일제강점으로 다시 무산됩니다.
그런데, 1919년 3・1항일만세운동이 일어나 조선인들의 자주 의식의 높아집니다. 조선불교인들도 마찬가지였지요. 특히 청년불자들은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여 총독부의 사찰령 폐지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수 승려들은 일제의 정책에 순응합니다. 더구나 일본불교의 폐풍인 대처승(帶妻僧) 풍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파계행(破戒行)에 대하여 용성 스님은 총독에게 시정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선 승려의 파계를 조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수의 승려들이 결혼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세속화가 조선불교 승단에 급속히 확산됩니다. 이것은 광복 후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이때 사찰의 선방에서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참선만 하던 선승(禪僧)들은 정법과 계율을 지키며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찰의 주지들은 대부분 대처승들이어서 사찰 재정을 사유화하고, 선원 수행자를 위한 공양은 점점 줄였습니다. 이에 선승들은 뭔가 자구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리하여 전국 선승들이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禪學院)이란 절을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절 이름에는 절 사(寺)자를 붙이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선학원이라 한 것은 ‘사찰령’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제 말기인 1942년에 전국 선원은 68개, 하안거 정진 대중은 500명이었는데, 이 선학원은 전국 선승들의 결집처로 광복 후 승단 정화의 산실이 됩니다.
조계종 재건과 봉암사 결사운동
1935년 무렵에 조선불교도들은 일본불교계가 총독부와 협잡하여 조선불교를 자기들이 장악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항일운동가 출신의 월정사 지암 스님이 중심이 되어 이를 저지하고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총본산 건설과 교단 재건을 추진합니다.
1937년부터 총본산 건설이 본격화되어 전국 본말사에서 건립비를 모으고, 각황사 옆 보성학교를 인수하여 1938년 10월에 조선불교 총본산 법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이 바로 이때 세운 것입니다.
조선불교 총본산 건립에 성공하자 이 운동을 전개한 지도자들은 조선불교를 총괄하는 교단 재건을 원하였습니다. 이에 총독부를 설득하여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을 재건하게 됩니다. ‘조계종(曹溪宗)’이란 종명은 선종의 6조 조계혜능대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중국과 일본에 없고 오직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에만 전해오는 종명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교단이 강제 해산된 이후 수백 년 만에 교단이 재건되었습니다. 이때 조계종의 초대 종정으로는 경허 스님과 함께 해인사에서 결사한 한암 스님을 추대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고 우리나라는 새 시대를 맞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단과 주요 사찰의 책임을 맡고 있던 스님들은 대부분 대처승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제 식민지 정책의 잔재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결사운동을 추진한 스님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봉암사결사입니다. 성철, 자운, 보문, 우봉 이렇게 단 네 명 스님이 시작한 결사에는 곧 이어 청담 스님이 합류하였습니다. 그 뒤로 향곡, 월산, 종수 스님과 젊은 사람으로 도우, 법전, 성수, 혜암 스님 등 해서 20여 명으로 늘었고, 비구니 묘엄 스님 등은 백련암에서 참여하였습니다.
봉암사결사 당시 성철 스님이 직접 작성한 공주규약
결사(結社)는 불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 살자는 종교운동입니다. 일찍이 중국에 백련결사가 있었고, 고려시대 보조 국사의 수선결사 그리고, 근세에 1899년 경허 선사의 해인사 수선결사, 용성 스님의 만일참선결사가 있었습니다.
봉암사결사 대중들은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중심으로 매일 참선하고 운력하며, 승가의 위의를 세우고자 보조 스님의 장삼을 본떠 장삼과 가사를 새롭게 하는 등 철저히 정진하였습니다. 이 결사소식은 널리 알려져 많은 스님들이 봉암사에 왔으나 방사부족과 결사 규약의 삼엄함을 보고는 돌아갈 정도였답니다.
그러나 봉암사결사는 1950년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결사 정신은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 본격화된 승단정화의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고, 1962년에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의 사상문화적인 뿌리가 되었습니다. 즉, 이 결사에 참가했던 스님 중에 청담, 성철, 혜암, 법전 스님은 종정이 되었고, 월산, 자운, 지관 스님 등은 총무원장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지금 조계종 스님들의 가사와 장삼도 봉암사 결사에서 정한 것이고, 화두 참선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 종풍의 정착, 보살계 수계식 등도 결사의 정신이 반영된 전통이라 하겠습니다.
승단 정화운동과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
1945년 광복 이후 남북 분단과 정치적인 대립은 극에 달했고, 급기야 1950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사찰에도 큰 피해를 주어 선원 유지가 어려워졌습니다.
여기에 1949년 농지개혁법이 시행되어 사찰의 토지가 유상몰수되어 경제적 기반이 더 약화됩니다. 특히 당시 대처승들은 토지 몰수 보상금을 자신들의 살림살이에 사용하고 선원에는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선승들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954년에 선승들은 선학원에 모여 정화결의대회를 열고 ‘불법(佛法)에는 대처 없다’는 대의로 정화운동을 시작합니다. 당시 교단에 승적을 가진 1만여 승려들의 절대다수는 대처승들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계율을 지킨 비구승들은 대부분 참선하는 스님들이었는데, 인원은 1,000여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선승들은 오로지 부처님 법에 맞게 교단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소수의 비구 선승들의 강력한 정화운동은 정부당국과 언론, 그리고 국민의 지지를 받아 마침내 1960년에 이르면 전국 주요 사찰은 비구 선승들이 운영권을 확보하게 되어 사실상 교단 정화가 성취됩니다.
1961년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정권은 비구-대처 양쪽 대표들에게 통합을 권고하여 마침내 양쪽이 이에 호응하여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합니다. 이것이 지금 조계종입니다. 이리하여 한국불교의 1700년 역사와 전통은 대한불교조계종이 계승하여 오늘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진 것은 1700년이나 되고, 조사선이 전해진 것은 통일신라시대였습니다. 그 뒤 구산선문이 성립되고 고려시대에 이르면 간화선이 도입되어 우리나라의 사상문화에 크나큰 기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조선조에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수백 년 동안 산중에 갇혀 지냈지만 개화기에 경허, 용성 스님의 결사를 계기로 다시 복원되어 광복 후 봉암사결사와 승단 정화를 거치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재건으로 간화선 중흥의 기틀이 갖춰졌습니다.
개화기에 선원은 겨우 몇몇 곳에만 운영되었으나, 경허선사의 결사운동 이후 지금에 이르러 전국 100여 곳에 선원이 운영되고 안거 결제 스님은 2,000여 명이나 됩니다. 또한, 재가 선원도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인류세계는 빈부와 이념・종교・인종 갈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중도를 기치로 이를 체험하여 지혜와 평화를 실천하는 간화선은 인류의 문명사적인 대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와 세계 인류에게 선이 대중화・생활화・세계화되어 수많은 대립과 갈등을 지혜와 자비 정신으로 해소하여 밝고 지혜로우며 행복한 세상이 되도록 다 함께 정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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