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개화기 간화선의 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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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15 년 4 월 [통권 제2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866회 / 댓글0건본문
「고경」에서는 ‘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고우 스님은 출가 후 평생 선원에서 정진해 오셨으며, 지금도 참선 대중화를 위해 진력하고 계십니다. 화두 참선의 의미와 방법, 그리고 효과에 이르기까지 고우 스님이 직접 경험한 내용을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 편집자
개화기 거사들의 참선과 개화당
조선 후기에 추사 김정희 거사의 많은 제자 중에 참선을 좋아한 오경석(1831~79), 유대치(1831~ ?) 거사가 있었습니다. 두 거사는 중인(中人)인 역관과 한의라 큰 벼슬을 하지 못했지만, 개화기에 닥친 위기를 크게 염려하고 나름의 대책을 추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개화당 결사입니다. 당시 참선하며 개혁을 꿈꾸던 개화당 결사 거사들의 움직임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경석이 조관을 유도하여 외교를 운용할 때에, 일백의(一白衣)로 시정에 은거하여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으로써 세계의 사정을 통찰하면서 뜻을 내정의 국면 전환에 두고 가만히 귀족 중 영민하고도 준수한 인재들을 규합하여 방략을 가르치고 뜻과 용기를 고무하여 준 이가 있으니, 당시 지식인 사이에는 백의정승의 이름을 얻은 유대치가 바로 그이다.”
- 최남선이 지은 『고사통(古事通)』
“유대치를 통해서 김옥균 등은 박규수로부터 배우지 못했던 신지식을 알게 되었다. 특히 불교가 그러했다. 그의 감화와 영향을 받아 김옥균은 불교 신자가 되었다.”
- 『김옥균전』
“유대치 거사는 경성인으로 선(禪)을 담론하기를 좋아하여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오경석 등의 거사가 도를 묻고 쫓아 경성에 일시 선풍(禪風)이 성행하였다. 김옥균 등은 귀한 신분으로 육식하는 세속인이나 선도(禪道)를 물어 일을 깊이 생각하고 동쪽 일본으로 가서 정세를 파악하고 혁신을 결의하니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그 결과이다. 대체로 불교의 이치(理致)를 배워 곧바로 세간법에 응용하고자 하였다 … 사변이 일어나자 거사는 도피하였는데 그 종적을 알 수 없다.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하)
유 거사는 청년 선비들에게 개화 지식만이 아니라 불교와 참선을 가르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경성에 일시 선풍(禪風)이 성행하였다’는 대목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개화당은 주로 동대문 밖 개운사, 탑골승방, 화계사, 신촌 봉원사 등에서 불교 공부를 하고 참선을 했습니다. 개화당은 유교의 한계를 느끼고 불교의 선 정신으로 나라의 혁신을 도모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개화당 거사들의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청군의 개입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촉망 받던 청년 거사들이 참선을 해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한 개화당 거사들의 좌절은 불교계에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개화당 거사 결사의 불교사적인 의의가 다시 조명되기를 바랍니다.
경허와 용성의 결사와 선풍 재건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10년 만에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조선은 국정 쇄신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때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도 해제되고, 남북한산성의 승군제도도 폐지되고 불교계에도 새 시대가 열립니다.
이때에 경허(1846~1912) 스님이 나옵니다. 23세에 동학사에 이름 높은 강사였던 스님은 콜레라가 휩쓸고 간 마을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생사문제가 급하다 여기고 화두 참선에 매진하여 마침내 1879년 오도송을 읊었습니다. 그 뒤에 호서지방의 천장암, 부석사, 수덕사 등 산사에서 혜월, 수월, 만공 선사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키워냈습니다.
그러다 1899년에 경허 스님은 해인사 조실로 추대되어 가야산으로 가서 선방(지금의 퇴설당)을 재건하고는 한암, 제산 스님 등 선승들과 함께 결사를 해서 선풍 진작을 도모합니다. 『경허집』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겨울 한철을 나게 되었는데 하루는 화롯가에 둘러앉아 이야기하다가 옛 사람들이 결사하여 수도하던 일이 화제가 되었다. 여러 선덕들은 모두 잊었던 것을 문득 생각해낸 듯 그 원력과 신심이 물이 솟아오르듯 산이 빼어나듯 서로 만남이 늦었음을 한탄하면서 곧 결사의 동맹을 의논하여 나를 맹주로 추대하였다.”
- 『경허집』
경허 스님은 스스로 결사를 추진한 배경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프다. 정법(正法)이 침체되고 미약하여 삿된 도가 치성하니 한 잔의 물로 수레의 불을 끄겠는가 하고 한탄함은 이미 청허 노사의 교화가 융성하던 그때도 있었거늘 하물며 오늘날일까 보냐 … 대개 미혹한 자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조종(祖宗)의 말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은 성인들의 높은 경계라고 밀쳐 버리고, 다만 현실적인 것에만 힘을 쓰는데 혹은 손에 염주를 잡으며 입으로 경을 외우고 혹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거나 그리고 공덕만을 바라니 보리(菩提)와는 틀렸고 도(道)에는 멀어짐이로다.”
- 「가야산 해인사 수선결사문」, 『경허집』
경허 스님이 지은 「결사문」에 보듯이 당시는 선풍(禪風)이 쇠퇴하고 염불하거나 경을 보고는 조사(祖師)의 가르침은 외면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선방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경허 스님이 조실로 추대되고는 선방도 수리하고 안거결제도 여법하게 다시 하면서 수선 결사를 해서 선풍을 진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사에는 젊은 한암 스님이 서기를 맡고 있었는데, 뒷날 오대산 월정사 조실로 추대되어 선원을 개설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조계종을 재건할 때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는 등 큰 역할을 합니다.
1899년 세기말에 해인사 동안거에서 결사를 추진한 경허 스님은 이후 김천 수도암, 통도사, 범어사,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실상사 백장암 등 영호남의 주요 사찰을 다니며 선원을 재건하고 안거 결제 전통을 복원하여 선풍을 다시 일어나게 합니다.
경허 스님이 이렇게 한 것은 큰 원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도성출입이 허용되자 당시 산중 스님들은 한양 가서 도성 구경하는 것이 큰 유행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날 누가 “큰스님께서는 도인이시고 목청도 좋으시니 이제 도성으로 가서 포교를 하시면 큰 성취가 있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하니 “내 평생 소원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하고 경허 스님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로 보아 스님은 치열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조선조 500년 동안 법난을 당하고 선풍이 쇠퇴한 것을 다시 세워 개화기와 근대를 준비하는 인재양성을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경허 스님의 문하에는 혜월, 수월, 만공, 한암, 제산 등 훌륭한 선사들이 배출되어 근현대에 수덕사, 마곡사, 용주사, 법주사, 금산사, 불국사, 월정사, 직지사 등이 문도 스님들이 운영하는 사찰이 됩니다.
용성(龍城, 1864~1940) 스님은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33인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가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스님은 출가하여 치열하게 참선하던 23세에 오도송을 읊었습니다.
1911년 용성 스님은 종로에 대각사를 창건하였는데, 참선 도량이자,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습니다. 스님은 3·1독립운동 참여로 감옥에서 3년 옥고를 치렀습니다. 용성 스님은 옥중에서 기독교의 찬송가와 한글 성경을 접하고 불교도 속히 경전의 한글화와 찬불가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출옥 후 역경불사와 불교의식의 한글화, 그리고 교단청정운동에 매진합니다.
1926년에 조선 승려들 사이에 대처와 식육이 확산되자 이를 바로잡고자 총독에게 두 차례 건백서를 내었습니다. 또한, 불교의 현대화와 더불어 선의 대중화에도 진력하였는데, 대각사에 처음으로 부인선원을 개설하고, 망월사에서 ‘활구참선만일결사회’를 조직하여 참선결사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아울러 선종의 선농일치(禪農一致) 정신을 실천하고자 만주의 용정에 대각교당, 하동에 화과원(華果院)을 건립하여 참선하며 농장을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용성 스님도 문하에 동산 스님, 동헌 스님, 고암 스님 등 훌륭한 제자들을 두었으며, 특히 동산 스님의 제자인 성철 스님은 용성 스님의 시자를 했습니다. 용성 스님의 문도 스님들이 운영하는 사찰은 범어사, 해인사, 화엄사, 쌍계사, 신흥사, 대각회(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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