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
조선시대의 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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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승 / 2015 년 3 월 [통권 제2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21회 / 댓글0건본문
「고경」에서는 ‘고우 스님의 화두 참선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고우 스님은 출가 후 평생 선원에서 정진해 오셨으며, 지금도 참선 대중화를 위해 진력하고 계십니다. 화두 참선의 의미와 방법, 그리고 효과에 이르기까지 고우 스님이 직접 경험한 내용을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 편집자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중심으로한 신진세력은 숭유억불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성계는 북한산 태고사에 건립된 태고 국사의 비문에 재가제자로 이름이 올라있을 정도로 독실한 불제자였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정치세력은 정도전 등 유학자들이었습니다. 소위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등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태종은 본격적으로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여 구산선문이 통합한 조계종과 화엄종, 천태종 등 7종만 두고 사찰도 대폭 축소한 뒤 나머지는 폐사시켰습니다.
무학과 함허 스님
이와 같이 어려운 시절에 간화선사인 무학과 함허 스님은 불법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한 분들입니다. 무학(無學, 1327~1405) 대사는 고려 말에서 조선 개국 당시에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어 크게 활약한 선사입니다. 대사는 어려서 유학과 천문지리를 공부하였고, 21세에 수선결사 도량 송광사로 가서 출가하였습니다.
그 뒤 용문산 등 제방에서 참선하다가 25세에 묘향산 금강굴에서 각고의 정진 끝에 오도송을 읊었습니다. 대사는 원나라로 가서 인가 받을 조사를 찾다가 나옹 대사를 만나 27세에 전법 인가를 받습니다. 29세에 귀국하여 오대산 등 전국을 유력하다 33세에 천성산 원효암에서 나옹 대사를 다시 만납니다. 그때 나옹 대사가 무학에게 당부한 글이 전해집니다.
“그대는 자기 본분을 이미 깨달았으니 대장부의 할 일이 끝났다 할지 모르나 이제는 국가와 창생을 위해 할 일이 더욱 크도다. 도인(道人)의 마음가짐이란 세상 사람과 다르니 선악(善惡),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으며, 인정과 의리에도 따르지 않고 말을 내고 입김을 뱉음에 날아오는 화살 칼로 받아치듯, 말과 뜻이 서로 합하기를 물에 물을 탄듯하여 한 입으로 주인이니 손님이니 하는 상대경계를 집어 삼키고 몸으로 불조(佛祖)의 관문을 투과하느니라.”
이 글에서도 보듯이 선과 악, 주인과 손님의 양변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이 부처와 조사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무학 대사는 나옹 대사를 모시고 함주로 가서 이성계의 부친묘지를 정해줍니다. 이것은 마치 도선 국사가 개성을 지나다 고려의 태조가 될 왕건의 탄생을 예언한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그 뒤에 무학 대사는 안변의 한 토굴에 머물 때 이성계가 찾아와 불난 집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오는 꿈을 해몽해 달라 하자, 그것은 왕(王)이 될 꿈이라며 이성계에게 혁명가의 용기를 불어넣었고 이성계는 대사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설봉산석왕사기』).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 이성계는 무학 대사를 왕사(王師)로 추대하였습니다. 대사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개국을 적극 후원하였고, 태고 국사가 공민왕에게 권한 것처럼 한양 천도를 도모하였습니다. 오늘날 왕십리(往十里)라는 전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학 대사는 한양 천도에 역할을 하고, 양주 회암사 등을 조선의 왕실사찰로 정하여 불교와 조선왕조를 가깝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 대사는 태조와 함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고, 몇 년 뒤 입적하게 됩니다. 무학 대사의 전법제자로는 함허 스님이 유명합니다.
함허(涵虛, 1376~1433)는 『금강경오가해설의』로 유명합니다. 충주에서 태어나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의 한계를 느끼고 무학 대사를 스승으로 출가했습니다. 회암사에서 정진하였고, 선풍을 크게 떨쳤으며, 세종이 명성을 듣고 어찰(御刹)인 대자사(大慈寺)로 모시어 법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강화도 정수사와 송광사, 대승사, 봉암사 등에서 교화하였으며, 『금강경』을 해설한 육조 등 오가(五家)의 풀이에 자신의 설의(說誼)를 더하여 『금강경오가해설의』를 펴냈는데, 선의 입장에서 『금강경』을 풀이한 뜻이 깊고 문장이 아름다워 강원의 교재로 채택되는 등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종에 이어 세조대에 왕의 귀의와 지원에 힘입어 불교가 일시 중흥했는데, 당시 활약한 이로 수미(守眉)와 삼화상으로 불리는 신미(信眉), 그의 제자들인 학조(學祖), 학열(學悅) 대사가 있습니다. 신미 대사는 세종의 신뢰를 받은 김수온의 친형으로 지혜와 인품이 훌륭하여 당시에 생불(生佛)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서산 대사의 활약과 법맥(法脈)의 계승
조선 연산군 대에 이르면, 선교양종으로 통합된 교단도 해체시키고 사찰도 일부만 두고 폐사시켰으며, 승려의 도성출입마저 금지시켜 불교는 산중으로 밀려나 사회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명종 대에 독실한 불자인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일시나마 불교 중흥의 기운이 일어났습니다. 문정왕후는 보우 대사를 중용하여 승과(僧科)고시를 부활시켰는데 서산, 사명과 같은 스님들이 이때 배출되었습니다
1592년 선조 대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유교국 조선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조선의 군대는 지리멸렬하여 17일 만에 왜적에게 한양을 내어주었습니다. 선조는 서산 대사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서산(西山, 1520~1604) 대사는 전국 산사에 궐기문을 돌려 의승을 모집하니 그 숫자가 5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서산, 사명, 영규 대사가 앞장선 의승군은 평양성 탈환과 행주산성, 청주성, 금산 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하여 의병과 함께 구국 활동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임란 의승 활동에 대하여 불살생(不殺生)을 지켜야 할 승려들이 파계(破戒)한 것이라는 비난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서산, 사명 대사의 전쟁 참여는 왜적의 침략으로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을 구하면서 왜병들이 살상의 악업을 더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보살행인 것입니다.
서산 대사는 조선조를 대표하는 선사(禪師)입니다. 대사는 태고–환암–구곡–벽계–벽송–부용–서산으로 이어지는 간화 법맥의 계승자이기도 합니다. 태고에서 시작된 간화 법맥은 사명, 편양, 소요, 정관 등 70여 명의 뛰어난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조선 후기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간화선
임진왜란 이후 불교는 의승군의 활약으로 조선 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에 조정은 불교 승려의 군사적인 활용 가치를 인정하면서 탄압의 강도가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정조 대에 이르러 불교 사찰 수는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정조는 화성을 쌓고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사찰인 용주사를 창건하고는 남, 북한 산성 수비를 총괄하는 도총섭을 두게 하여 팔도 사찰을 관리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사찰 승려들은 조정과 관아의 노역에 시달렸고, 지역 유생들의 박해가 극심해져 갔습니다. 각 사찰은 종이와 짚신 등 지역 특산물을 만들어 관아에 바치고 군역(軍役)까지 맡아야 했습니다. 출가자의 본분인 수행보다는 생존을 위한 온갖 잡역과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선풍(禪風)은 약해지고 선원(禪院)은 쇠락해져 갔습니다.
그나마 호남지역 표충사가 있던 대흥사와 선운사, 구암사 등에서 강맥이 전승되어 강원이 유지되었고, 백파와 초의 선사 사이에 선 논쟁이 일어나 선풍은 유지되었습니다. 백파(白坡, 1767~1852)는 고창에서 태어나 선운사로 출가하여 경을 공부하고 26세에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전 공부의 한계를 느끼고 선으로 전환합니다. 백파 선사는 임제선의 전통과 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1816년에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러자 초의(艸衣, 1786~1866) 선사는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지어 백파의 주장을 비판하였습니다. 초의는 대흥사 일지암에 주석하며 강진에 유배 와 있던 다산 정약용과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 김정희와도 깊이 교류하였습니다. 추사는 초의와 같은 입장에서 백파와 『선문수경』을 논박하는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으며, 백파의 입적 뒤에 비문을 써서 선문의 종장으로 예우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이르면, 불교에 심취하였던 추사의 영향으로 거사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흐름은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거사에게 이어져 개화당 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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