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서유기 ]
수렴동의 원숭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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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4 년 3 월 [통권 제131호] / / 작성일24-03-04 10:20 / 조회1,737회 / 댓글0건본문
세상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면 또 그 마음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한 원숭이들이 있었다.
나중에 손오공으로 불리게 되는 돌 원숭이는 화과산에서 원숭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원숭이들은 어느 날 계곡물에 목욕을 하다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물이 시작되는 근원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손에 손을 잡고 물길을 따라가던 그들의 앞에 폭포가 나타났다. 원숭이들은 내기를 한다. 폭포에 들어갔다가 다치지 않고 돌아오는 원숭이를 우리의 왕으로 삼자.
돌 원숭이가 자원하여 나섰다. 돌 원숭이는 눈을 감고 쪼그렸다가 몸을 던져 폭포 속으로 뛰어든다. 들어가 보니 물은 없고 번듯한 하나가 나타났다. 철판교 아래에서 솟아난 물이 돌 틈으로 흘러들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폭포처럼 떨어지면서 그것을 가리고 있던 것이었다.
철판교의 가운데를 지나며 살펴보니 그곳은 하나의 석굴이었는데 다리가 끝나는 지점의 정중앙에 화과산의 복된 땅[花果山福地], 수렴동 별세계[水簾洞洞天]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석굴 안에는 돌[石]로 된 돌 아궁이, 돌 부엌, 돌 그릇, 돌 화분, 돌 침대, 돌 의자 등의 천연으로 마련된 살림살이가 완비되어 있었다. 돌 원숭이는 원숭이들을 데리고 들어가 수렴동의 석굴에 왕국을 꾸리고 멋진 원숭이 왕[美猴王]으로 추대되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물의 근원 찾기
원숭이들은 물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 여기에서 물은 마음의 비유다. 물이 한 점에서 시작하여 흐름을 형성한 뒤 바다를 이루듯, 마음 또한 찰나의 일념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의식의 바다를 이룬다. 마음은 법계 만사만물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물의 근원을 찾아보자는 얘기는 마음의 근원, 세상의 뿌리를 탐구해 보자는 말이기도 하다.
근원을 알려면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물의 흐름에 떠밀려 가기는 쉬워도 거슬러 올라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손을 잡고 올라간다. 마음을 집중하여 모든 연기의 현장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밝은 눈을 키워가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므로 돌이켜 관조하기[反照]의 실천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그런 원숭이들의 앞에 폭포가 나타난다. 폭포는 하나로 연결된 흐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하나의 물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찰나에 생성하고 찰나에 소멸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앞의 생각 알갱이는 뒤의 생각 알갱이의 의지처가 된다. 그러니까 앞의 생각 알갱이가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탐색을 멈출 수도 있다. 초기불교에서 찰나 생멸의 의식으로 마음의 설명을 일차 완료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서유기』의 원숭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간단히 생각해 봐도 잠을 자거나 기절했을 때는 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니까 의식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될 수 없다. 더 깊은 뿌리가 있지 않을까? 삼장법사 현장이 전파한 유식에서는 모든 의식과 만물의 뿌리가 되는 아뢰야식을 제시한다. 이에 의하면 아뢰야식은 모든 의식의 근원이자 세계를 있게 하는 근본이다. “현상계의 모든 것이 오로지 아뢰야식[萬法唯識]”이라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종자種子→현행現行→종자→현행’의 상호 인과관계를 맺으며 항상 유동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폭포의 흐름[瀑流]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폭포에 뛰어들기
아뢰야식은 분별적 의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아뢰야식을 파악하려면 먼저 분별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데 실천의 측면에 있어서나 존재적 결단의 측면에 있어서나 그게 만만치 않다. 분별을 멈추고 선정을 성취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분별적 삶의 방식을 내려놓는 존재적 결단 또한 쉽지 않다는 뜻이다. 분별을 내려놓으면 그게 곧 죽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뢰야식의 차원은 번뇌가 없다는 점[無覆]에서 수행에 방해가 되지는 않지만, 명확한 알아차림이 없이 멍청하다는 점[無記]에서 흑암굴, 혹은 죽음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내기를 한다. 누가 폭포에 들어갔다가 다치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폭포의 속은 그 내막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불가사의의 세계이고, 폭포의 밖은 각각의 차별상이 분명한 분별의 세계다. 분별의 세계를 떠나 무분별을 체험하고 다시 분별의 세계로 돌아오는 길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을 체험하고 이 세계에 돌아와 그것을 말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과 같다.
그런데 돌 원숭이가 이에 응답한다. “내가 들어가 보겠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쪼그렸다가 몸을 던져 폭포 속으로 뛰어든다. 두 눈을 감는 것은 둘로 나누기를 멈추었다는 뜻이다. 쪼그렸다는 것은 자아를 항복시켰다는 뜻이다. 폭포 속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스스로 그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마음을 관찰한다고 할 때에도 관찰 주체로서의 마음과 관찰 대상으로서의 마음이 설정된다. 여전히 주체와 대상이 나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몸소 그것이 되어 직관하는 입장[同體大智]이 되어야 한다. 돌 원숭이는 눈 감기(분별 멈추기)와 쪼그려 앉기(자아 내려놓기)와 뛰어들기(스스로 그것이 되기)의 실천을 통해 그것을 성취한다.
분별의 두 눈을 감으면 무분별의 한 눈이 뜨인다. 자아를 내려놓으면 연기緣起가 보인다. 스스로 뛰어들면 중도가 확인된다. 돌 원숭이가 폭포에 뛰어들자 그 일이 일어났다. 돌 원숭이가 폭포에 뛰어들어가 보니 폭포는 없고 하나의 철판교가 걸린 동굴이 나타났다. 그 동굴은 철판교 아래에서 솟아나는 물, 철판교, 돌 가구들이 갖추어진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먼저 철판교 아래에서 솟아나는 물이 있다. 밖에서 폭포처럼 보였던 것은 이 철판교 아래의 물이 바위의 틈에 흘러 들어가 분수처럼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였다. 그것이 폭포처럼 떨어지면서 동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은 본래 비어 있는 것이다. 6식은 물론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이 모두 실체가 없다. 다만 무명의 샘물이 시도 때도 없이 솟아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근원이 되는 마음에 실체가 없으므로 그것을 뿌리로 하는 자아와 세계 또한 실체가 없이 공하다. 그래서 돌원숭이는 외친다. “물은 없다!”
철판교 건너기
비어 있으므로 동굴이다. 여기에서 동굴의 동洞은 비어 있다[空]는 뜻이다. 그런데 『서유기』의 동굴은 비어 있는 동시에 가득 차 있다. 동굴이 비어 있기만 했다면 돌 원숭이가 바깥의 원숭이들을 동굴 속으로 초대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돌 동굴에는 원숭이들을 안주시킬 돌 솥, 돌 아궁이, 돌 사발, 돌 화분, 돌 침대, 돌 의자의 살림살이들이 천연적으로 차려져 있었다.
이곳에 가려면 철판교를 건너야 한다. 돌 원숭이는 철판교의 가운데를 걸어간 끝에 다리가 끝나는 지점의 정중앙에서 돌 비석을 발견한다. 비석에는 화과산의 복된 땅[花果山福地], 수렴동의 별세계[水簾洞洞天]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서 철판교는 중도 실천의 안전성과 견고성을 상징하는 장치다. 중도를 실천하는 길이므로 원숭이는 다리의 가운데를 걷는다.
철판교의 가운데는 다리의 좌우,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는 지점이다. 생성과 소멸[生滅], 영원과 허무[常斷], 같음과 다름一異], 오고 감[來去]의 두 측면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거나 지향하지 않는 중도의 길을 걷는다는 얘기다. 그렇게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을 걷다 보면 필연적으로 중도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 하필이면 다리가 끝나는 지점의 정중앙에 돌 비석이 세워져 있어야 하는 이유다. 비석이 말하는 것처럼 중도는 꽃과 열매가 동시에 성립하는(화과산) 복된 자리(복지)이고, 분별이 사라져(수렴동) 세계 속에 숨은 세계(동천)를 보는 자리다.
그중 철판교는 분별의 폭포와 무분별의 동굴을 연결하는 다리다. 그것은 반드시 가운데를 걸어야 하고 가운데로 도착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는 일을 묘사하면서 과정의 가운데, 결과의 가운데를 강조한 이유다. 용수가 설파한 것처럼 둘로 나누는 분별 자체가 허망하다. 만법에 실체가 없어 세계는 오로지 연기일 뿐이다. 연기공을 내용으로 하는 중도의 실천은 무분별심으로서의 진여에 직접 도달하도록 이끈다. 그런 점에서 공은 실체의 없음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참된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공=무분별=진여다. 돌 원숭이가 철판교 가운데를 걸어 정중앙에 도착하여 돌 살림살이가 완비된 돌 동굴을 발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 동굴에 들어가기
돌 원숭이가 철판교를 건너서 만나는 수렴동의 돌 동굴과 돌 가구들은 숨겨진 부처, 여래장을 말하기 위한 장치다. 먼저 수렴동, 즉 폭포 커튼[水簾] 동굴[洞]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분별과 무분별의 불이적 결합을 의미한다. 무분별 실천의 도착점인 동굴은 온갖 가구들이 감추어져 있다[藏]는 점에서 여래의 창고[如來藏]의 상징이 된다. 돌 원숭이가 돌 동굴에 들어가는 것은 모태 속으로 회귀하는 일과 같다. 그렇게 돌 원숭이는 분별의 폭포를 뚫고 들어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 본래 부처를 발견한 것이다.
『서유기』의 상징체계로 볼 때 수렴동의 돌 가구들은 적어도 몇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우선 돌은 견고하다. 그래서 늘거나 줄지 않는다. 다음으로 돌 석石 자는 옛날 석昔 자와 통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또한 돌[石]은 부처[釋]와 발음이 같아서 뜻이 통한다. 세월을 벗어나 증감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며, 생멸을 벗어나 있는 돌의 특성이 부처에 대한 정의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살림살이가 다 돌[石=釋]인 것이다.
다음으로 돌 가구들은 무분별 속의 분별을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당장 돌 동굴이라는 세계에서 돌 원숭이라는 주체가 돌 가구라는 대상을 쓰며 살아간다. 세계와 나, 주체와 대상이 모두 돌이라는 점에서 둘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돌 가구가 완비된 동굴은 일진법계이고, 돌 원숭이는 여래장 자성청정심이다. 돌 원숭이가 돌 동굴에 진입하는 순간, 진리 그 자체와 수행자의 마음이 둘 아닌 관계로 융합된다. 돌 동굴에 완벽하게 갖추어진 돌 가구들이 상징하는 바가 그것이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과 깨달음의 약도에 따르자면 돌 원숭이는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다. 출발과 동시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처음 발심하는 그때 무상정등각을 성취한다[初發心時便正覺]’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원칙적으로 『서유기』의 얘기는 여기에서 끝나야 한다. 그런데 초발심에 정각을 성취한다고 하지만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로 깨달음의 여정을 걸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당장 초발심의 깨달음을 말하는 화엄에서도 그 뒤의 길고 긴 여정(10주, 10행, 10회향, 10지)을 제시한다.
아름다운 원숭이 왕의 여행
축복의 땅 수렴동을 발견한 돌 원숭이가 당장 그랬다. 그는 원숭이들의 왕으로 추대되어 동굴 속에 머문다. 세월의 기운을 벗어난 동굴의 속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 원숭이는 왕위에 오르면서 그 이름에서 돌 석石 자를 빼고 아름다울 미美 자를 붙여 아름다운 원숭이 왕[美猴王]으로 불리게 된다.
이로 인해 작지만 본질적인 균열이 일어난다. 동굴의 안과 밖을 나누어 안전한 동굴의 안을 집착하고(법집), 아름다움과 추함을 나누어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규정하는(아집)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선과 악도 생겨났다. 낙원을 상실하는 실락원의 사건이 손오공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원숭이 왕은 죽지 않는 길, 낙원 복귀의 길을 찾는다. 왕의 참모들이 말한다. “대왕께서 죽음을 해결하고자 하시니 참으로 도를 구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에 돌 원숭이는 아름다운 원숭이 왕의 지위를 내려놓고 안전한 동굴의 안에서 나와 죽지 않는 길을 찾는 여정에 들어간다. 그것은 이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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