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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큰스님은 작품의 대상 아닌 시대의 참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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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11 월 [통권 제1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84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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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철(인타, 因陀) 조각가 

 

 


 

 

일교차가 커질수록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또 알록달록한 옷들이 단풍과 어울려 전국의 산을 수놓을수록 가을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일이었지만 고속도로에는 행락객들을 실은 대형버스들이 적지 않았다. 휴게소에서 만난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들뜬 표정이다. 지인들과 함께 가는 나들이니만큼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차를 달린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었지만 산청 겁외사 앞에는 대형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성철 스님 생가와 절을 둘러본 후 사람들은 성철 스님 기념관으로 몰려간다. 막 문을 열었지만 벌써부터 입소문이 나면서 기념관은 산청의 또 다른 명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념관에 들어선 사람들은 지금까지 다른 절에서 볼 수 없었던 석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얀 대리석으로 표현된 성철 스님 설법상과 작은 굴에 앉아 참선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금동석가모니불, 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 미륵불…….

 

사람들은 참배도 참배지만 ‘작품’과도 같은 다양한 부처님들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다.
한 참배객은 “표정이 살아있는 성철 스님의 모습도 좋고 또 여러 부처님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더 좋다.”고 하면서 “성불문(成佛門) 양쪽에 있는 성철 스님의 법어 ‘참선수행자에게 내린 경책글’과 ‘공부인에게 주는 글’도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며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간다.

 

“수행이란 안으로는 가난을 배우고 밖으로는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좋고 영광스러운 것은 항상 남에게 미루고 남부끄럽고 욕되는 것은 내게 돌리는 것이 공부 가운데 가장 큰 공부이며 수행자의 행동이다……."

 

석굴형 기념관, 자기 수행의 공간

 

기념관이 완공될 수 있었던 것은 겁외사 회주 원택 스님의 기획력과 겁외사 주지 원암 스님의 추진력, 그리고 실무를 진행한 조각가 강대철 선생님의 정성이 더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 만사를 제쳐놓고 불사에 동참한 불자들의 신심(信心)도 빼놓을 수 없다.

 

기념관 불사뿐만 아니라 백련암 고심원 성철 스님 좌상(坐像)과 겁외사 마당의 성철 스님 입상(立像), 그리고 기념관의 성철 스님 설법상(說法像)을 조성한 강대철(인타, 因陀) 선생님을 만났다. 강 선생님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참배객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기념관을 참배하고 있는 원택 스님과 강대철 선생님 

 

“기념관 불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원택 스님께서 ‘석굴’을 테마로 일을 진행하자고 하셨습니다. ‘굴’이라는 것이 자기를 성찰하고 수행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잖아요. 또 어떻게 보면 어머니 뱃속에서처럼 ‘자기’가 잉태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념관 전체를 굴의 이미지를 연결시켜서 사람들이 수행하고 정진하는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했습니다.”

 

강 선생님은 여러 종류의 부처님을 직접 빚은 것은 물론 비로자나 부처님, 과거 연등불·현세 석가모니불·미래 미륵불 등 삼세 부처님, 관세음보살상, 보현보살상, 금강역사 등도 제작했다.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처음에는 2년 정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좀 더 걸렸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1000일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며 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더니 어려운 것
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하.”

 

강 선생님은 4,000개가 넘는 부처님 한 분 한 분을 도자기를 굽듯이 제작했다. 1200~1300도의 불에서 굽고 다시 마무리 손질을 더해 지금과 같은 부처님들을 탄생시켰다. 각 부처님들은 4가지 색깔로 태어났다. 유약도 바르지 않았다. 유약을 바르면 번들번들해져 살아있는 표정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강 선생님은 이 부처님들이 모두 경전(經典)과 같다고 강조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여러 의미를 가진 부처님들이 계시잖아요. 부처님의 사상을 아울러서 표현하기 위해 여러 부처님들을 모셨습니다. 그야말로 기념관은 통불교(通佛敎)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역사 역시 괴팍하게 생긴 괴물형상이 아니라 사람의 인체 비율에 맞게 만들었다. 강 선생님은 “기념관은 성철 큰스님이라고 하는 우리 시대 선지식(善知識)의 메시지가 응축되어 있는 장소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또 하나의 성지(聖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금동석가모니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강대철 선생님 

 

성철 스님 설법상이 석굴 중앙에 모셔진 것에 대해서도 강 선생님은 “할 말이 많다.”며 운을 뗐다.
“성철 큰스님은 우리 시대의 부처님 대변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법상을 중심에 놓고 삼세 부처님을 뒤로 모셨습니다. 대변자가 대중 앞에 나서서 법(法)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지극히 옳지 못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강대철 선생님은 기념관 불사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성철 스님 관련 일을 해왔다. 성철 스님과 강대철 선생님은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조각가로서 비교적 이른 나이인 30대 초반에 여러 작품을 통해 데뷔를 했고, 10여 차례가 넘는 전시회도 진행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제 작품의 골간에는 ‘생명’이 있었어요. 어찌 보면 불교적 가치관과도 맥이 닿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정신적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큰스님께서 열반하셨습니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당시 언론을 통해 큰스님의 전설과도 같은 정진 일화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보도를 보면서 대단한 도인이 저와 동시대에 계셨다는 것을 느꼈어요. 영결식과 다비식에는 가지 못했지만 큰스님 사리친견 법회에는 직접 참석했습니다. 사리를 친견하니 큰스님의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철 스님 문도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성철 스님 좌상을 조성하자고 말입니다.”

 


고심원에 모셔진 성철스님 좌상 

 

그렇게 성철 스님과 강 선생님의 인연은 운명처럼 이어졌다. 명상에 심취해 있던 강 선생님은 막연하게나마 ‘이 시대의 구도자상’을 만들어볼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성철 스님이라고 하는 구도자의 상을 만들 수 있는 인연이 주어진 것이다.

 

“성철 큰스님은 조각가 입장에서 보면 표현하기 좋은 모습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 일반인이 갖고 있지 않은 모습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꿈을 많이 꾸는 편은 아닙니다만, 스님 좌상을 만들면서는 비슷한 내용의 꿈을 몇 번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오색영롱한 큰스님의 사리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뿌려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알갱이가 흩어져 있다가 느닷없이 축구공만 하게 커지면서 사방천지로 굴러다녀 이를 본 사람들은 놀라 도망쳤습니다. 또 어느 날은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는 머리 위에서 사리들이 빛살처럼 뻗치며 백회를 통해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곤 했습니다.”

 


겁외사에 모셔진 성철 스님 입상 

 

강 선생님은 좌상 작업을 할 때 매일 아침마다 108배를 올렸다. 108배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 좌상은 백련암 고심원에 모셔져 있다. 1995년의 일이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성철 스님 생가터에 겁외사가 만들어졌다. 절 중앙 마당에 모실 입상 작업 또한 강대철 선생님이 진행했다. 겁외사가 문을 연 뒤 2002년에 입상을 세웠다.

 

“저는 성철 큰스님의 평소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는데, 여러 분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조성했습니다. 겁외사를 찾는 불자들이 큰스님께 정성껏 참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저 역시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강 선생님이 세 번째로 조성한 것이 현재의 기념관 설법상이다. 당시 강 선생님은 대리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카라라를 오가며 다른 조형물 작업을 하고 있었다. 카라라는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소도시지만 양질의 대리석이 생산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다.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산 전체가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채석장과 같다.


“조각가가 좋은 재료를 만나면 작품의 반 이상은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저 역시 좋은 재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처음에 제가 원했던 것은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과 피에타상을 만들 때 썼던 스타토아리아라는 대리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찾아가는 채석장의 관계자들마다 그 대리석을 쉽게 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있더라도 제가 원하는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스타토아리아에 가까운 비앙카 대리석을 구했습니다.”

 

원했던 대리석은 아니었지만 양질의 돌을 구해 지금의 설법상을 조성했다. 2004년 완성된 설법상은 산청 길상선사에 모셔져 있다가 2012년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특별전시회에서 대중들에게 선을 보여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대리석은 돌 자체가 고급스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고 또 섬세함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입니다. 큰스님의 표정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자평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생겼다. 세 가지 성철 스님 상을 보면 얼굴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왜 다른지가 궁금해졌다.

 


성철스님기념관에 모셔진 설법상 

 

“사람들의 얼굴도 매일 변합니다. 또 동상은 조명이나 날씨에 따라 천차만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철 스님 상을 조성하면서 저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성철 큰스님은 단순한 작품의 대상이 아니라 저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내려주시는 스승이 되어주셨습니다. 스승을 모신다는 마음으로 조성하다 보니 더 실재에 가깝게 조금씩 달라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 큰스님의 유지 계승하는 것”

 

강대철 선생님은 20여 년간 일을 해오면서 단순히 작업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강 선생님이 생각하는 성철 스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

 

“겁외사 마당에 비(碑)로 조성돼 있기도 합니다만, 한마디로 ‘자기를 바로 보라’는 것이 큰스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씀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다 녹아들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이 시공(時空)에 있는지, 있는 그대로 자기를 바로 볼 줄 알면 다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큰스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이미 불성(佛性)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니까 헤매고 다른 곳에 기웃거리게 됩니다.
진리는 이와 같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복잡할수록 진실과는 멀어져요. 다른 것에 현혹돼 핵심을 못 볼 때가 많습니다. 그냥 바로 보면 됩니다. 예전에는 몰랐었는데, 요즘 들어 큰 스님의 이 말씀이 슬슬 실감되고 있습니다. 하하.”

 


성철 스님의 자기를 바로 봅시다 법어를 읽고 있는 강대철 선생님 

 

강 선생님은 ‘다소 거칠었다’는 성철 스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말을 덧붙였다.
“사람마다 캐릭터는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다르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상(像)을 만들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성철 큰스님께서는 열정과 의지력, 에너지가 대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을 그렇게 오로지 깨달음을 위해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자세로 사셨다고 봅니다. 이 에너지는 특히나 공부하는 제자들에게는 호된 경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측면을 보면 큰스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나 공부하는 재가자들에게는 또 그렇게 다정다감하셨어요.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큰스님의 상반된 모습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큰스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응병여약(應病與藥)의 모습으로 사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강 선생님은 10여 년 전 귀촌해 현재 전남 장흥에 조그만 토굴을 마련해 살고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 발 비켜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또 세상을 바로 보고 싶어서다. 강 선생님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졌다.
“일단 내년 봄 정식 개관 때까지 기념관 일을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조성된 부처님들을 다시 점검하고 마당을 정비해 기념관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힘을 보태려고 합니다. 또 제가 곧 70
이 되긴 하지만 아직은 건강하니까 인연되는 대로 작품도 하고 시간이 나면 글도 쓰면서 끊임없이 성찰하는 삶을 살아갈 생각입니다.”

 

강 선생님은 흡사 도인(道人) 같기도 하고 또 예술가 같기도 했다. 아니 두 모습을 다 갖추고 있었다. 도인의 직관(直觀)과 예술가의 감성(感性)이 합쳐져 기념관 불사가 원만하게 이뤄졌다는 생각을 해본다.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묵묵히 자신만의 외길을 걷고 있는 강대철 선생님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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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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