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성철]
“백련암은 나의 ‘안정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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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2 월 [통권 제10호] / / 작성일20-05-29 14:16 / 조회7,181회 / 댓글0건본문
부산 장금선원 주지 원여 스님
필자가 처음 백련불교문화재단 일을 시작했을 때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던 한 스님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법명이 확실하게는 생각나지 않는다. 성철 큰스님 상좌니 원O 스님이겠지. 그 스님은 참 열심히 살았던 스님이야. 중앙승가대에 다닐 때 매일 1000배 이상 절을 하고 화장실 청소 등 궂은 일을 당신이 솔선해서 했었어. 법랍도 높아 학인스님들 사이에서는 ‘승가대 모범’이라고 불렸어. 백련암에 가면 그 스님이 누군지 확인부터 해봐라.”
부탁을 한 스님은 중앙승가대 ‘92학번’이었다. 성철 스님 제자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스님의 부탁을 바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승가대 모범’이 누구인지 조금씩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원여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스님이 산청 겁외사 주지를 할 때였다. 잠깐 인사를 드려서인지 그리 많은 말씀을 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되면 예불에 빠지지 않았고, 요사채와 대웅전을 오갈 때면 항상 성철 스님 동상 앞에 서서 예를 갖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겁외사 주지 당시 스승에게 예를 올리는 원여 스님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부산으로 향했다. 장금선원(長今禪院)에 주석하고 있는 원여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장금선원
장금선원은 부산 도심에서는 다소 떨어진 구포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2층짜리 주택을 개조한 형태다. 1층은 법당과 공양실, 2층은 요사채가 전부인 곳이다. 마침 법당이 비어 있어 스님과 마주 앉았다. 평소 차를 즐기지 않는 스님이 손수 차까지 내주었다.
먼저 원여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절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스님이 “삼배의 예를 갖추니 저도 부처님 말씀 한 구절로 답례를 하겠습니다.”며 『법구경』의 한 부분을 읊기 시작한다.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둑카(duhkha, 苦)가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행복이 뒤따른다.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떠나지 않듯이.”
신도들에게도 자주 읊어주는 구절이라고 했다. 스님은“기본적으로 『법구경』과 『숫타니파타』, 『부처님 일대기』를 꼭 읽어 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장금선원 전경
마치 덕담을 들은 듯 기분 좋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먼저 가장 궁금했던 질문부터 꺼냈다. ‘장금’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금강경오가해』의 함허 스님 서(序)와 해인사 일주문에 걸린 주련을 보면 ‘歷千劫…而不古亘萬歲而長今(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천겁의 세월이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쳐도 항상 지금이다’는 말입니다. ‘오늘’또는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사람들이 되자는 뜻으로 제가 지었습니다.”
사실 장금선원의 시초는 ‘장금회’에서 시작됐다. 스님이 산청 겁외사 주지를 하던 당시 60여 명의 부산 불자들이 모임을 만들어 원여 스님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나온 이름이 ‘장금회’였다.
“부탁을 받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그 글귀가 딱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2010년 1월에 장금회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부산 불자들이 정기적으로 겁외사에 와서 기도도 하고 정진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산에서는 모임을 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어요. 그러다 모임의 근본도량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회원들이 마음을 모아 장금선원을 개원했습니다.”
2011년 7월 1일의 일이다.
스님은 겁외사 주지 소임을 마친 2013년 여름부터 장금선원에서 신도들을 제접하고 있다.
“제가 어디에 들어가면 잘 나오는 성격이 아닙니다. 출가이후 쭉 그랬습니다. 여기서도 새벽, 사시, 저녁예불 하고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스님은 장금선원에서 삼천배(매월 넷째주 토요일)와 능엄주 독송(매월 둘째주 토요일), 광명진언 53독(매월 넷째주 일요일), 아비라기도 등의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매주 일요일 일요법회와 음력 초하루, 보름법회도 꾸준하게 열고 있다.
“백련암에서 아비라기도를 할 때 현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여기서도 기도를 합니다. 백련암에서는 3박 4일간 하지만 저희는 사정상 4박 5일 ‘출퇴근’일정으로 총 24번을 합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어서 저는 그냥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장금선원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원여 스님의 출가인연, 성철 스님과의 만남 등으로 화제를 돌렸다. 원여 스님의 출가는 다른 스님들의 그것과는 좀 달랐다.
장금선원 입구에 선 원여 스님
삶의 존재 방식, 출가
“출가 전에 교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사를 한 기간이 1년이 채 못 됩니다. 사회에서 사는 것이 좀처럼 적응이 안됐어요. 교사를 할 때도 절에서 출퇴근을 했지만 모든 것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살 길을 찾아 출가를 했습니다. 정말 생존을 위해 나선 것입니다. 하하.”
스님은 교사 생활을 하기 전 임용 대기상태로 2년 여를 보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속가 어머니가 “너는 무슨 생각이 그리 많냐?”고 꾸중할 정도였다. 대학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한 경험으로 태백산 정암사와 영축산 통도사 등의 절에 다니며 몸과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대기상태 시기에 민간요법으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 상태가 호전된 뒤 교사로 임용이 되긴 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해인사가 떠올랐다. 우연히 보던 책에서 해인사 풍경과 스님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해인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해인사로 갔어요. 큰절로 가지 않고 지족암을 거쳐서 백련암으로 갔습니다. 사실 거기에 성철 큰스님이 계신지도 모르고 올라갔습니다. 하하.”
원여 스님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한’출가를 했던 셈이다.
“본능적으로 제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절로 향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절에 오기 전에는 그렇게 심신이 피곤하더니 절 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5월, 28살에 그렇게 원여 스님은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백련암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스님은 다른 사형(師兄)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스님은 다짐했다. “여기서 무조건 참아내고 견디자. 이곳이 나의 안정처다. 바깥으로 나가면 위험하고 불안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백련암에 있어야 한다.”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은사 성철 스님은 원여 스님에게도 무척이나 어려운 존재였다. 그렇지만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큰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사형스님과 달리 공부가 잘 안됐어요. 일본어 익히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시간이 될 때마다 절을 했습니다.” 행자 때부터 시작한 절 수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백련암 마당에서 자리를 함께 한 성철 스님 제자들. 앞줄 맨 오른쪽이 원여 스님이다
행자생활을 시작한 뒤 공양주를 하고 또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눈코 뜰 새 없는 생활을 이어갔지만 가슴 한편에는 어머니가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쉽게 안정을 찾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큰스님께 공양을 올리려고 방에 들어가 상을 놓는데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 어매한테 가지 뭐할라고 여기 있노?’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듯 했어요. 평소 큰스님과 자주 말씀을 나누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제 마음을 알아보시고는 경책을 내려주신 거죠. 그 후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원여 스님은 “큰스님께서 보시기에 저는 무척 답답한 제자였을 것이다. 말귀도 못 알아듣고 행동도 빠르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살 곳은 여기뿐’이라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소 평범한(?) 백련암 생활을 하던 원여 스님에게 기억이 남는 일화 하나. 하루는 성철 스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던 성철 스님은 제자들에게 두 개 조로 나누어 ‘소풍’을 다녀오라고 했다. ‘특별휴가’를 내린 것이다. 원여 스님은 1조가 되어 사제스님들과 함께 삼천포를 거쳐 남해까지 다녀왔다. 해가 저물도록 ‘신나는 소풍’을 만끽했다. 그런데 놓친 것이 있었다. 백련암에 ‘보고’를 하지 못한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백련암에 들어가지 못하면 이를 알렸어야 하는데 아무런 보고도 없이 노는 데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늦은 밤 백련암에 돌아왔지만, 분위기는 소풍이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연히 2조는 소풍을 가지 못했다. 사형스님들이 주축이 된 2조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 자아 완성의 핵심 있어
군 복무기간을 포함 12년 가까이 백련암에만 있었던 원여 스님은 경전 공부를 하고 싶어 서울로 왔다. 정안정사에 잠시 머물던 스님은 주변의 권유로 1993년에 중앙승가대에 입학했다.
스님은 백련암에서처럼 승가대 입학 이후에는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앞서 밝힌 것처럼 스님은 매일 절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만 나면 개운사 법당에 가서 절을 했습니다. 학기 중에는 보통 1000배, 방학 때는 3000도 해 평균 하루 1000배를 했습니다. 또 동료스님들이 이것저것 부탁을 하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냥 했어요. 제가 시간이 많았거든요. 하하. 그랬던 것이 아마 엉뚱하게 소문난 것 같습니다. 백련암에서부터 그랬지만 절은 제 생활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앙승가대를 졸업하고는 해인사 율원에 가서 2년 더 공부를 했다. 그리고는 송광사 국제선원에 방부를 들였다. 스님의 유일한 안거 경력이다. 그 후에는 부산 정수사를 맡아 10년 정도 살았다. 당시 스님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무료공양을 실시해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제가 가기 전부터 정수사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무료국수공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에 매일 매일 했죠. 처음에는 조금 벅차기도 했는데 하면 할수록 신이 나서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무료공양이 한창일 때는 최대 400명까지 정수사에 왔다고 한다. 정수사 규모를 생각하면 엄청난 인원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정수사에는 자원봉사조직이 구성됐고, 또 보시금 모연도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스님은 남는 재정을 인근 초등학교와 부산 중구청에 전달해 의미 있게 사용되도록 했다.
“저는 한 것이 없고 신도님들이 마음을 내주셔서 무료공양을 잘 했습니다. 특히나 송광사 방장 보성 큰스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신심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원여 스님이 구족계를 수지하고 사형스님들과 함께 한 모습. 맨 오른쪽이 원여 스님
그 후 2009년부터는 산청 겁외사 주지를 맡았다. 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어려웠던 겁외사 살림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백련암에 있을 때는 큰스님을 잘 모시지 못했는데 겁외사 소임을 맡은 것이 그나마 큰스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몇 년 살다보니 들었던 생각이 겁외사는 백련문도와 불자들의 종합연수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스님 생가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찰들에 비해 공간이 있으니 백련불자들이 언제든 와서 공부하는 곳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성철 스님의 가르침 중 불자들이 가슴에 새겼으면 하는 것으로 종정유시이기도 한 ‘지계청정(持戒淸淨)’, ‘화합애경(和合愛敬)’, ‘이익중생(利益衆生)’을 꼽았다. 또 법문으로는 견성즉불과 보현행원을 추천했다.
“불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견성즉불을 ‘자기를 바로 봅시다’로, 보현행원을‘오직 일체중생을 위해 산다’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 ‘자기를 바로 봅시다’가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자들이 실천수행으로 일과 수행이 이루어져야겠고 보시와 봉사의 생활태도가 몸에 익어야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모두가 불성자각(佛性自覺)의 삶을 살면 자아완성이 이루어진다 하겠습니다.”
스님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승려로서의 틀이 백련암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 은혜를 잊지 않도록 앞으로도 열심히 살겠다.” 차분한 말 속에서 힘이 느껴졌다. 스님이 주석했던 다른 사찰들처럼 장금선원이 또 어떻게 그 존재감을 드러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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