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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석 그늘 아래 ]
길(출가)은 다시 미국 포교로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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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스님  /  2024 년 2 월 [통권 제130호]  /     /  작성일24-02-05 14:30  /   조회1,88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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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 생각해 보면, 원택스님 덕분에 나는 행자생활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다. 처음 백련암에 왔을 때 원택스님은 본인이 일상생활에서 겪은 여러 실수한 경험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의 백련암 행자생활에 선행 학습이 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큰스님 특유의 빠르고 억센 사투리 때문에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데에서 생기는 어려움이나, 농촌 생활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겪는 어려움 등은 없었다. 

 

행자시절 회상

 

특히 원택스님이 행자생활 중에 꾸었다는 꿈 이야기는 매우 기억에 남는다. 너무 자주 큰스님께 꾸중을 듣다 보니 대중스님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일이면 하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 밤 꿈에 여러 큰스님들과 함께 임제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나타나서 ‘참고 잘 지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 날 큰스님께서 불쑥 물으셨다고 한다. 

 

사진 1. 은사 성철 큰스님과 사형인 원융, 원택스님과 함께 나선 포행길(왼쪽 두 번째).

 

“오늘 내려가려고 하나?”

“아닙니다!”

내 행자시절에 원택스님은 원주 소임을 보고 있어서 내 소임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소임에 대한 시범도 보여주었다. 제사에 올리는 진수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밥이 누룽지가 되는 이야기, 밥에 돌이 들어간 이야기, 약밥을 만드는 이야기, 밥솥에 떡을 찌는 이야기 등등, 들을수록 재미도 있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원택스님은 인근 지역으로 자주 장을 보러 나갔다. 특히 기도가 있거나 제사가 있을 때는 사 오는 물품들이 무척 많았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와서 종점에 있는 가겟집에서 전화를 하면 그 짐들을 가지러 손전등을 들고 내려가곤 했다.

 

사진 2. 사형 원택스님과 함께.

 

훗날 동국대학교에 진학하니, 교수님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 있었다. 대학원 진학하는 것을 종정스님께서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이었다. 큰스님들은 상좌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나는 학교 다니는 비용을 백련암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원택스님 덕분에 큰스님께서 대학원 진학을 허락하신 것이다. 또 훗날 미국에 갈 때에도 큰스님께서는 원택스님에게 내 나이를 물어보시고는 “어서 갔다 와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선문정로』와 선림고경총서

 

『선문정로』를 출판한 이후 이 책을 널리 배포하기 위해 전국 각 선원은 물론 대학 도서관 등에 발송하는 작업을 백련암에서 했다. 또 소문을 듣고 책을 얻기 위해 백련암까지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서점에서 책을 팔자는 제안을 원택스님에게 했다. 그래야만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손쉽게 구해 볼 수 있고, 출판에 필요한 비용이 마련됨으로써 출판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스님들의 법문집을 서점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이전에는 법정스님 등의 수필집 종류만 팔고 있었다. 

 

원택스님이 중심이 되어 《선림고경총서》를 발간하게 되었다. 나는 정심사에서 번역과 윤문에 동참한 보문 송찬우, 이창섭 옹, 신규탁, 이인혜 등과 함께 원고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정리된 원고는 동국대학교 앞에 있는 불지사에서 출판을 전담했다. 그 출판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서 회원제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 출판은 비용도 많이 필요하고, 또 장기간 지속되어야 하는 불사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불사는 5년 간 지속되었다. 이때 함께 일했던 분들 가운덴 지금도 불교 출판이나 재단 등에서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다.

 

 

《선림고경총서》 출판뿐만 아니라 큰스님의 법문집인 『선문정로』, 『본지풍광』, 『자기를 바로 봅시다』 등을 지속적으로 출판하고 또 선불교의 선양사업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충분하고 안정적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단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스님들이 건의를 드렸고 큰스님께서도 그 뜻을 인정해 주셔서 백련불교문화재단이 설립되고, 부설로서 성철선사상연구원(현 성철사상연구원)이 설립되었다. 

 

목정배(1937~2014) 교수님이 첫 연구원장 소임을 맡았고, 매년 《백련불교논집》을 출간했다. 목 교수님은 학부 재학 시절에도 큰스님께 가르침을 배우러 백련암에 다녔다고 한다. 훗날 『선문정로』에 대한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특히 “오매일여라 함은 ‘자나깨나 불조심佛照心’”이라는 선생님의 해석은 지금도 매우 명쾌하게 다가온다. 또 큰스님 열반 후엔 사리에 대하여 노랫말을 만들고 이 가사에 박범훈 선생이 곡을 붙여 <사리여>라는 노래도 발표하였고, 불법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찬불가를 만들어 보급하는 일에도 큰 공헌을 했다. 

 

《선림고경총서》의 전집 출판을 마무리하면서 1993년 10월 7일부터 9일까지 백련불교문화재단이 중심이 되어 <선종사에 있어서 돈오돈수 사상의 위상과 의의>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나는 이 학술대회에 박성배 교수를 초청하고 싶었다. 박 교수님은 수년 전 송광사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고, 나는 그 학술회의에 참석해서 교수님의 발표를 들었다. 큰스님께서 정심사에 계실 때 “박 교수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냐?”고 물으셨다. “깨달음에 대해서는 『선문정로』의 주장이 맞고, 본인은 보조스님 사상이 좋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성배는 예전에도 보살사상을 좋아했지.”라고만 대답하셨다. 

 

버클리대학교 방문 교수 

 

나는 미국에 가 보고 싶었다. 《선림고경총서》 간행도 거의 마무리됐으니 학술대회 준비도 할 겸해서 미국의 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 보고 싶었다. 뉴욕에서 만난 박 교수님의 추천으로 랭카스터Lancaster 교수를 만났다. 이 분의 배려로 버클리대학교에서 방문 교수 자격으로 1년간 수학했다.

 

버클리대학교에서 수학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확인했을 때, 교수 연구실을 나와 혼자 교정 잔디밭에 벌렁 누웠다. “여기에서 공부할 수 있다! 학부 시절 참으로 오고 싶었는데, 스님이 되어 이렇게 왔네.” 하늘은 맑고 고요했다. 학생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매우 오랫동안 그냥 그렇게 누워 있었다.

 

사진 5.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 사진 뉴시스.

 

당시 버클리대학에는 불교학 전공으로 유학 온 대학원 과정의 학생으로 조성택, 조은수 두 사람이 있었고, 스님 두 분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들과 가끔 만남을 가졌다. 강옥구(1940~2000) 시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거의 매일 학교에 나가 강의를 들었다. 랭카스터 교수의 강의는 물론이고, 제이니 교수의 남방불교 강의도 들었다. 학기 마지막 시간에는 해당 강의에 대해 학생들이 평가서를 내는 제도가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제도였다. 지금은 한국의 많은 대학에서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 도서관에서 한국 관련 도서를 찾아보았더니 거의 한국전쟁에 관한 기록들이었고, 특히 한국불교에 관한 책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꼭 불교학 관련 논문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원 과정은 마쳤지만, 교수직에는 관심이 없어서 학위 논문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 이후 논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면서 학교 밖의 주변 지역들을 찾아다녔다. 한국 절은 물론이고, 일본, 티베트, 중국, 미국 절들을 방문했다. 먼 곳에 있는 중국 스님이 창건한 만불사에서는 하룻밤 자기도 했다. 유대인으로서 스님이 된 분들도 있었고, 일본 선원에는 수행하는 백인들도 매우 많았다.

 

스님들에게는 음식값을 받지 않는 중국식당도 있었다. 모자가게를 찾아가면서 행인에게 길을 물었는데, 내가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양금을 건네주기도 했다. 훗날 여기 와서 포교하며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방학 기간에는 LA까지 혼자 운전해서 고려사 절도 참배했다.

 

정심사 대웅전 낙성과 미국 포교 결심

 

1993년 여름,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이해 가을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약 한 달 전, 해인사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선문정로』에서 강조한 돈오돈수 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연세대 민영규 교수, 동국대 김지견 교수, 경남대 최유진 교수 등이 참여했다. 일본에서는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교수, 중국에서는 루우열(樓宇烈) 교수가 참여했다. 특히 미국의 박성배 교수도 참여했다. 학술회의를 마치고 일행들은 함께 큰스님께서 머무신 파계사 성전암을 참배했다. 이때 논문은 모두 《백련불교논집》에 게재되었다.

 

큰스님 열반 이후에 시작한 정심사 대웅전 건립 불사는 사당동 정안사를 유지한 채 진행한 불사여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서기 2천년에 많은 문중 스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을 성대하게 마쳤다. 

 

사진 6. 《선림고경총서》 완간 기념으로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기념사진.

 

나는 그 다음해 가을 9.11 사태 직후 뉴욕으로 떠났다. 주변에서는 미국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그런 곳에 왜 가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무참히 저렇게 많이 죽었으니 독경讀經하러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묘운행 보살님의 주선으로 맨하탄에 머물면서 9·11현장도 둘러보았고, 조계사 묘지스님과 함께 사고 현장에서 독경도 했다. 또 조지아주 아틀란타의 신도 댁을 방문했고, 전등사 절도 참배했다. 킹 목사의 기념관도 둘러보았고, 킹 목사의 무덤이 연못 가운데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스톤의 문수사에 들러서는 훗날 미국에 올 수 있도록 초청장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드렸다. 다시 센프란시스코에 들러서 이전에 익숙한 곳들을 두루 둘러보니 매우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하여 약 한 달 동안 미국 여러 지역을 두루 다녀보니 미국 와서 포교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 7. 2011년 5월 부처님오신날 정심사 대적광전에서 법문 중인 원영스님.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정말로 미국에 가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고 주변에서 모두 걱정을 했다. 그때의 내 나이로 보든지 혹은 정심사 운영이나 발전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좋은 법당이 있고, 부처님을 모시고 있고, 또 신심 깊은 신도님들이 있으니 괜찮다.”라고 했다. 결국 신도들의 대표자 모임에서 미국 가는 것을 후원해 주기로 결의가 이루어졌다.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미국에 무엇하러 가려고 하는가를. 저렇게 좋은 절을 지었으니 이제 떠나야만 절집에 대한 애착이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출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미국에 작은 절이라도 하나 짓게 되어 훗날 공부할 문중스님이 그 절에 와서 살면 집값은 톡톡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 8. 2012년 정심사 신도들과 함께한 인도 성지순례.

 

2002년 4월 보스톤 문수사에 도착했다. 월드컵 축구경기를 청년들과 함께 밤늦도록 보았다. 한국을 오가는 공항에서도 축구경기를 보았다. 다시 센프란시스코에 돌아왔다. 이곳에 살고 싶었다. 우선 아파트에 방을 하나 마련하고, 여래사 설조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독립된 가옥을 하나 마련해서 시작하라고 했다. 중국 절을 찾아가서 알아보니 사용료를 내면 법회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마땅히 빌릴 만한 데를 찾아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훗날의 절 이름은 미리 지어 두었다. 보리사라고.

 

뉴욕 능가사 개원과 보리사 관음전 신축

 

이렇게 하던 중에 뉴욕에 있는 정륜월 보살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맨하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능가사라는 절에 스님이 안 계시니 함께 의논해 보면 좋겠다고 했다. 뉴욕에 와서 관계되는 보살님들을 만났다. 절의 전체적인 관리를 모두 내게 일임하고, 그 절을 매각해서 시내로 이전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결국 능가사를 맡게 되었다. 

 

사진 9. 뉴저지 잉글우드에 위치한 보리사와 관음전.

 

2002년 12월 첫 개원법회를 했다. 정심사에서 일주스님이 왔고, 한국에서 이민 온 곽현파 법사, 대선해 보살, 이승원 거사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그 후 정심사 신도님들이 지속적으로 많이 후원해 주었다. 2년 후 원택스님을 초청해서 플러싱Flushing에서 800여 명이 참석하는 큰 법회를 개최했고, 원타스님이 가끔 들러서 격려해 주었다. 

 

또 포교의 인연을 모으기 위해 불사를 시작했다. 훗날 법당이 마련되면 관음상을 모시겠다고 예정하고, 한국과 뉴욕에서 권선을 했다. 그 동참자들의 명단이 지금 관음전 법당에 모셔져 있다.

 

사진 10. 2022년 9월 25일 보리사 관음전 법당에서 열린 첫 법회.
사진 11. 2023년 11월 11일 뉴저지 보리사 창건 22주년 기념사진.

 

절을 서너 번 옮겨 다녔다. 20년이 지난 2022년 11월 잉글우드Englewood에서 보리사 관음전 신축 불사의 낙성을 마쳤다. 한국에서 일만스님, 일념스님, 정우스님 등이 왔고, 또 뉴욕 지역의 많은 스님들과 원불교 교무들도 낙성식에 동참해 주셨다. 앞으로 스님들이 와서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난해는 큰스님 열반 30주기였다. 비로소, 큰스님의 사리탑 조성을 원만히 마쳐서 조사전에 모셨다. 

 

사진 12. 2023년 3월 19일 정심사 창건 37주년 및 조사전 내 사리탑에 성철 큰스님 좌상 봉안을 기념하며 가사공양을 올리는 원영스님.

 

생각해 보면 문중스님들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원택스님은 큰스님 열반 이후 30여 년을 큰스님의 가르침을 알리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 오고 있다. 은사스님 선양사업을 이렇게 하는 분이 또 누가 있을까. 종단에서도 참으로 대표적인 효 상좌이시다. 원택스님은 자주 말한다. “은사스님은 원래 큰스님이시다.” 달이 일천 강을 비추듯, 큰스님의 덕화와 가르침이 한국과 미국에도 널리널리 아름답게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4년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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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스님
1978년 성철스님을 은사로 하여 해인사에서 수계함. 1998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하남 정심사와 뉴욕 보리사 창건.
njboris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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