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성철]
“누구보다 불교의 자존심과 위상을 지켰던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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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3 년 11 월 [통권 제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440회 / 댓글0건본문
해인사 청량사 주지 원타 스님
가을이 되면 온 산이 붉게 물드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 마찬가지로 가야산에 만산홍엽(滿山紅葉)이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날 때면 평생을 일관된 수행과 흔들리지 않는 삶으로 후학들을 지도했던 성철 스님이 생각난다.
열반 20주기를 앞두고 해인사 입구에 있는 성철 스님 사리탑을 찾았다. 이틀간 1,000명이 넘는 불자들이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던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삼천배를 한다. 뿌듯해 하는 참가자들의 얼굴을 보며 ‘나’보다는 ‘남’을 위한 기도가 훨씬 보람 있는 일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청량사 대웅전
삼천배가 끝나고 절정에 이른 가야산의 단풍을 보며 해인사 청량사로 향했다. 수년 전 해인사에 처음 올 때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보면서 “저 절은 어느 스님 문도사찰인가?”하고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의 ‘의문’이 이렇게 ‘인연’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청량사에 도착해보니 그간 가지고 있던 ‘편견(?)’들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먼저, 청량사는 가야산에 있는 절이 아니었다. 해인사 산내 암자이니 당연히 가야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청량사를 품고 있는 산은 ‘천불산’이었다. 그러고 보니 해인사에서 청량사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두 번째, 청량사는 작은 절이 아니었다. 여느 가야산 내 암자들처럼 충분한 사격(寺格)을 갖추고 있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법당 하나와 요사채가 전부였던 청량사는 성철 스님 제자 원행 스님과 원타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대웅전, 약광전, 고심선원, 상락당, 적연당, 설영루, 원주실을 비롯한 10여개의 전각들이 아담하게 자리 잡은 절이 되었다. 주지 원타 스님을 만나기 위해 청량사를 찾은 이날도 도량을 정비하는 불사가 한창이었다.
세 번째,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이 석불(石佛)이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절을 다니면서 대웅전을 참배했지만, 주불로 석불이 모셔진 곳은 청량사가 처음이었다. 대웅전 참배를 마치고 마당에 나오니 석탑과 석등이 함께 있었다. 석불과 석탑, 석등이 함께 조성돼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전되고 있는 곳은 청량사가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사소한 것’에 조금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원타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고경대를 찾았다. 원타 스님은 언제나 그렇듯 부담 없는 미소로 객을 맞아 주었다.
“원행 스님이 1984년부터 청량사를 맡았습니다. 원행 스님이 오실 때 저도 같이 왔어요. 저는 주로 선방에 다녔고 불사의 기틀은 원행 스님이 다 잡았습니다. 1988년에 원행 스님이 마산으로 가시면서 제가 청량사를 맡아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말씀을 듣다 보니 말사 주지는 물론 해인사의 3직도 맡지 못하게 했던 성철 스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청량사에 오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지금은 속퇴했지만 사형(師兄) 중에 원정 스님이라고 계셨습니다. 그 스님이 해인사 원주를 살다 1980년대 초에 청량사에 처음 오셨습니다. 당시 청량사는 폐사지나 다름없어 해인사 스님들이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했어요. 원정 스님이 오셔서 절에 살면서 하나 둘 정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 인연이 원행 스님과 저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청량사는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큰절의 부속암자와 같은 성격이 있어서 조용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절이 커지면서 초하루법회도 하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큰 규모는 아니지만 기업 단위의 템플스테이도 합니다. 앞으로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와서 기도하고 정진하는 공간,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공부하는 사찰로 만들겠습니다.”
원타 스님의 다짐 속에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묻어 있었다. 그래서 원타 스님과 성철 스님의 인연부터 차근차근 묻기 시작했다.
나의 꿈은 ‘스님’
원타 스님의 어릴 적 꿈은 스님이었다. 대통령, 과학자, 교사, 군인 등 어릴 적 한 번쯤은 생각해 보던 것과는 다소 거리가 먼 ‘장래희망’이다.
“어렸을 때부터 불연(佛緣)이 깊었나 봅니다. 어머니를 따라 절에 오랫동안 다녔고 또 집에 있을 때는 혼자 뒷동산에 올라 염불을 하기도 했어요. 제가 천주교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당시 학교에 계셨던 수사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수사님께 출가해 스님이 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곧바로 큰스님께 소개장을 써 주셨습니다. 그 수사님은 큰스님께 참선을 배우셨던 분입니다. 그렇게 인연이 이어져 1973년 가을에 처음 백련암에 갔습니다.”
원타 스님은 3일간 백련암에 머물며 절의 풍경과 스님들의 모습을 ‘견학’했다. 성철 스님도 친견했다.
“큰스님은 정말 위풍당당한 모습이셨어요. 큰 눈에 조금 마른 체형이셨습니다. 뭔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또 따뜻한 모습도 있었어요. 큰스님을 뵙고 ‘저 분에게 공부를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일간의 견학 뒤 스님은 한 달 후 다시 백련암으로 왔다. 출가를 위해서다. “행자생활이라는 게 밥하고 나무하는 거친 생활이다. 적당히 할 수 있는 편안한 생활이 아닌데 할 수 있겠느냐?” 성철 스님이 물었다. “그런 것 못하겠으면 뭣 하러 다시 여기 왔겠습니까?” 원타 스님은 주저 없이 답했다. 그리고는 바로 머리를 깎고 출가수행자의 길을 시작했다.
“출가를 하고 보니 천제, 원기, 원명, 원융, 원택 스님이 계셨고 행자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당시 백련암 분위기는 너무 좋았습니다. 큰스님을 제외하고 사형사제스님들끼리도 하대를 하지 않았어요. 서로가 존칭을 썼습니다. 저에게도 ‘신 행자님…’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또 보시가 들어오면 행자에게 먼저 줬습니다. 필요한 물품을 행자가 먼저 챙기고 나머지를 스님들이 쓰셨습니다. 큰스님께서 봉암사 결사를 하실 때에도 대중공양이 들어오면 필요한 사람이 먼저 물건을 쓰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 가풍이 백련암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또 울력이 있으면 전체 대중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일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중들이 참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대중들에게는 원만한 생활이었지만 역시 초보 행자에게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많았다.
“하루는 백련암의 모든 대중이 함께 도배를 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저에게 방바닥에 깔아 놓을 것을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저는 어차피 한 번 쓰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 신문지를 가져다 드렸는데, 그걸 보자마자 큰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이 미련한 곰 같은 놈아! 누가 신문지를 가져 오랬어?’ 저는 깜짝 놀라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신도님들이 절할 때 쓰는 장판을 가져왔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장판을 쓰면 나중에 걸레질을 해 다시 쓸 수 있었어요. 한 번 쓰고 버려야 하는 신문지를 가져와 낭비한다고 큰스님께서 경책하신 거죠.”
성철 스님은 제자들이 잘못할 때는 강하게 질책을 했다고 한다. 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서툰 부분이 많으니 혼도 많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백련암에 살면서 평생 동안 절집에서 겪어야 하는 일들을 했고 나름 노하우를 얻었습니다. 딱 한 가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부처님오신날 풍경이었습니다. 큰스님 엄명에 따라 등(燈)을 달지 않으니 백련암의 초파일은 그냥 평범했습니다. 하하.”
“수행자로서 자부심을 갖게 해 주신 분”
원타 스님은 다른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능엄주와 108참회문을 외우고 일본어를 공부해 성철 스님이 내려주는 ‘교재’로 공부했다. 황벽 스님의 『전심법요』와 도원 선사의 『정법안장』을 특히 인상 깊게 읽기도 했다. 그리고는 해인사 선원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납자(衲子)의 길을 시작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의 핵심은 역시 ‘견성성불(見性成佛)’입니다. 수행자의 지상최대 목표는 바로 견성성불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부지런히 참선하라고 하셨어요.
성철 스님을 시봉하고 있는 원타 스님
큰스님께서는 공부가 깊어져도 오매일여(寤寐一如)가 아니면 공부가 덜 된 것으로 알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 공부에 대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큰스님께 항상 죄송할 뿐입니다. 이번 생에 밥값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스승으로서 성철 스님의 ‘장점’이 무엇이었느냐?”는 다소 당돌한(?) 질문에 원타 스님은 “제자들이 수행자로서 자부심을 갖게 해준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큰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출가해 스님이 된 것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심어주셨어요.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의 그 말씀을 들으면 정말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하하.
돌이켜 보면 큰스님께서는 행자 때부터 절에 왔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즐거움이고 좋은 길이라는 것을 항상 가슴 속에 새겨주셨어요. 그러니 저는 처음부터 절에 온 것 자체가 기분 좋았고 다른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큰스님 말씀을 들으면 선원에 가서 제대로 공부하면 되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어요.
큰스님께서는 밖의 일에 관심을 갖지 말고 오로지 정진만 해서 부처가 되라고 하셨고 또 정진만 열심히 한다면 모든 것이 구족되어서 불편함 없이 살 수 있고 모든 것을 또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도처에서 정진하고 있는 스님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소중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타 스님은 한국 사회에서 불교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는 것에 대한 답도 성철 스님의 행(行)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큰스님께서는 모든 대중을 똑같이 대하셨습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가 없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 왔지만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대기업의 총수가 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신 삼천배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똑같이 만나 제접하셨습니다. 특정인에게 특권을 허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몸소 보여주시니 불교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올라갔습니다. 요즘처럼 정부기관에는 잘 보이려 애를 쓰면서도 국민들의 아픔을 보듬지 못한다면 한국불교의 위상 추락은 계속될 것입니다.”
원타 스님은 스승 성철 스님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국불교 안팎의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선방에 있어도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원타 스님은 조계종립 특별선원 봉암사의 주지를 2001년~2005년, 2009년~2013년에 걸쳐 두 번이나 역임한 스님이다. 철저하게 대중들에 의해 추대되는 봉암사 주지를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들의 믿음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른스님들께서 ‘성철 스님이 세워 놓은 봉암사 결사정신을 제자가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해 주셔서 첫 소임을 맡았습니다. 두 번째 임기는 수좌 적명 스님을 모시면서 맡게 되었고요.
봉암사에서는 대중들과 같이 생활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봉암사 대중들은 오직 공부를 하기 위해 오는 스님들이기 때문에 공통된 하나의 목표아래 마음을 모을 수 있습니다. 적명 스님이 오신 뒤에는 좀 더 대중공의로 사찰을 운영하려 노력했습니다.”
봉암사 주지 시절 적명 스님, 지관 스님과 함께 경내를 걷고 있는 원타 스님
잘 알려져 있듯이 성철 스님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기치로 1947년부터 봉암사 결사를 이끌었다. 당시의 결사정신은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 그러나 원타 스님은 출가초기부터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진해왔기에 수월하게 소임을 마칠 수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을 통해서 불교를 대중화 시켰습니다. 30년 전에 이미 한글법어를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40여 년 가까이 출가자로 살고 있는데 거의 유일무이하게 일관된 삶을 보여 주신 분이 성철 큰스님이십니다. 수행이나 대중포교에서 큰스님처럼 일관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청량사 공양실에서 점심공양을 했다. 밥도 집주인을 닮는지 맛이 담백했다. 청량사에서 나오는데 다시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성철 스님의 가르침이 다시 한 번 가슴에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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