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 경전 있다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백일법문 해설]
내 속에 경전 있다


페이지 정보

서재영  /  2013 년 10 월 [통권 제6호]  /     /  작성일20-05-29 14:00  /   조회7,326회  /   댓글0건

본문

인간 속에 부처님 지혜 있다 

 

종교에서 인간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종교에 따라서 이에 대한 해답은 달라질 것이다. 붓다 당시의 브라만교를 비롯해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는 종교가 많다. 이 관점에서 인간을 보면 신과 인간 사이에는 주종관계가 성립된다.

 

창조주는 인간과 세상의 주인이며, 인간은 수동적인 객체일 뿐이다.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이란 없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볼까? 성철 스님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그 종교의 본질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백일법문』은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 짓는 두 번째 특징으로 절대적 인간관을 꼽았다. 불교의 인간관은 깨침의 종교라는 불교의 특징과 연결된다. 모든 중생은 자기의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님과 같다는 것이 불교의 첫 번째 특징이다. 여기서 인간에게 과연 깨달음을 얻을 능력이 있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만약 인간에게 여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을 능력이 없다면 성불은 그저 허황된 구호에 불과해 진다. 성철 스님은 『화엄경』을 인용하여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즉,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시고 일체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며 말씀하셨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덕상을 가지고 있건만 분별망상으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만법의 근본을 알고 보니 모든 중생들이 하나같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본성을 발현해 내면 중생들 스스로가 절대자가 되고 부처가 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인간은 부처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여래의 지혜와 덕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견성(見性)’이다. 중생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중생이라는 한계에 갇혀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아간다. 분별망상에 가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거짓 자아에 갇혀 살아간다.

 

성철 스님은 일체중생에게 부처님의 덕상이 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했다. 인간에 대한 이 같은 가르침이야말로 불교가 인류에게 공헌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여래의 지혜와 덕상이 구족되어 있다는 가르침은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피조물이라는 수동적 존재에서 성불의 가능성을 지닌 지고한 존재로 전환된 것이다. 내 속에 여래의 지혜와 덕상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 속에 무진장 금맥 있다

 

인간에게 깨달음을 이룰 능력이 없다면 견성하겠다는 것 자체가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일이다. 마치 자갈밭을 파서 황금을 캐겠다고 공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갈밭에서는 아무리 깊이 파도 끝내 황금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황금을 얻고자 땅을 판다면 그곳에 황금이 있는지 없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황금이 묻혀 있는 땅이라면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금을 캐내게 되겠지만 애초에 황금이 없는 자갈밭이라면 헛수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여래와 같은 지혜와 덕상을 가지고 있다면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겠지만 만약 자갈밭처럼 무명 덩어리에 불과하다면 성불의 목표는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선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더러 황금을 캐는 작업에 비유한다. 따라서 수행자는 깨달음이라는 진정한 행복을 찾는 광부라고 할 수 있다. 내면의 불성을 찾아 심성의 근원으로 굴착해 들어가는 광부가 불자인 셈이다. 불교는 그런 인간을 향해 “열심히 파라! 지금 파고 있는 바로 그 마음의 땅〔心地〕에 엄청난 금맥이 묻혀 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에게 무진장한 금맥이 내장되어 있다고 하셨다. 각자에게 내재된 그와 같은 무궁무진한 금광을 채굴하여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 수행이다. 선사들은 “중생의 몸 가운데 금강(金剛)과 같은 불성이 있다.”고 설파한다. 그것은 네 속에 있는 금광을 당장 캐내어 거지 궁상에서 벗어나라는 독려이다.

 

유마 거사는 “한량없는 재물을 가지고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資財無量攝諸貧民〕.”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무량한 재산이란 바로 내면의 금광을 상징하는 말이다. 내면의 금광을 캐내면 우리도 유마 거사처럼 한량없는 재물을 얻어서 영혼이 풍성해진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내 속에 있는‘자아경’

 

내 속에 있는 무량한 금광은 물질적 재산이나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보는 바른 안목과 삶과 행복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에 대한 눈뜸이다.

『채근담』에 따르면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我有一卷經)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不因紙墨成).

펼쳐 여니 한 자 글자도 없으나(展開無一字)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常放大光明).”

 

누구나 세상에 대한 바른 안목과 참다운 행복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신비로운 책을 한 권씩 지니고 있다. 그 책은 종이로 만들어지거나 활자로 기록된 책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언제나 찬란한 지혜의 광명을 비추고 있는 책이다. 그 책이 바로 내 속에 있는 마음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면 존재의 실상과 참다운 행복에 대한 보석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라는 책이다.

 

‘자아경’에는 중생의 한계를 벗고 진정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무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힐 눈부신 광명이 들어 있고, 궁핍한 삶을 풍요롭게 바꿀 보배가 가득하다. 불교는 바로 그 경전을 읽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종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아경을 읽을 수 있을까? 자아경을 읽는 길은 수행을 통해 자신을 바로 알고 무명을 벗고 진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어와 문자로 자아경을 읽으려 든다. 하지만 문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장자』에서는 부차적인 것에 집착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다. 어떤 사람이 늘 책을 읽고 있는 임금을 보고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은 옛 현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고 했다. 물론 책 속에 등장하는 현인들은 모두 죽고 없다. 그 말을 듣고 임금에게 다시 말했다. “임금님, 술을 마시려면 술을 마셔야지 왜 술지개미를 드십니까? 현인은 죽고 없는데 기록해 둔 말은 술지개미에 불과한 것입니다.”임금은 그 말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다.

 

책에 기록된 옛 사람의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술지개미에 불과하다. 내 속에 있는 금광을 캐려면 글자 없는 자아경을 읽어야 하며, 술지개미가 아니라 잘 발효된 술을 마셔야 한다. 자아경을 읽는 핵심은 내면의 빛을 밝히는 것이며, 말과 논리가 빚어내는 현란한 분별심으로부터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달마 대사는 “널리 배우고 지혜가 많으면‘廣學多智〕자성이 도리어 어두워진다〔神識轉暗〕.”고 했다. 배워서 아는 것으로는 자아경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문관』에서도 “문으로 들고 나는 것에는 가보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자아경을 읽기 위해서는 오히려 문으로 들고 나는 분별심을 떨쳐내야 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어내고〔爲道日損〕,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해야 한다〔爲學日益〕.”고 했다. 진정한 도를 위해서는 덜고 또 덜어서 무위(無爲)에 이르러야 한다. 자기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번뇌와 망상을 고요히 쉬는 것이 덜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학문을 배우고자 한다면 문자와 논리를 더하고 또 더해서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

 

하지만 자아경을 읽고 참다운 도를 알고자 한다면 온갖 말과 분별을 쉬고 또 쉬어야 한다.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것이 바로 쉬고 또 쉬는 길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것이 내면의 금광을 캐는 길이며, 글자로 기록되지 않은 자아경을 읽는 방법이다. 불법의 핵심은 ‘나’를 읽는 데 있고, 수행은 ‘나’라는 책을 읽는 것이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서재영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