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능엄경』 독서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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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5 년 2 월 [통권 제2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840회 / 댓글0건본문
참선을 한번도 해본 적 없이 참선에 관련된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늘 마음이 찜찜하다.
한번은 후배가 이런 질문을 해왔다. 사마타, 삼마지, 삼매, 선나 등의 용어가 비슷비슷해서 헛갈린다고 개념을 구분해달라는 것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이라 “나한테 그딴 거 묻지 마. 그냥 다 삼매로 통일해.”라고 했더니 “명쾌한 답변, 감사합니다.”라면서 낄낄대며 나를 비웃어주었다. 쿨한 척하고 같이 웃었지만 속으로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였다.
연말에 알바 때문에 『능엄경』을 보게 되었는데 후배가 질문한 단어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능엄’이 ‘대정(大定)’의 뜻이란다. 잔뜩 기대를 하고 쭉 읽어내려 가려고 하였으나 워낙 딴딴하여 이빨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마타, 삼마지, 선나 닦는 법을 설한 내용임은 분명하니 꼼꼼히 파고들면 후배 앞에서 당했던 망신을 설욕할 수도 있겠다.
소설 책 읽듯이 쭉 훑어 본 소감에는 이 경이 재미있는 교과서 같다. 재미있는 교과서라니, 형용모순 같지만 진짜 그렇다. 우선 아비달마에서 논의되었던 쟁점과 개념들이 압축적으로 들어 있어서 ‘지해종도’들의 취미에 맞게 생겼다. 먼저 교학을 공부하고서 선으로 관심을 돌린 사람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될 만한 경이다. 한편 수행에 까막눈인 사람이 그냥 문학 텍스트로 생각하고 읽어도 기발한 캐릭터와 깨알 같은 사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 이런 스토리도 있다.
삼마지를 닦아서 원통 얻는 방법을 설하는 부분에 스물 다섯 명의 주인공이 나와서 자신의 과거 수행 이력을 부처님 앞에서 고한다. 『능엄경』의 핵심을 차지하는 소위 25원 통 장으로, 잘 알려진 ‘관음보살 이근원통장’도 이 중에 하나이다. 18계와 7대 중에 하나의 문(門)을 통해 들어가는 수행인데 내게 재미있었던 것은 월광 보살이 수관(水觀)을 닦는 이야기다. 눈물, 콧물, 진액, 대소변 등 몸 안에 있는 수성(水性)에서 시작하여 세계 바깥 향수해까지 관찰하여 물의 성품이 동일함을 알고 수관을 성취한다. 그 다음 대목에…
제가 처음 이 관을 성취했을 때 물만 보일 뿐 아직 몸이 없어지지는 않았나이다. 비구의 몸인지라 방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저의 제자가 창을 뚫고 방 안을 보니 맑은 물만 가득하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아니하매, 어린 것이 소견이 없어 돌조각을 물에 던져 소리를 내고는 힐끔힐끔 돌아보며 갔더이다.
제가 정(定)에서 나오니 가슴이 아팠으므로…스스로 생각하되, 나는 이미 아라한도를 얻어 오래전부터 병연(病緣)을 떠났는데 오늘 어째서 가슴이 아픈가, 퇴보하는 것은 아닌가 하였나이다.(번역, 운허 스님)
그때 동자가 지난 일을 자백했고 월광 보살이 동자에게 지시한다. 다시 정에 들 테니 방문을 열고 물에 들어가서 돌조각을 꺼내오라고. 동자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월광 보살이 정에서 나오자 통증이 사라졌다. 그 후로 무량한 부처님을 만나 수행하는 중에 몸이 없어지고 무생법인을 얻었다고 한다.
월광 보살이 항하사 겁 전부터 수행을 했어도 몸이 남아 있어서 돌 맞고 아픔을 느낀 걸 보면 이 길이 얼마나 멀고 먼 길인지 짐작이 간다. 내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한숨 쉬는 사람에게는 항사겁의 수행으로 원통을 얻은 보살보다는 돌 던지고 힐끔힐끔 돌아보며 도망가던 제자가 오히려 실감난다. 창문을 뚫고 도 닦는 스승을 훔쳐보다가 믿기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돌 던지고 도망간다니. 월광 보살 수대원통 장면에 딱 두 줄로 찬조 출연한 이 제자, 지금은 상상불가한 캐릭터다.
어디 감히, 성철 스님 참선하실 때 원택 스님이 돌 던지고 힐끔거리며 도망가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절대 불가다.
월광 보살의 제자와 더불어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잘생긴 게 죄인 아난 존자가 걸식 나갔다가 음란마귀에 씌워 거의 파계할 지경에 이르는 첫 부분이다.
아난을 보고 첫눈에 반한 여인 마등가는 밥을 덮는 천에 주문을 걸었다고 한다. 꼼짝없이 걸려든 아난이 썸을 탈 사이도 없이 애무를 당하며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부처님이 알고 문수사리에게 신주(神呪)를 주어 아난을 구해오라고 명한다. 큰무당 문수가 가서 악주(惡呪)를 물리치고 아난을 구해오자 아난이, 제가 다문만 믿고 도를 열심히 닦지 않아서 어쩌고저쩌고…. 찔찔 짜면서 도 닦는 법을 청해 사마타를 설하는 것으로 경이 시작된다.
옛 주석가들은 수다원과를 얻은 아난이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견도에 들면 무루심을 일으키는데 그에 동반하여 저절로 얻어지는 계가 있어서 구업과 신업은 자동적으로 짓지 않게 된다는 설로, 이 경에서 아난이 신업을 지으며 위신을 구긴 것은 일종의 연출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부처님이 벌여놓은 판에 아난이 한 몸 던져 쓰리고에 피박 쓰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나는 옛 주석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 부분 말고도 『능엄경』에서는 음욕을 경계하는 내용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생사에 윤회하게 만드는 근본이 음욕이고 그것은 존재하려는 욕구, 유애(有愛)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존의 측근으로서 매일같이 세존의 수행을 보면서 자란 아난이, 그 총명한 아난이 수다원과를 얻고도 그런 일에 말려들 수 있다는 것을 통해서 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계가 그릇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깨지면 지금껏 닦아온 지혜와 선정도 새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삼매 닦는 법을 설한 경을 읽으면서 삼매에 대해서는 정작 알아낸 게 없다. 아쉽다. 이참에 직접 삼매를 닦아볼까하는 마음이 일어났으나 몇 초간 심사숙고 한 끝에, 그러기에는 근기가 너무 딸리고 이미 골병 들 나이가 되었다는 자각이 뒤따랐다.
그냥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경속에서 반짝이는 주인공들을 만나본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아울러 내 드라마에 등장했던 수많은 출연자들을 추억하고 내가 엑스트라를 맡았던 수많은 망작들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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