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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사자와 비루먹은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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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3 년 9 월 [통권 제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54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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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사자처럼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獅子吼)라고 표현한다. 부처님을 백수의 제왕 사자에 비유한 것이다. 온갖 들짐승들이 울부짖고 서로 다투다가도 사자가 큰 소리로 포효하면 모든 짐승들이 숨을 죽이고 일순간 고요해 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도 중생들의 마음에서 아우성치는 번뇌와 고통을 잠재우고 고요와 평화를 누리게 한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의 말씀은 예로부터 우렁찬 사자의 포효로 비유되어 왔다.

 

그런데 한문 불전에서 ‘사자(獅子)’라고 표기하지 않고 ‘사자(師子)’라는 표기를 더 많이 쓰고 있다. 사자라는 단어는 백수의 제왕 사자를 의미하지만 그 비유가 지시하는 것은 우리들의 스승인 부처님을 의미한다. 때문에 사자 사(獅) 대신 스승 사(師)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말씀은 중생의 번뇌를 잠재우는 진리의 포효, 무명의 영혼을 일깨우는 우렁찬 목소리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중생의 번뇌와 갈등의 목소리를 잠재운 부처님의 행적과 그 당당한 전법행에 대해서도 ‘사자보(師子步)’라고 이름 붙였다. 마치 사자가 위엄 있는 태도로 숲 속을 거닐면 모든 짐승들이 잠잠해지듯 부처님도 평화로운 삶으로 중생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나아가 부처님의 원대한 깨달음과 지혜는 외도들의 온갖 궤변과 성문 연각의 왜곡된 가치관과 교리적 다툼도 평정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의 왕’이라는 의미에서 법왕자(法王子)로 비유되었고, 당당하고 위엄 있는 진리의 왕이 앉아 계신 자리를 사자좌(師子座)라고 했다. 백수의 제왕처럼 중생들의 모든 번뇌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용수(龍樹) 보살이 부처님의 법문에 대해 ‘모든 희론(戱論)을 잠재우는 법문’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맥락과 같다. 그렇다면 사자의 포효와 같고, 사자의 당당한 걸음과 같고, 모든 번뇌와 희론을 잠재우는 부처님의 법문과 위의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無上正等覺〕에서 나온다. 궁극적 깨달음을 성취한 마음은 두려움이 없는 마음이여, 무엇에도 흔들리거나 현혹되지 않는 마음이므로 그것은 또 ‘사자심(師子心)’으로 비유되었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여래의 마음은 사자처럼 당당하고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론과 교설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다. 사자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탄생시키는 어머니는 다름 아닌 선정(禪定)이다. 그래서 모든 번뇌를 잠재운 부처님의 삼매를 ‘사자분신삼매(師子奮身三昧)’라고 했다. 선정으로 깊은 삼매에 드는 것을 위풍당당한 사자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는 것에 비유되었다. 마음의 번뇌를 잠재우고 참다운 고요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다름 아닌 선정이다. 그래서 『대지도론』에서도 마왕은 고요히 선정에 든 모습을 보면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고 했다. 선정이야말로 번뇌의 군대를 무찌르는 위엄 있는 장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억겁 동안 배운 법문과 한 나절의 선정

 

불자의 길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사자와 같이 당당하고 위엄 있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우리에게 사자가 되라고 강조했다. 사자가 되는 길은 언어문자에 매달리지 않고 참선 수행을 통해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참선의 길은 언어와 논리를 초월하여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길이다. 그 길을 통해 선정을 얻고, 참다운 지혜에 대한 체득이 없다면 아무리 불법을 오랫동안 공부하고, 법문을 오래 들어도 사자처럼 당당한 위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문을 듣고 기억하는 것을 전부로 아는 아난을 향해 다음과 같이 타이르셨다.

 

“네가 비록 억천만겁토록 여래의 묘장엄법문을 기억하여도 하루 동안 선정(禪定)을 닦느니만 못하느니라.”

 

아난은 평생 부처님 곁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고, 누구보다 부처님의 말씀을 많이 기억하고 있던 제자였다. 그는 총명하고 지해(知解)가 뛰어나 한 번 들은 말씀은 모두 기억했다. 아난의 그런 놀라운 재능 덕분에 부처님께서 입적하시고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하는 결집에서 아난은 중심적 서술자가 되었다.

하지만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만을 생명으로 삼을 뿐 스스로 선정을 닦아 내면에서 울리는 깨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아난을 딱하게 여기신 부처님은 아득한 세월동안 법문을 듣고 기억하는 것보다 하루 동안 선정을 닦는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이라고 당부하셨다. 비록 부처님의 말씀일지라도 그것이 언어로 발화(發話)되는 순간 그것은 깨달음 자체가 아니라 언어적 기호로 둔갑하고 만다.

 

이를테면 금강산을 여행한 사람이 생생한 느낌으로 여행기를 썼지만 읽는 사람은 체험과 감동 그 자체가 아니라 기호를 읽는 것이며,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옛 선사들은 부처님의 마음은 언어 너머에 있고, 문자를 떠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아난은 언어문자의 길로 갔고 반면 부처님은 선정의 길로 갔다. 선정은 밥을 먹는 것과 같아서 지혜가 충만하지만 언어문자를 따라가는 것은 음식 이야기만 하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언어의 축제를 벌여도 여전히 배가 고픈 법이다. 부처님은 선정이라는 약을 먹고 번뇌를 치료했지만 아난은 처방전에 집착한 것과 같았다. 이것이 선의 입장에서 보는 부처님과 아난의 차이점이며, 선과 교학의 상이점이다.

 

서산 스님은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먼지가 되나,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된다(百年貪物一朝塵 三日修心千載寶).”고 하셨다. 불법을 공부하는 데에서도 이해하고 기억한 것들은 기억과 함께 사라지는 부질없는 것이다. 선정에 들어 마음을 닦는 것이야말로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참다운 뗏목이라는 것이 선의 가르침이다.

 

아난과 비루먹은 여우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선정을 닦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아난은 그 병을 쉽게 고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침내 부처님께서 입멸에 드시고 말았다. 그 때 모든 제자들은 칠엽굴(七葉窟)에 모여 부처님의 법문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결집에 착수했다. 이 자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아난이었다. 그의 지혜와 총명은 마치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물을 옮기면서도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의 총명과 지혜는 부처님께서 평생하신 말씀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구술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집을 지휘하던 상수제자 가섭 존자는 아난에게 칠엽굴 결집에서 빠지라고 했다. 가섭 존자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어야만 부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근본종지를 결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은 기억하고 있지만 불교의 생명인 자기 자신의 마음은 깨치지 못했다. 가섭 존자는 깨침의 경지에서 결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언어만을 편집한다면 그것은 불법의 근본생명을 죽이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아난을 향해 “여기는 사자굴이니 너같이 마른 지혜로 인하여 몹쓸 병이 든 여우가 어찌 이 사자굴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라고 호통쳤다.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아난을 향해 ‘몹쓸 병에 걸린 여우’로 비유하며 사자로 불리는 거룩한 제자들의 모임에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다.

 

결집에서 쫓겨난 아난은 낙심했지만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아난의 명성을 듣고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 구름 같은 청중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아난은 다시 용기를 얻었고 그들에게 들려줄 법문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 때 늘 고요한 숲에서 선정을 닦던 발기(跋耆) 비구가 아난에게 다가가 말했다. “고요한 나무 밑에 앉아, 마음은 열반에 들어 참선하고 게으르지 말라. 말 많아 무슨 소용 있는가.”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든 아난은 그 때부터 부지런히 수행하여 마침내 마음을 깨닫고 비로소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하는 아난이 선정만을 닦던 가섭에게 쫓겨나는 이 장면은 선종의 입장이 고스란히 반영된 내용이다. 이를 통해 불교의 생명은 언어와 문자에 있지 않고 참선 수행을 통해 마음을 깨치는 데 있음을 강조하자 한 것이다. 성철 스님 또한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보아야할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에만 집착한다면 비록 말씀의 바다에 서 있어도 갈증을 면할 수 없다. 손가락 저편에 있는 달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언어와 문자 너머에 있는 본지(本地)의 소식을 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선의 입장에서 볼 때 언어에 집착하여 그것을 불법의 핵심이라고 믿는 것은 비루먹은 여우와 같은 것이다. 경전을 아무리 잘 외우고, 교리를 청산유수처럼 설명할지라도 작은 경계만 닥쳐도 버럭 화를 내고, 욕망과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이미 그곳에 달은 없다. 선은 부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역대의 조사들과 같이 보고 같이 행동하는 대장부의 길로 가는 것이다. 남의 소식에 연연하는 비루먹은 여우의 길이 아니라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사자와 같이 위엄 있게 걷고, 사자와 같이 당당하고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갖는 것이 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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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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