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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성철 스님을 모신 것은 인생 최고의 행운” 서울 삼정사 주지 원소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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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3 년 6 월 [통권 제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10,25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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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백련불교재단

 

'나의 스승, 성철'에서는 성철 스님 제자들의 인터뷰를 연재한다. 성철 스님을 만난 인연과 가르침을 받았던 일화, 자신의 공부 이야기를 등을 가감 없이 전달할 예정이다.

 

계절의 싱그러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5월은 기분 좋은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은 물론이고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날이 있는 달이기도 해서 불자들은 더 신심 충만한 5월을 보낸다.
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두고 서울 정릉으로 향했다. 삼정사 주지로 대중포교에 진력하고 있는 원소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서울 삼정사 주지 원소 스님

 

삼정사가 가까워지면서 거리에 달린 봉축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정릉에 절이 이렇게 많이 있었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수막 ‘과잉’이다. 삼정사로 가는 주택가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절만 5개다. 삼정사는 길 끝에 아담하게 앉아 있었다.

 

삼정사 마당에 들어서니 형형색색의 연등이 먼저 맞아준다. 삼정사는 대웅전과 요사채, 공양간이 들어간 3층 건물 하나와 공사가 중단된 지 꽤 된 것 같아 보이는 사리탑 모양의 전각 하나, 그리고 비교적 넓은 마당으로 돼 있다.

 

대웅전을 참배한 뒤 원소 스님의 처소가 있는 2층으로 내려갔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꽤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사형(師兄)이신 삼밀 스님께서 1976년도에 지은 건물입니다. 화장실이나 욕실을 보니 꽤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지요?” 원소 스님이 멋쩍게 웃는다.  

부처님오신날 준비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스님이었지만 차를 직접 내려 주며 찾아온 객을 맞아줬다.

 

 

 

삼정사 전경

 


백련암의 ‘별종'

 

“제가 1997년도에 삼정사에 왔습니다. 사형스님이 갑자기 입적하신 뒤 사찰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서 문도회 차원에서 강력히 추천하여 저를 ‘파견’했습니다. 처음에 와서는 이런 저런 송사 때문에 6년여 동안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재판을 끝내고 또 수습을 하니 한 10년이 금방 흘러버렸습니다.

 

은사스님이 살아계셨다면 삼정사에 상좌들을 절대 주지로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수행으로 볼 때, 문중의 사형스님들의 강압에 못 이겨 주지로 온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였습니다. 이제는 모두 체념하고 ‘이것도 인연이구나’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삼정사가 사찰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원소 스님은 삼정사의 실질적 창건주였던 삼밀 스님이 ‘명의등록’만 해놓고 입적해 한바탕 “지옥 같은” 홍역을 치렀다. 삼보정재의 유실을 막기 위해 뛰어다니다 이제야 한 숨을 돌리고 있다고 한다. 스님은 삼밀 스님이 진행했던 전각불사를 완성해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참선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한다.

 

스님은 현재 삼정사 참선반 회원들과 함께 매월 첫째 주말에 철야참선정진을 하고 있다. 토요일 밤 『증도가』 법문을 한 뒤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참선을 하는 일정이다. 앞으로도 스님은 개인 차원의 수행은 물론 대중들의 참선 정진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성철 스님 상좌다운 ‘향후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님은 어떻게 성철 스님의 제자가 되었을까?

 

“속가 집안 어른들이 오래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스님들이 병이 들면 속가 집에 오셔서 몇 달씩 요양하시다 가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분위기 속에 저도 자연스럽게 출가를 한 것 같습니다.”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를 했다.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다 행자반장까지 했다. 당시 행자반장은 “해인사 주지나 합천군수 부럽지 않은 소임이었다.”고 한다. 행자반장을 열심히 하고 있을 무렵, 원명 스님(前 연등국제선원장)이 백련암에 올라 갈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왔다. 마침 백련암에 행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큰절에 살면서 “백련암에서 사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는 소문을 접했던 터라 마음의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연이은 원명 스님의 제안에 스님은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성철 스님과 백련암과의 인연이 만들어졌다.

 

 


삼정사 주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원소 스님

 

백련암에 올라가니 원택 스님, 원천 스님, 원안 스님, 김 행자(훗날 원영 스님) 등이 성철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당시 원주 소임을 맡고 있던 원택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인사를 시켰다. “큰절에서 올라온 신(씨) 행자입니다.” 성철 스님이 방에서 나왔다. 성철 스님을 처음 보는 순간 “눈이 부리부리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출가 전에는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새로 온 행자라고? 무신 젊은 놈이 머리가 훌렁 까졌노? 하메(이미) 중이 됐네.” 성철 스님은 원소 스님을 보자마자 껄껄 웃었다.

 

원소 스님은 채공을 맡아 본격적인 백련암 생활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행자생활이었지만 점차 ‘백련암 스님’이 되어갔다. 시간이 지나 사미계(沙彌戒)를 받을 시기가 될 무렵 스님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사스님 같이 저렇게 청정하게 독신으로 수행하며 평생 살 수 있을까? 도저히 자신감이 서지 않아서 차라리 재가불자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백련암 큰방에 불을 때면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성철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꺽다리! 속가로 가봤자 큰 출세 못한다. 불도(佛道)를 열심히 닦는 것이 출세하는 길이다. 쓸데없는 망상 말아라.” 

좀처럼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던 행자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성철 스님이 내린 경책이었다. 원소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계(戒)를 받았다.

 

원소 스님은 계를 받기 전 강원에 가고 싶다는 뜻을 원택 스님에게 전했다. 그전까지 백련암 행자들이 계를 받고 강원에 간 적이 없었던 터라 원소 스님 역시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백련암에서 출가한 스님들은 계를 받고 보통 2~3년여 간 성철 스님이 내려 준 경전과 조사어록 20~30권을 보며 자체적으로 공부를 하고 선방으로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원소 스님의 말을 들은 원택 스님이 2주쯤 지나 성철 스님에게 보고를 했다. “신 행자가 강원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바로 가타부타 말씀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날따라 성철 스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고 한다.

 

“은사스님께서 반대를 하시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원택 스님께서 강원 갈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자들 중 최초로 강원에 간 상좌가 되었습니다. 백련암의 ‘별종(別種)’이 된 것이죠. 하하.”

 

스님은 해인사 강원을 마치고 율원까지 졸업했다. 강원에 다닐 때는 “방장(方丈)이셨던 은사스님께 누가 될까 매사 조심조심하며 살았다.”고 한다. 스님은 이후에도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동국대에서는 ‘퇴옹성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원소 스님이 계를 받을 때의 일이다. 원소 스님은 백련암에 2개월 먼저 온 원영 스님과 행자생활을 같이 했다. 원영 스님이 원소 스님보다 세납이 한 살 위다. 원영 스님은 당시 공양주, 원소 스님은 채공을 맡아 큰방 옆에 딸린 불을 때는 부엌에서 함께 생활했다.

 

계를 받기 며칠 전, 성철 스님이 두 행자를 불렀다. 법명을 내려주기 위해서다. “두 놈 중에 누가 한 살 적노?” 성철 스님이 운을 뗐다. “제가 한 살 적습니다.” 대답을 한 사람은 원영 스님이었다. “한 살 적은 놈이 ‘원영(圓瑛)’이고 한 살 많은 놈이 ‘원소(圓昭)’다.” 순간 원소 스님은 당황했다.

 

“제가 한 살 적은데 원영 스님이 먼저 대답을 해버렸어요. 제가 정정(?)을 하려고 하니 은사스님께서 저를 보시며 ‘법명이 맘에 안 드나?’라고 하십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날로 원영 스님과 저의 법명이 그렇게 정해져 버렸습니다.” 

원소 스님은 “그것도 인연”이라며 웃었다.

 

“하화중생(下化衆生)에도 소홀하지 않으셨다”

 

원소 스님은 성철 스님을 2년 밖에 시봉하지 못했다. 강원과 율원, 중앙승가대학에 가고 선방에 다니고 포교당 주지 소임을 맡다 보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원소 스님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은사스님은 독일 철학자 칸트처럼 시계 초침과 같이 정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습니다. 백련암 대중들은 보통 새벽 3시에 일과를 시작해 밤 9시에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은사스님께서는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108참회를 하셨습니다. 직접 예불을 하시는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렸어요. 새벽예불이 끝나면 무염식(無鹽食)으로 소량의 공양을 하신 뒤 하루 두 번 산책하시고 백련암 뜰의 채소밭과 정원수를 돌보셨습니다. 또 3000배를 한 신도들과 공부 점검받으러 오는 스님들을 접견하는 시간 외에는 참선과 독서로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성철 스님은 시간을 생명처럼 아꼈다고 한다. 제자들에게도 “수행자는 절대 게을러서는 안 된다. 시간을 생명으로 생각하고 아껴 써라.”고 늘 강조했다. 직접 솔선수범하면서 제자들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정진하기를 당부한 것이다.

 

“은사스님께 꾸지람을 들어도 우리가 잘못해서 들었던 것이기 때문에 섭섭한 마음이 안 들었습니다. ‘스승’이라고 한다면 성철 큰스님같이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소 스님은 “은사스님은 결코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소홀히 한 분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백련암에 주석하면서 3000배라는 ‘벽’을 친 것이 아니냐는 세간의 오해에 대한 해명이다.

 

“은사스님께서는 공부를 할 때 기본적인 신심(信心)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3000배는 절을 하면서 자기를 낮추고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를 키우라고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오는 신도들에게는 어떤 질문에도 답을 주셨고 또 가르침을 내리셨습니다. 공부를 여쭈러 오는 스님들에게도 철저한 점검을 해주셨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주시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공부에 대한 바른 길을 알려주시는 것도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원소 스님은 또 성철 스님의 ‘위법망구(爲法忘軀)’를 대중들이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리를 위해 몸을 던지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삼정사 입구의 표지석

 

“불교공부는 교학과 참선을 가릴 것 없이 반드시 지구력이 있어야 합니다. 재가불자들이 법문 잘하는 스님 있다고 이 절 저 절 철새 같이 몰려다니고 이런 수행 저런 수행하다가는 한 가지 공부도 옳게 성취하지 못합니다.

 

백련암 신도 중에 경북 성주에서 과수원을 하던 70대 할머니가 계셨어요. 한글을 모르시던 분이었는데 능엄주를 외우기 위해 초등학교에 다니던 손자에게 한글을 배우셨습니다. 나중에는 누구보다 능엄주를 잘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능엄주를 외운 뒤 화두를 받아 참선도 하셨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이 할머니의 열정을 여러 번 칭찬하셨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스님들에게 ‘출가자는 참선(參禪)해서 깨치는 것 외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출가든 재가든 참선을 통해서 자기를 바로 보는 생활이 되었으면 합니다.” 

원소 스님은 그러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공부에 매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제가 선방에 다닌 것은 4년에 불과합니다. 다른 공부에 비해 너무 짧았어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대중 선방에서 더 정진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 선방에 가지 못하더라도 삼정사 시민선방에서 대중들과 함께 깨달음에 관계없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정진하겠습니다.

 

제가 출가를 해서 친견한 스님들 중에서 성철 큰스님 같이 선교율(禪敎律)에 대해서 이론과 실천과 수행력을 완벽하게 겸비한 스님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성철 큰스님을 은사로 모신 것은 제 일생에 있어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서울 정릉 삼정사까지의 거리는 한참이나 된다. 성철 스님의 제자들이 소임을 맡고 있는 주요 사찰들이 영남권역에 있는데 비해 삼정사는 넓은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은사 성철 스님을 생각하는 원소 스님의 마음은 여느 제자 못지않게 가까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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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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