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거사선]
말과 문자 넘어선 언행일치의 가풍 보인 부설 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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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 2013 년 6 월 [통권 제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850회 / 댓글0건본문
한 달 전, 출장길에 전북 부안 내변산에 위치한 월명암을 참배한 적이 있다. 남여치매표소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1시간쯤 산길을 걸어 오르니 쌍선봉 아래에 비교적 넓은 절터가 나타났다.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함께 호남의 3대 성지로 명성이 높은 월명암은 꼭 참배하고 싶은 절이었다. 월명암은 신라 신문왕 12년(692)에 한국의 대표적인 재가불자인 부설 거사(浮雪居士)와 그의 딸 월명(月明) 스님이 창건했다는 유서 깊은 고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설 거사의 흔적은 월명암 사성선원 뒤편에 남아있는 오래된 부도 외에는 찾을 길이 없었다. 대신 법당 한 켠에 모셔진 진묵 대사(震默大師, 1562∼1633)의 진영이 이 도량이 만고(萬古)의 수행도량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스님이 되려다 재가자로 남은 이유
인도의 유마 거사, 중국의 방 거사와 더불어 ‘세계 3대 거사’ 중 한 분인 부설 거사는 원효 대사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스님이었다. 경주 불국사에서 출가한 그는 영희(靈熙), 영조(露照) 두 도반스님과 더불어 각처를 떠돌며 수행을 했고, 이곳 변산에 이르러 10년간 도를 닦은 뒤 오대산에 가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길을 재촉하던 중 날이 저물고 때마침 두릉(杜陵 : 현 김제군 성덕면 묘라리) 땅에 민가가 있어 그곳에 며칠 머무르게 됐다. 그리고 이때 독실한 불자였던 구무원(具無寃) 거사의 무남독녀 딸 묘화(妙花)가 부설에게 반했다. 18년간 벙어리로 살아온 묘화는 부설을 보고 말문이 트였고 “삼생의 연분이 있으니 부부가 되기를 원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죽겠다.”고 부모에게 고백했다. 일가족이 무남독녀를 살리기 위해 혼인을 간청하니 부설은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부설 거사는 등운(登雲), 월명 두 남매를 낳은 뒤 다시 이곳 변산을 찾아와 토굴을 짓고 마침내 일가족 모두 성도(成道)했다고 전해진다.
월명암에서 부설 거사의 삶을 잠시나마 돌아보게 된 것은 ‘어떻게 하면 세간에서 깨달음을 얻고 보살행을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필자의 오랜 화두에 대한 자문자답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재가자들은 부설 거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
첫째, 부설 거사가 환속한 것은 묘화 보살을 살리기 위한 자비심의 발로였지만, 그 선택에는 진속불이(眞俗不二)에 대한 확고한 안목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거사는 두 도반과 이별하기 얼마 전, 스님들과 읊은 선시에서 이미 이러한 심경을 밝히고 있다.
“공적의 오묘한 법 함께 잡고서/구름 속에 암자 하나 짓고 사노라./불이(不二) 예어 무이(無二)에로 돌아갔거니/뉘라서 전후삼삼(前後三三) 물어오는가./고운 꽃 바라보며 한가로이 졸고/창밖에 새소리도 때로 듣누나./곧바로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간다면/구구히 오래도록 닦아 뭣하리.”
부설은 텅 비어 고요하며 신령스런 지혜[空寂靈智]를 깨달아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닌[不二] 경지에서 더 나아가, 그 둘 마저도 공적한 무이(無二)에 노닐고 있음을 ‘구름 속에 암자 하나 짓고 사노라’는 상징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니 용과 뱀이 어우러진 세간에서 이렇듯 저렇듯 살아간들 무에 장애가 될 것인가. 게다가 ‘곧바로 여래지(如來地)에 들어’ 단박 깨닫는다[頓悟]면 굳이 산속에서 오래 정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거사가 이미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본래성품을 본 이른바 초견성(初見性)에 이르렀음을 웅변하는 것이리라. 거사의 이러한 안목이 해오(解悟)에서 나온 것이든 돈오(頓悟)에서 비롯된 표현이든, 그의 ‘닦는 바 없이 닦는’ 무수지수[無修之修]의 공부는 재가수행을 통해 더욱 깊어지게 된다. 결국 부설 거사의 환속은 저자거리에 들어가 보살행을 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심경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의 재가자 역시 ‘진속불이’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대승보살심이 거사선 수행의 기본자세임을 되새겨야 하리라.
부설 거사에게 배워야 할 것들
둘째, 부설 거사의 공부는 참선과 교학,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선교쌍수(禪敎雙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 그는 선방과 토굴에서 정진하기에 앞서 경을 깊이 공부해 선(禪)의 도리를 깨달아 이입(理入)한 뒤 보원행(報怨行),수연행(隨緣行),무소구행(無所求行),칭법행(稱法行)의 사행(四行)으로 행입(行入)을 완성해가는 달마 대사의 ‘이입(二入)’을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이치를 깨달아 현실생활에서 실천으로 통일하는 공부가 아니고서는 완전한 보림(保任)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부설 거사가 두 도반 앞에서 병을 쳐 언행일치의 가풍을 보이고 있는 모습. 김녕 금용사 벽화
환속 후, 마을에서 훈장 노릇을 하며 부처님법을 전해 온 부설 거사는 완전한 보림공부를 위해 마침내 변산 토굴 한 편에 담을 쌓아 무문관(無門觀)을 짓고 문 입구를 막은 후 작은 구멍으로 하루 한 끼 음식과 배설물만 처리하는 사관(死關) 수행을 5년간 결행한다. 이미 선(禪) 도리를 깨친 그이지만 지혜와 더불어 선정을 함께 닦는 ‘정혜쌍수’로 확실하게 보림을 한 것이다. 물론 이때 거사가 한 공부는 간화선이 성립되기 이전이라 온갖 생각을 끊고 묵묵히 자심(自心)을 관조하는 이른 바 묵조선(默照禪)을 참구한 듯 하다.
셋째, 부설 거사는 이론과 교학 위주의 문자선(文字禪), 구두선(口頭禪)을 단호히 배격하고 실참실행 위주의 선(禪)을 표방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옛 도반인 영희, 영조 스님이 다시 찾아왔을 때 거사는 세 개의 병에 물을 가득히 넣어 줄에 매달아놓고 병을 깨뜨리되 물은 쏟아지지 않는 것으로 서로의 공부를 시험해보자고 하였다. 두 스님이 병을 치자 병이 깨어지고 물도 쏟아졌으나, 거사가 병을 치니 병은 깨어졌지만 물은 병 모양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는 일화는 말과 문자를 넘어선 언행일치(言行一致)의 가풍을 상징한다. 이때 거사는 두 스님에게 “진성(眞性)은 본래 신통하고 영묘하여 밝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마치 물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다.”며 참된 법신은 생사에 매이지 않고 여여(如如)함을 법문하였다.
눈으로 보는 것 없으니 분별이 없고[目無所見無分別]
귀로 듣는 바 없으니 시비가 끊어졌네.[耳聽無聲絶是非]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 버리고[分別是非都放下]
다만 마음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할지어다.[但看心彿自歸依]
모든 시비ㆍ분별을 여의고 무아ㆍ무심의 삶을 살며 본심(本心)을 반조(返照)할 것을 당부하는 게송을 마친 거사는 곧 좌탈(坐脫)함으로써 생사에 자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설 거사와 그 가족의 전설적인 선화(禪話)는 몸이 비록 세속에 처해도 마음만 깨치면 세속이 곧 청산(靑山)임을 보여준 처렴상정(處染常淨)의 도리를 현시해주었다.
인터넷을 통해 양산되는 정보의 홍수가 선(禪)과 깨달음의 영역까지 침투한 요즘, 구두선은 그 어느 때 보다 만연되고 있는 현실이다. 부설 거사의 철저한 수행은 해오나 작은 깨달음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초월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오늘의 재가수행자들 역시 마음을 깨닫는데 안주하지 않고 마음의 힘을 자재하게 쓸 줄 알아서, 더불어 사는 이웃들에게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참된 법력(法力)을 갖추는 실천적인 노력이 절실하다 하겠다.
사진 설명 - 부설 거사가 두 도반 앞에서 병을 쳐 언행일치(言行一致)의 가풍을 보이고 있는 모습. 김녕 금용사 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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