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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및 특별기고]
성철 스님을 보는 시각에 대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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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배  /  2013 년 5 월 [통권 제1호]  /     /  작성일20-06-29 15:17  /   조회10,30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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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참에서 느낀 커다란 괴리

 

백련불교문화재단은 1995년부터 3년 여 간 계간지 「고경」을 발간한 바 있다. 당시 창간호에서 박성배 교수는 ‘성철 스님을 보는 시각에 대해’라는 주제로 장문의 특별기고를 했었다. 글에서 박 교수는 성철 스님과의 인연과 스님의 사상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불자와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던 박 교수의 글을 3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 편집자

 

“한국적인 것이란 어떤 것인가”를 밝혀 보려는 〈한국사상 세미나〉가 지난 10월초 미국의 뉴저지 주에 있는 드루 대학 ‘한국신학사상연구소’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원효사상〉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나의 발표가 끝나자, 한국에서 온 어느 신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경력을 보니까 절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한 적이 있던데 거기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홍보용 유인물을 보고 내 약력을 안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약간 망설였다. 그런 이야기는 하기로 들면 며칠을 두고 이야기해도 다 못할 긴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은 나의 이러한 망설임을 눈치 챘던지 질문의 범위를 좀 좁혀서 다시 물었다.

“절에서 공하는 것과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양자를 비교하여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참선, 인생의 고비를 극복한 힘

 

여전히 큰 질문이었지만 나는 간단하게 1966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큰스님을 모시고 묵언정진했던 이야기로 내 답변을 대신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나의 답변을 끝맺었다.

 

“요즘 대학에서 하는 공부는 한마디로 말해 책을 많이 읽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절에서 하는 참선 공부는 책도 문자도 모두 버리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공부가 다 애써서 열심히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결과는 양자 간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스스로 경험했습니다. 누가 저더러 책을 언제 가장 많이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때이었다고 답변하겠습니다. 그땐 책을 많이 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 책상 위에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철주야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인생에 진정한 힘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저는 제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었는데 모든 길이 다 막혀 완전히 캄캄해지고, 있는 힘이 다 떨어져 완전히 기진맥진한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한 줄기 빛이 필요했으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새 힘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책에서 얻은 지식은 힘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책도 문자도 다 집어 던져버리고 묵언으로 일관했던 백련암 시절의 참선, 그것은 빛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학생이 얼마만큼 내 말뜻에 공감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내 진정한 체험을 그에게 이야기해 준 것은 사실이다. 지금 성철 큰스님은 열반에 드시고 나는 도반들과 따로 떨어져 외국에서 살면서 불자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여전히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옛날 백련암에서 빛과 힘의 원천 같은 참선을 몸에 익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백련암에서 산 것은 1966년부터 1968년까지였다. 얼마 되지 않는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나는 내 인생의 많은 것을 정리할 수 있었다. 모두가 큰스님의 큰 법력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성철스님을 처음으로 소개해 주신 분은 일타스님이었다. 나의 성철스님과의 첫 인연은 1960년대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 무렵에 나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때 지도교수 중의 한 분이 김잉석 교수님이었다. 김교수님은 나에게 〈보조사상 연구〉라는 과제를 주셨다. 나는 보조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고승과 석학을 두루두루 찾아다녔다. 삼척 영은사로 탄허스님을 찾아가〈도서〉를 다시 배우고, 해인사로 운허스님을 찾아가〈절요〉를 다시 배웠다. 그리고 서울대학으로 박종홍 교수님을 찾아가 한국철학사를 배웠다. 원래 화엄학을 전공하신 김잉석 교수님도 보조사상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었다. 이러한 은사들의 지도 덕택에 나의 보조 연구는 큰 진전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느 날 나는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때 해인사에 계셨던 일타스님께서 “성철스님은 보조국사를 비판한다”고 귀띔해 주셨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뉴스이었다. “이 세상에 보조국사를 비판하는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함께 왜 비판하는 것일까 하는 지적 호기심이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성철스님을 친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성철스님은 깊은 산중에서 철조망을 치고 살면서 아무도 안 만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성철스님을 친히 뵙지 못한 채, 일타스님에게서 들은 ‘성철스님의 보조비판’을 나의〈보조사상 연구〉라는 논문에 소개했다. 이 논문은 다음해에 취직논문으로 동국대학교에 제출되었다. 이때 나는 큰 곤욕을 치렀다. 송광사 출신이신 김잉석 교수님이 국로(國老:보조국사를 높여서 쓰는 말)를 모독했다 하여 내가 제출한 논문의 심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김교수님은 나더러 해당 부분을 삭제하여 다시 제출하라고 종용하셨다. 나는 이를 거부했다. 필자 자신의 학설도 아니고 단지 제3자의 비판적 의견을 소개했을 뿐인데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학문의 세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사위원회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취직이 되었다.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성철스님 때문에 하마터면 동국대학교의 교수자리를 놓칠 뻔하였다. 나의 성철스님과의 인연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만나지도 않고 시작되었던 성철 스님과의 인연

 

취직 논문으로 제출한 〈보조사상 연구〉가 통과되어 취직이 되었지만 대학에서는 나에게 보조사상 강의를 맡기지는 않았다. 내가 처음에 맡은 과목은 일반논리학, 철학개론, 인도철학사 등이었다. 그러나 정규 학사과정을 벗어나면 보조사상을 강의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대학선원’ 토요법회나 ‘대학생불교연합회’ 수련대회 같은 곳에서 나는 보조사상 강의를 수없이 많이 했다. 내 강의의 핵심은 항상 ‘돈오점수설’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청중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다. 비록 내 취직논문에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을 소개하기는 했지만, 그 당시 나는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돈오점수설’을 비판한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은 그 존재조차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엔 ‘돈오돈수설’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것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도 거의 무감각했었다. ‘돈오점수설’에 대한 나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불교연합회’에 구도부가 생기고 내가 그 지도를 맡은 다음부터였다.

 

 


 

 

문제는 뚝섬 봉은사에 ‘대학생수도원’을 차리고 거기서 구도부 학생들과 합숙하는 과정에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의 이상은 대학생활과 수도생활을 겸전한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절에 들어가 스님들과 함께 참선한다”는 우리의 구호는 그대로 우리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현실 앞에 그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이상과 현실의 거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세운 서원과 이 서원을 실천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화려한 출발 뒤에 너무나 많은 난관이 복마병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무엇 하나도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도 강조했던 조석예불과 새벽정진을 빠지는 경우가 잦아지고 학생들의 성적은 떨어지고 나의 연구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오랜 숙원을 이룬 듯한 기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대학생활도 수도생활도 모두 다 실패라는 참담한 심경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석달이 지나자, 무시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대학생활과 수도생활을 겸전한다”는 것은 두 직장을 가지고 밤낮으로 뛰는 것만큼이나 힘에 겨운 중노동이었다. 그때 우리에겐 휴식이란 것이 거의 없었다. 쉬는 시간이라고는 밤에 쓰러져 자는 몇 시간의 잠, 그것뿐이었다. 이런 생활을 석달 계속하니 사람의 몸이 견디지 못했다. 지고 다닐 수 없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녔던 것이다. 여기서 나의 돈오점수적인 수도이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서는 “먼저 깨닫고, 그 다음에 닦는다”는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사상이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은 중국의 종밀(宗密 : 780-841)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닦음은 깨달은 다음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마치 이미 깨달음의 문제는 해결된 듯이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깨달음의 문제는 제쳐놓고 닦음의 문제에만 골몰했었다. 그러다가 닦음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다시 선오(先悟)라고 말할 때의 오(悟)가 무엇이냐라는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의 나의 이해로는 돈오한 다음에 점수한다고 말할 때의 ‘점수(漸修)’는 보살만행(菩薩萬行)을 의미했다. 그러나 자기가 제도 받기 이전에 남들이 먼저 제도 받도록 돕는다는 ‘자미득도 선도타(自未得度 先度他)’의 정신으로 사는 수도자가 일체 중생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한다는 보살만행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정말 쉽지 않았다. ‘쉽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고 정직하게 말해서 그 일은 나에게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꽉 막혔다. 진퇴양난이었다. 어떻게든 이 짐을 내려놓아야 살 것 같은데 그게 쉽지 않았다. 명분이 없었다. 너무 시작이 거창했고 너무 큰 서원을 앞세웠기 때문에 슬그머니 그만둘 수조차 없게 되어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박성배

동국대와 뉴욕주립대 등에서 불교학을 가르쳤다. 성철 스님을 모시고 출가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한국불교의 핵심 사상을 정리했다. 저서로 『깨침과 깨달음』, 『몸과 몸짓의 논리』, 『재미 불교학 교수의 고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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