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유배지에서 나눈 다산과 혜장화상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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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2 월 [통권 제130호] / / 작성일24-02-05 10:01 / 조회1,933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40 | 만덕산 백련사 ④
조선시대에 오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승군들의 희생과 공로로 불교가 지위를 다소나마 회복하게 되는데, 그때 조선불교는 부용영관芙蓉靈觀(1485~1571)의 제자대에 와서 서산대사인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과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로 나뉜다. 서산대사의 종파는 다시 크게 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과 편양언기鞭羊彦機(1581~1644)로 나뉘는데, 백련사는 소요태능의 맥을 잇는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조선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백련사와 소요태능의 법맥
백련사의 8대사는 소요태능~해운경열海運敬悅(1580~1646)~취여삼우醉如三愚(1622~1684)~화악문신華岳文信(1629~1707)~설봉회정雪峰懷淨(1678~1738)~송파진원松坡眞源(1686~?)~정암즉원晶巖卽圓(1738~1794)~연파혜장蓮坡惠藏(1772~1811)의 맥을 말한다. 이들 중에는 취여, 화악, 설봉대사와 혜장화상과 같이 대흥사의 종사宗師나 경사經師로 활약한 사람들도 있다.
서산대사의 적전嫡傳 제자인 소요대사가 백련사에서 종풍을 다시 살려 선교禪敎를 통합한 법을 펼쳐나가면서 화엄학에 정통한 교학대덕들과 선장들이 나와 백련사는 대흥사와 함께 조선 후기 불교의 중심적인 공간이 되었다. 소요대사의 법맥은 해운대사에게로 전해졌는데, 스승보다 3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취여대사와 그의 발우를 전달받은 화악대사 때에는 그 선법에 감응하여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설봉대사는 법을 펼친 후 열반할 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는데, 그 사리는 가까이에 있는 미황사美黃寺에 봉안되었다.
뜬구름은 온 곳이 없고
간 곳도 자취가 없네
구름 오고 가는 자취 잘 보게나
오직 하나의 허공에 지나지 않는 것이네
부운래무처 浮雲來無處
거야역무종 去也亦無蹤
세간운래거 細看雲來去
지시일허공 只是一虛空
일찍이 의상義相(=義湘, 625~702)대사가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라고 한 점을 꿰뚫어 본 것일까? 즉 “간다 간다라고 하지만 원래의 그 자리에 있을 뿐이고, 왔다 왔다라고 하여도 원래 떠난 자리에 있을 뿐”이라는 그 이치 말이다. 한국서예협회 이사장인 서예가 문정文鼎 송현수宋鉉秀(1963~ ) 선생이 이 문구를 멋있게 포자하여 전각으로 새겼다.
송파대사는 미황사에서 설봉대사에게 출가하였고, 정암대사는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 대사에게 법을 배우고 송파대사의 법맥을 이었다. 정암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대중에게 강설하기보다는 무한한 자비행을 베풀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인근의 대흥사는 12종사와 12강사講師를 배출하였는데, 연담유일이 12종사의 마지막을 장식하였고, 총명이 하늘을 찌르는 젊은 아암화상 즉 연파혜장이 12강사의 끝자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다산과 혜장화상의 우정
박람강기博覽强記한 혜장화상은 본시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대둔사로 출가하여 박학다식한 춘계천묵春溪天黙 대사에게서 배워 일찍부터 낭중지추의 명성을 얻고 연담유일과 운담정일을 모시고 화악문신의 적통을 이었다. 나이 서른에 두륜산의 대법회에서 주맹이 되었는데, 이때 모인 사람들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1806년 그가 백련사로 거처를 옮겨 왔을 때 당시 다산선생이 머물고 있던 보은산방寶恩山房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주역周易』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했다. 다산선생과 혜장화상과의 교유는 승속을 벗어나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길을 자주 찾아간 것에는 혜장화상과 다산선생과의 간담상조肝膽相照하는 지음知音 간의 만남이 그야말로 열락임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때 그 사람들이야 다 사라지고 없지만, 후학으로 학문의 길을 걸어가는 나에게는 실제 그 길을 걸어보며 ‘만남의 열락’을 상상해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지음 간에는 아무리 먼 길도 만나러 가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어도 기다려지는 것이리라. 공자도 “간담상조하는 벗이 있어 먼 길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한 것이리라.
다산선생이 10살 아래인 혜장화상을 처음 만난 것은 강진으로 유배를 온 지 5년째 되는 해에 소문난 혜장화상이 다산선생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여 신분을 숨기고 마을 노인을 따라 백련사에 갔을 때였다. 한나절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어둑해질 때 헤어져 다산선생이 북암北菴에 이르렀는데, 그때 혜장화상이 헐레벌떡 뒤쫓아와 선생을 몰라보았다며 예를 갖추고, 하룻밤 유숙하시라며 손을 잡는 바람에 서로 밤을 잊은 채 학문적 의견을 나누게 된 것이 그 첫 만남이었다. 『주역』에 뛰어난 혜장화상이 다산선생이 던진 질문에 답을 못하면서 그 시간 이후 혜장화상은 다산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둘 사이의 학문적 만남은 깊어지게 된다.
혜장화상은 불서佛書에서는 오직 『수능엄경首楞嚴經』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좋아했다. 주문呪文이나 기도를 멀리하고 외전外典에 몰두하여 당시 승려들이 매우 걱정하기도 하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혜장화상은 『주역』 이외 『논어論語』, 역법의 수, 율려律呂의 도와 성리학 등에도 공부가 깊어 다산선생이 묵고 있던 보은산방과 다산의 초당으로 분주히 내왕하며 학문적 의견을 논하였고, 변려문騈儷文에도 능통하여 다산선생을 놀라게 하였다. 다산선생은 궁벽진 곳에서 실로 생각하지도 못한 지음을 만난 것이다. 그는 혜장화상이야말로 승려 이전에 세속의 선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진정한 숙유宿儒라고 하였고, 흉금을 터놓고 생각을 주고받았다.
혜장화상은 백련사의 주지로 지내면서 대흥사의 강사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35살에 사찰의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그만의 고독을 씹으며 술로 날을 보내다가 결국 40살에 북암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몸을 담고 있는 불가의 모습을 보아도 옛 백련결사의 결기는 이제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불법의 진면목에 대해 논할 도반도 귀하게 되었다.
바깥세상을 보아도 다산선생 같은 뛰어난 인물이 유배지에서 그 목숨을 기약할 수 없고, 속유俗儒들이 설쳐대고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모함하고 죽이는 세상이니 안으로 보나 바깥으로 보나 실로 답답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생각이 견고하여 누구와 이야기를 쉽게 나누지도 않았으니 그나마 술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느 때인가 다산선생은 혜장화상의 센 고집을 지적하며 “어린아이 같이 될 수 없겠는가.” 하는 말에 당장 호를 어린아이라는 뜻인 아암兒菴으로 바꾼 혜장화상이었지만 어린아이의 텅 빈 마음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혜장화상의 제문과 탑명을 쓴 다산
때로는 만나서 서로 생각을 나누고 때로는 글을 통해 속 깊은 마음을 보이기도 했던 혜장화상이 입적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다산선생은 마음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붓을 들어 <제아암혜장문祭兒菴惠藏文>의 제문을 지었다. 선생은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도 지었는데, 그 명銘이 “찬란하던 우담바라여,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었구나. 훨훨 날던 금시조여, 날아와 앉았다가 날아가 버렸구나.[엽엽우발燁燁優鉢, 조화석언朝華夕蔫. 편편금시翩翩金翅, 재지재건載止載鶱]...”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읽을 때마다 진한 감동을 느낀다. 젊은 지음의 죽음 앞에 안타깝고도 애간장 녹이는 슬픔을 생각해 보면 다산선생의 마음이 짐작이 간다.
1801년 다산선생은 큰형 정약현丁若鉉(1751~1821)과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1760~1801) 등의 일족들이 천주교를 믿었다고 하여 참수를 당하는 신유박해의 참변을 겪고,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1758~1816)과 남도로 귀양을 와서 형은 흑산도黑山島로 떠나고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는 생이별을 한 채 지내고 있었다.
혜장화상을 떠나보내고 다산선생은 일찍부터 국가개혁의 구상을 차례로 집필하여 완성하였다. 1817년에는 조선의 부국강병 실현을 목표로 설정하고 기존 정치제도와 그 실행의 개혁을 논구한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완료하고, 1818년에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 마재馬峴에 은거하며 정부와 공직제도의 개혁에 관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마무리하는 일에 집중하여 1821년에 집필을 끝냈다. 1822년에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전제로 하여 형법제도와 그 실행의 개혁에 관한 『흠흠신서欽欽新書』의 집필도 모두 마쳤다.
조선이 망한 뒤에 출판된 조선 개혁론
다산선생도 8대에 걸쳐 대과大科에 합격한 서울경기의 명문집안 출신이어서 귀양을 가지 않았으면 중앙 정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러나 당쟁의 싸움 속에 유배를 당하고, 세상과 나라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여 보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자신이 실제 나랏일을 맡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바로 되고 백성이 행복하게 살려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리라. 그 결과가 위와 같은 저술을 세상에 펴내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삶을 치열하게 산 것이다. 기술에 대해서 더 알려고 했고 상공업에 대해서도 적극 관심을 가졌다.
군주가 아니라 백성이 나라의 중심이고 백성의 현실적인 삶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생각을 가져야만 하는 일이지만, 그때까지 조선은 주자의 성리학에만 매달려 있어서 그러하지 못했다. 기호남인畿湖南人으로 분류된 다산선생의 이 목소리를 일찍이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물실국혼勿失國婚’ 즉 ‘딸을 왕비로 만들어 국가권력을 절대 놓치지 말자’고 굳게 맹세하고 혈안이 되어 긴긴 권력투쟁을 이어온 서인노론세력들이 귀담아 들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다산선생이 저술한 1표表 2서書의 이런 경세론도 또 누가 어떤 모함을 하며 시비를 할지 위험하여 당시에는 목판으로 새겨 책으로 출간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세상에서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 1표 2서는 일제 식민지 시기인 1930년대에 들어와서 다산선생의 저작들을 모두 모아 활자본으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출간할 때 그에 포함되어 처음 세상에 알려졌고, 그 후부터 이 책에 대한 소개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때는 이미 다산선생이 개혁하려고 했던 조선은 일본에게 망하여 사라진 지 오래된 때였다.
그러나 세상은 조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1776년에 아메리카에서는 영국 식민지를 청산하고 근대국가가 탄생하였고, 1789년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근대헌법인 미합중국헌법(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이 발효되어 국민을 주인으로 세우는 국민주권국가 즉 입헌민주국가가 출범하였다. 다산선생이 이런 책을 저술하며 시대를 아파하고 있던 때 미국에서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 재임 1789~1797), 존 애덤스John Adams(1735~1826, 재임 1797~1801),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재임 1801~1809),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1751~1836, 재임 1809~1817), 제임스 먼로James Monroe(1758~1831, 재임 1817~1825) 같은 박학독행博學篤行한 대통령들이 나와 세상에 처음 보는 대통령제 근대국가를 성공시키고, 제임스 먼로는 ‘먼로독트린Monroe Doctrine’을 선언하여 세계무대에서 미국이 독자 행보를 하겠다고 천명하던 시기였다. 이후 세상에서는 많은 나라들에서는 속속 군주제가 폐기되고 민주제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근대화에 뒤떨어진 것을 자각한 일본은 1868년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키고, 1875년 운요호雲楊號 사건을 일으켜 1876년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결국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게 개방하게 하였다. 이미 200여 년 전에 아라이 하쿠세이(新井白石, 1657~1725)는 주자학자임에도 서양에 대하여 연구하여 『서양기문西洋紀聞』을 세상에 내놓았다.
개국과 부국강병론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주도가 되어 1889년 아시아 최초로 근대헌법인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을 만들어 의회를 설치하고 나라를 입헌군주제로 바꾼다. 이런 그가 만주와 조선을 병합하여 대륙국가로 확장하려다가 결국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에게 저격되어 제명대로 살지 못하게 되지만, 이런 일은 20년 뒤에 벌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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