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백련사를 중건한 영수 행호화상의 업적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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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4 년 1 월 [통권 제129호] / / 작성일24-01-05 10:45 / 조회1,844회 / 댓글0건본문
만덕산 백련사 ③
정종섭
다시 백련사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천인화상은 스승의 죽음 앞에서 제문을 지어 올렸으며, 스승의 부도를 세웠을 때도 제문을 지었다. <원묘국사비>를 세운 후 기일에 제사를 지낼 때에도 천인화상이 제문을 지어 올렸다.
백련사 원묘국사비와 부도림
<원묘국사비>는 임진왜란 이후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하나의 돌로 된 지대석과 귀부龜趺만 남아 방치되어 내려왔다. 조선시대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때 백련사의 탄기坦奇화상이 절의 내력이 잊혀질 것을 염려하여 성균관사성을 지낸 남악南岳 조종저趙宗著(1631~1690) 선생에게 사적비의 비문을 부탁하여 1681년에 <백련사비白蓮寺碑>를 세웠다.
이때 지대석과 귀부의 돌은 그대로 사용하고 비신의 돌은 새로 마련하여 비문을 새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최근에 새로 세운 비각碑閣 안에 그대로 서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탑비 등을 새로 세우는 일이 많았는데, 이때에는 부재部材가 부족하였는지 남아 있는 옛 부재를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튀어나온 두 눈에 무서운 인상을 하고 있는 거북은 높이가 높은 편이다. 머리 아래쪽으로 수염이 길게 내려온 모양은 고려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귀부 양식이다. 지붕돌은 용마루에 머리가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용 두 마리를 조각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붕돌의 모양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후기 사대부의 석비石碑 양식을 하고 있다. 비신은 그 옆면에 연화문蓮華紋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이 양식은 고려시대에 나타나 조선시대까지 비석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최자 선생이 지은 비문은 1478년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기 때문에 원래의 귀부를 사용하여 비를 세우고자 했을 때에는 최자 선생이 지은 비문을 새긴 원묘국사의 탑비를 세우고 사적비는 따로 세웠어야 옳은 것인데, 무슨 연유인지 지금과 같이 되어 있다.
<원묘국사비>의 글씨는 선조宣祖(재위 1567~1608)와 정빈靜嬪 민閔씨 사이에 난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1604~1651)의 아들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 1693) 선생이 쓰고, 그의 동생인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1640~1699) 선생이 돌에 새겼다. 형제가 모두 명필이었고 북경에도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다녀와 서화에도 큰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우 선생은 왕실의 어필, 『선원록璿源錄』을 정리했고. 우리나라 글씨들을 수집하여 『동국명필東國名筆』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금석자료를 모두 모은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를 간행하여 금석학의 문을 연 주인공이기도 하다. 선조의 대를 잇는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은 선조와 공빈恭嬪 김씨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들이기에 인흥군과는 친형제가 아니다.
당시 종실의 큰 어른들이 글씨를 쓰고 새긴 것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1396~1486)이 불가에 귀의하여 1482년 나이 87세 때 이 절에 와서 동전東殿에서 지낸 일과 백련사에서 왕실을 위한 수륙재를 지낼 수 있게 전답田畓을 시주한 일 등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효령대군은 불심이 깊어 배불과 호불로 분분하던 조선 초기에 불교를 적극 옹호하고 평생 불사에 진력한 왕실불교의 중심인물이었다.
장차 세종이 되는 셋째 동생인 충녕대군忠寧大君(1397~1450)에게 왕 자리를 넘겨준 맏형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이나 둘째 형 효령대군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후세에 아무리 형 둘이 동생에게 왕 자리를 양보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상한 행동을 하고 불가에 귀의했다고 하지만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사람에게 물어볼 수 없으니 그 심사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말이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로 들어서면 오래된 동백나무의 숲속 부도림에는 여러 기의 부도탑이 있다. 사지에도 호설탑虎齧塔 이외에 무명의 3기의 부도탑이 있다고 되어 있다. 절 인근에는 소년탑少年塔, 진지탑鎭地塔, 총신聰信대사의 부도인 월인탑月印塔 등이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진언이 새겨져 있는 것도 있으며, 원구형의 부도탑도 있다. 현재의 부도림에 부도탑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보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과 다른 곳에서 옮겨 놓은 것도 있는 것 같다.
이들 부도탑들 가운데 가장 잘 조성된 부도탑이 하나 따로 서 있는데, 확실하지 않지만 이것이 <원묘국사중진탑>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도탑은 방형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연화문蓮花文의 중대석中臺石이 있으며, 상대석에는 희미한 무늬가 남아 있다. 고복형鼓腹形을 하고 있는 몸돌에는 이어진 구슬무늬가 두 줄로 새겨져 있고, 옥개석의 경사는 완만하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보주寶珠 등이 있다.
지눌의 수선결사와 함께 고려 후기 불교를 주도한 백련결사
요세화상은 무신란 이후 최우 집권 시대까지 혼란의 시대를 살다 갔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과 국가의 혼란스런 양상을 보면서 그는 무엇을 했을까? 출가한 승려가 세속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란 있을 것 같지 않기에 백성들이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불법을 원래의 모습대로 바로 세우는 것에 원력을 세운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불교의 혁신운동에서는 지눌화상과 뜻을 같이 했지만, 수행자 중심의 선 수행에 집중하는 지눌화상의 결사운동과는 달리 모든 대중이 참회하고 염불하는 천태삼매를 실천하는 결사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요세화상에게 염불수행은 결사의 수행법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염불을 하지 않아도 마음의 본성을 깨달으면 바로 정토에 왕생한다고 하며 염불행을 비판한 지눌화상의 입장과는 실로 다른 것이었다. 지눌화상에게 있어 정토왕생을 위한 수행법이 염불이 아닌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이었다면 요세화상에게 있어서는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염불을 해야 120가지 병폐를 고칠 수 있다고 보았다. 요세화상은 천태종을 종지로 삼아 ‘법화삼매참의’에 의거한 수행을 하였다. 수행자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이런 실천을 통하여 정토왕생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백련사에는 요세화상이 보현도량을 연 이래 8국사가 나왔다. 원묘요세~정명천인靜明天因~원환圓睆~진정천책眞靜天頙~정혜원조靜慧圓照~원혜진감圓慧眞鑑~진감정오眞鑑丁午~목암혼기牧菴混其로의 계보를 말한다. 다만 원환, 원조, 목암 등이 국사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4대 주맹主盟을 한 사람은 천인화상과 법형제인 진정국사 천책화상이다. 천책화상은 1243년에 상주尙州 공덕산功德山에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그 주맹으로 활동하였는데, 당시 이를 동백련사東白蓮社라고 하고 강진의 백련사를 남백련사南白蓮社라고도 하였다. 동백련사의 결사운동에는 상주 수령인 최자 선생과 그의 아들 최유엄崔有渰(1239~1331)이 최대의 후원자로 성원하였다. 백련결사의 운동은 널리 퍼져 상주뿐만 아니라 완도와 제주 등지로도 확산되어 갔다. 그는 요세화상 이후에 백련사의 법석을 중흥시켰는데 당시 지은 「만덕사법화도량소萬德寺法華道場疏」와 「만덕사연경법석소萬德寺蓮經法席疏」가 남아 있다. 그는 시도 잘 지었으니, 다산 선생은 신라와 고려에 글로 뛰어난 사람을 꼽으라면 최치원과 천책화상, 이규보가 으뜸이라고 평하였다. 『동문선』에는 천책화상이 지은 글이 많이 실려 있다.
이렇게 백련사는 요세화상의 백련결사운동으로 조계산의 지눌화상의 수선결사운동과 함께 고려후기 불교계를 주도하는 주요사찰이 되었다. 결사운동이 확산되어 가던 이 시기는 강화도 천도시기 불교는 주로 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하였는데, 천태종과 조계종의 이런 결사운동은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원간섭기인 1284년(충렬왕 10) 개경에 충선왕忠宣王(재위 1298~1308)과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원찰로 묘련사妙蓮寺가 창건되었고, 백련사 출신의 승려들이 이곳으로 진출하면서 백련사의 사세는 퇴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개경에서 활동한 원혜대사와 정오대사는 국사나 왕사로 책봉되었다. 이렇게 백련사는 절정의 시기에서 하산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고려 말에는 왜구들의 침략으로 절이 소실되었고, 유교를 통치이데올로기로 내세운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황폐해져 간 것으로 보인다.
백련사를 중건한 영수 행호화상과 효령대군
조선시대 초기에 주요 사찰을 거의 장악하며 교세를 확장해 가던 천태종의 영수 행호行乎(?~?)화상이 이 절에 들렀다가 황폐함에 놀라 중건하기를 발원하고 1430년(세종 12)에 제자들과 일을 시작하여 1436년에 불사를 마쳤다. 그 규모와 양식으로 볼 때 옛 모습을 다 회복했을 정도였다. 행호화상은 태종과 그의 아들인 효령대군, 성녕대군誠寧大君(1405~1418) 그리고 세종과 그의 아들 안평대군 등과 친밀하게 지냈다. 특히 효령대군은 행호화상을 스승으로 삼아 불교에 귀의하고 제자의 예를 갖추어 모셨다. 행호화상이 그런 효령대군에게 백련사의 중창을 도와줄 것을 청하자 대대적으로 나섰을 뿐 아니라 관리들도 적극 동참하는 바람에 빠른 기간 안에 옛날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 뒤 성종 시기에도 효령대군은 백련사에 시주를 많이 하였다.
이 당시 절은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동원에는 당우들이 거의 20동에 이르렀고, 서원에는 그 반 정도가 지어졌다. 동원에는 만경루, 진여문, 대웅보전, 시왕전, 나한전, 극락전, 효령대군이 지내던 동전東殿(=오죽전烏竹田), 약사전, 관음전, 팔장전八藏殿(=판전板殿), 승당 등 전각들이 20동을 넘었다. 서원에는 명원루明遠樓, 팔상전, 청운당, 백운당, 망월전望月殿 등이 있었다.
행호화상은 최충의 후예로만 알려져 있고 일생을 알 수 없다. 초기에 천태종의 중심 사찰인 원주 각림사와 요절한 성녕대군의 능침사원인 고양 대자암大慈庵에 머물기도 했고, 두류산의 금대사金臺寺와 안국사安國寺, 천관산의 수정사水淨寺에 주석하다가 백련사에는 늦게 와서 주석하였다.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윤회尹淮(1380~1436) 선생이 지은 「백련사기白蓮寺記」에 그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백련사는 외적으로부터 침탈을 자주 당해온 터라 행호화상은 절 둘레에 토성도 쌓아 절의 방비에도 힘썼다. 현재도 그 토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세종이 즉위한 후 행호화상은 판천태종사判天台宗師로 되었다. 세종은 처음에 배불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친불로 돌아서는데, 태조의 원찰인 흥천사興天寺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국가가 직접 관리하였다. 왕의 지원으로 행호화상은 선종의 총본산인 흥천사의 주지를 맡아 당대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물론 왕실에서는 효령대군이 불교에 적극적이었고, 설법으로 유명한 늙은 니승 사실師室도 존경하여 재원을 모아 불사를 적극 지원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정인지鄭麟趾(1396~1478) 등 신하들은 불교가 왕실에 점점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상소를 올려 왕실의 분위기를 쇄신할 것을 간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처음에는 효령대군의 호불적인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그대로 두었다.
아무튼 왕실은 점점 친불적인 태도로 바뀌어 가고 이를 우려하는 신하들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상황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왕실의 지원으로 불교의 영향력을 키워 가던 행호화상은 유교세력의 표적이 되어 결국 제주도에 유배되어 장살杖殺되고 말았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고승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는 사태는 나암보우懶庵普雨(1515~1565) 국사와 환성지안喚醒志安(1644~1729) 화상에게서도 반복된다.
백련사의 전각과 산내 암자
백련사의 누각은 그 후에 허물어졌는데, 효종孝宗(재위 1649~1659) 때 현오玄悟 화상이 서원西院의 전각들과 만경루를 중수하였다. 1760년에 대화재로 대웅전과 만경루萬景樓를 위시한 수백여 칸의 당우들이 모두 화마에 사라지고 약사전과 관음전만 겨우 살아남고 불상만 건졌을 정도였다. 이듬해 원담圓潭 화상 등이 형편대로 재원을 마련하여 중건을 하니, 대웅전, 극락전, 나한전, 시왕전, 고루鼓樓가 있는 진여문眞如門, 비전碑殿, 판전板殿, 약사전, 관음전으로 도량이 이루어졌다. 1678년에 조성되어 백련사에 모셔졌던 아미타삼존불은 현재 목포의 달성사에 옮겨져 있다.
그 옛날에는 백련사에 속한 암자들이 많았는데, 이 당시에는 1745년 북쪽 기슭에 탄징坦澄화상이 세운 수도암修道菴과 그 아래 1752년에 세심洗心 화상이 세운 세심암洗心菴만 남아 있었다. 판전에는 세조 때에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인출한 완질본과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 화상이 송나라에서 교장敎藏을 구해와 간행한 원각판을 여기서 중각重刻한 경판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만덕사지』에 의하면, ‘대웅보전大雄寶殿’, ‘진여문眞如門’, ‘만경루萬景樓’, ‘명부전冥府殿’, ‘향로전香爐殿’, ‘세심암洗心菴’, ‘수도암修道菴’의 현액은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 선생의 글씨라고 했다.
원교 선생은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에 백부가 처벌될 때 연좌되어 부녕富寧과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어 25년간 유배생활 끝에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부인은 선생이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진自盡하였다. 그의 나이 16살 때인 1721년에 그는 예조판서이던 부친이 노론 4대신을 탄핵한 일로 유배되어 사망하는 일을 겼었다. 원교 선생의 큰 아들이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지은 이긍익李肯翊(1736~1806) 선생이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 선생의 양명학陽明學을 이은 신재信齋 이영익李令翊(1740~?)이다. 아버지와 아들들이 모두 글씨에도 뛰어났다. 일본에서는 주자학의 흐름과 달리 나가에도쥬(中江藤樹, 1608~1648)가 양명학을 제창하여 전개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러던 것이 그간에도 많이 허물어져 1800년대 『만덕사지』를 편찬할 당시에는 1761년에 건립한 대웅전, 극락전, 나한전, 시왕전, 진여문과 화재에 살아남은 비전碑殿, 판전, 약사전, 관음전만 남아 있었다. 만경루에 걸려 있던 현판은 다행히 살아남아 진여문에 달아놓았다. 행호화상이 중건한 후 330여 년이 지난 절의 모습은 이렇게 초라하게 되어 버렸다. 만경루가 있었던 터는 만경대萬景臺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산의 유배와 불교와의 인연
다산선생은 1801년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다산에는 1808년부터 머물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이전에는 불교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불교에 관하여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산에 머물기 시작한 후 다산 선생은 해마다 꽃이 피는 계절이면 천인, 천책, 정오 세 국사를 기리며 그들이 주석하던 석굴인 용혈암龍穴菴에 자주 가곤 했는데, 절벽을 따라 흘러내리는 용천龍泉과 풀이 난 암자의 옛터에 초석만 남아 있고 능허대凌虛臺, 초은정招隱亭은 무너지고 없었다고 했다. 한 시절 치열하게 살다 간 대사들과 그들에게서 불법을 배우고자 몰려들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실로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백련사에 속한 많은 암자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인근 완도와 청산도에 낡은 당우가 몇 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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