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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인환스님 ⑪ 일본 유학과 캐나다 대각사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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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12 월 [통권 제128호]  /     /  작성일23-12-04 14:03  /   조회1,69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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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원허스님이 강원도 낙산사에서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스님은 1953년부터 낙산사 주지를 맡아 전쟁 중에 전소된 가람을 재건하셨고, 후에는 성북구 흥천사의 적조암에 계셨어요. 나는 부산에서 올라와 은사님을 보필하며 적조암 총무를 보았어요. 이 기회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편입하여 1964년에 졸업했습니다. 다시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1966년에 마쳤어요. 이때 스승 원허당 효선대종사께서 입적하셨어요. 스님은 정화비상회의 의장 등을 역임한 공로로 총무원 장례로 조계사 법당에서 영결식과 49재를 성대히 봉행했어요.  

 

사진 1. 제6회 한글대장경 집필자 회의(불암사, 1966)때 인환스님(오른쪽 안경 낀 분).

 

동산스님 석영첩과 불교 교재 편찬

 

적조암에서 소임을 살면서 기억나는 것은 『동산대종사석영첩』(1967) 발간입니다. 동산스님의 사진집인데, 상좌인 원두스님이 진행했어요. 대부분 귀중한 사진 자료들이에요.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중·고등학교 불교교과서 집필입니다. 법정스님, 박경운 씨, 서경수 교수, 나 이렇게 넷이서 적조암에서 만나 의견을 조율했어요. 내가 맡은 부분은 중학교 3학년 교재인데, 부처님의 십대제자에 대한 집필이었어요. 종립학교에서 10년 정도 그 교재를 사용했어요.

 

사진 2. 원두스님이 적조암에서 편집한 『동산대종사 석영첩』(1967).

 

일본에 유학하게 된 경위는 해인사 강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혜종고 선사라는 분이 묵조선을 극심하게 비판했다는데, 여기에 의문이 들었어요. 이때 묵조선에 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어요. 그래서 서울 적조암에서 동국대 대학원을 다닐 때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学에 편지를 보냈어요. 이 대학은 조동종에서 설립했어요. 그 편지에 “나는 한국의 이러이러한 젊은 스님이다. 귀 대학에서 조동종의 선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으니 받아 줄 용의가 있느냐?” 뭐 이런 내용으로 썼어요. 당돌하지요. 한 2주일 지나서 답장이 왔지요. 이 시기에 은사님이 입적하셨고, 장례를 지낸 후 여권을 발급 받았어요.

 

그 당시 여권 발급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요. 빽 있는 자제분이나 급행료를 내야 했어요. 나는 직접 서류를 제출했어요. 운 좋게 창구에서 일하는 어느 불자의 도움을 받았어요. 1967년 7월 비행기 표를 샀어요. 당시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는데 뜻밖에도 숭산(행원)스님이 마중 나오셨어요. 내가 유학 간다는 것을 <대한불교> 신문기사를 보고 알았다고 해요. 6개월 전에 동경에 오셨는데 한국불교의 포교 거점을 구축할 계획이었다고 해요. 내가 도착한 그날이 대한불교조계종 재일홍법원이 오픈하는 날이었어요. 거처를 홍법원으로 정하고 숭산스님을 도왔어요. 생활비는 한국어 과외를 하면서 지탱할 수 있었어요.

 

고마자와대학 대학원 입학

 

우리의 전통인 간화선만 고집하고 묵조선을 방기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고마자와대학원에 입학했지요. 총장이 야마다 레이링山田靈林인데, 조동종학에 관한 강의를 했어요. 4년 내내 빠지지 않고 들었어요. 조동종의 중요 텍스트인 『정법안장』에 대한 연구에 참여했으며, 『조당집祖堂集』 공부도 했어요. 특히 인도불교의 대가인 미즈노 고겐水野弘元(1901~2006) 교수로부터 4년 내내 강의를 들었어요. 이 외에도 선리禪理의 다양성을 배우고 연구했으며 체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사진 3. 일본 홍법원 활동(가운데 숭산스님, 오른쪽 인환스님). 

 

10년간의 유학생활 중에 딱 한 번 한국에 다녀왔어요. 고마자와대학원에서 4년을 마치고 동경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는 사이 한 달쯤이에요. 공부할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잘 이용해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특히 매번 방학 중에는 대학원생들이 모여 빨리어와 불교영어를 공부를 하는데 여기에 빠짐없이 참여했어요. 또한 김지견 박사와 함께 일본 사찰 곳곳을 순례했어요.

 

가끔 일본의 한국 절에서 재를 지내면서 학비를 조달했어요. 아르바이트로 최고였지요. 그래서 굳이 한국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홍법원에 있으면서 여러 일을 맡았지만 한 푼도 받지 않았어요. 살림이 어려울 때였으니까 먹고 자는 것만도 감사하게 여겼지요.

 

홍법원을 시작한 지 한 2년 동안은 참 어렵게 지냈는데, 차차 인연도 모이고, 신자들도 모이고 해서 절이 좁아졌어요. 그래서 신도들과 의논해서 분쿄쿠 덴츠잉이라고 하는 곳에 일본집을 사서 절을 확장했어요. 꽤 큰 일본집이었는데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매달 이자를 냈지요. 규모가 커져서 스님도 여럿 필요했어요. 행원스님은 화계사에 있던 상좌 묘각스님과 견향스님을 데려왔어요. 그래서 나는 방 하나에서 공부에 전념했어요. 나중에 법인스님과 운학스님도 유학왔어요.

 

「신라불교 계율사상 연구」로 도쿄대에서 박사 학위 취득

 

일본 법무부 입국관리소에서 나에게 통보가 왔어요. 박사과정 4년 동안에는 유학 비자를 주지만 학업이 끝났으니 체류 연장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쿄대학 인도철학과 박사과정에 지원했어요. 선발 인원은 네 명인데 지원자는 열 명이고요. 서류심사와 면접인데 합격됐어요. 부처님 가피지요. 나는 홍법원에서 나와 월세방을 얻었어요. 어디에 있든지 예불을 모시고 백팔참회 절하고 또 참선하고 기도했지요. 그리고 도쿄대 입학 후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도서관 자료실과 열람실에 터를 잡아서 공부했어요.

 

사진 4.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박사.

 

3년 동안 레포트를 내고 나면 지도교수가 박사논문 쓰기를 허락합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발심수행장』을 일본말로 해석하고 세밀하게 주해했습니다. 가을 학기가 끝날 무렵에 다마키 고시로(玉城康四郞) 선생에게 레포트를 제출했어요. 좋은 평가를 해 주셨고, 박사논문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세계적인 불교학자인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워드프로세스로 타이핑 하지 않았어요. 순전히 원고지에 써야 합니다. 나중에 원고를 완성하고 나니까 원고지로 3,500장입니다. 컴퓨터가 없었던 시대에 원고지에 정리하면 곧바로 검토해야 돼요, 197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논문 제목이 「신라불교 계율사상 연구」입니다. 이 학위논문을 1977년 일본에서 출판했어요. 학위논문 집필하는 데 도움을 준 분이 사업가 이봉국 씨입니다. 인연이 묘한 것이 피난 온 나를 선암사로 인도해 준 그 유한행 보살님의 막내아들입니다. 이 분이 일본에서 사업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진 5. 다마키 고시로(玉城康四郎) 박사.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후 귀국하지 않은 것은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할 생각이였어요. 지관스님이 동국대 교수로 있으면서 나의 귀국을 요청했어요. 그 당시 철인스님이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지내고 귀국길에 일본에 들렀어요. 나는 당장 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하였고, 철인스님은 동국대 선학과 교수가 됐어요. 한국 스님들이 외국에 나가도 언어가 되지 않아 어려운 일 겪는 것을 많이 봤어요. 이것이 영어권 유학을 꼭 해야 하는 이유였어요.

 

사진 6. 도쿄대학 박사논문(1975)(좌). 사진 7. 『신라불교계율사상연구』(1977). (우)

 

영어권 포교를 위해 캐나다로 

 

캐나다로 유학 가게 된 이유는 적멸보궁 21일 기도 인연입니다. 내가 기도할 당시 보살님 한 분이 함께 기도했는데, 이후 그 보살님과 서울에서 몇 번 뵈었던 인연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칠 무렵, 그 보살님이 캐나다로 이민 간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캐나다에 간 그 보살님과 서신 왕래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 초청장을 요청했지요. 그렇게 온타리오 토론토로 가게 되었는데, 1977년 2월입니다. 존스애비뉴스쿨이라고 랭귀지 스쿨에 입학했어요. 월세 주택에 자그마한 불상을 모셨어요. 리빙룸에 탁자를 짜서 불상을 봉안하고, 절 이름을 대각사라고 걸었어요. 매일 새벽 4시쯤 일어나 예불 모시고 3시간 쯤 기도하고, 9시까지 학교 가서 12시까지 영어공부를 합니다. 절에서 기도는 3시간 혹은 5시간, 10시간도 하고 저녁예불 모시고 잘 때까지 그냥 기도를 했어요. 이후 1979년까지 백일기도를 여러 차례 했어요.

 

사진 8. 캐나다 토론토 대각사.

 

그러다 보니 지역에 차차 소문이 났어요. 토론토에 한국 교포들이 제일 많이 살아요. 한국에서 수준이 괜찮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나중에 일요법회에 오는 사람들이 50, 60명 쯤 되더라구요. 이 분들에게 우리 전통 강원의 이력과목을 가르쳤어요. 『치문緇門』부터 시작하여 『도서都序』, 『선요禪要』, 『서장書狀』 이렇게 사집四集을 가르쳤어요. 나중에는 『능엄경』, 『금강경』까지 했어요. 쉽게 가르쳤어요. 절에 가서 절만 하고 기도하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불교를 제대로 배우는 코스를 했어요. 평균 20명 정도가 꾸준히 참석했어요. 이들이 토론토 불교의 저력이 되었어요. 주말을 이용하여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철야 참선정진도 꾸준히 했어요.

 

사진 9. 캐나다 대각사 신도들과 야외법회.

 

교포들이 한국에 있는 노모를 베이비시터babysitter로 초정하여 아이들을 맡겨요. 이들은 일요일에는 절에 나오지만, 영어도 신통치 않고 지리도 모르니까 답답한 생활을 해요. 두 달이나 석 달에 한 번쯤은 이분들과 온타리오 호수를 가거나 음식을 싸 가지고 한나절 널찍한데서 마음대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운동도 합니다. 모두들 좋아했어요. 캐나다는 복지 중에서도 연금제도와 캠핑문화가 잘 돼 있어요. 이렇게 여행을 함께 다니기도 했어요. 캐나다 생활 6년 되니까 신도들도 많아지고 대각사 운영이 순조롭게 되었어요.

 

일찍이 일본 홍법원을 개창하고 함께 지냈던 숭산행원 스님이 미국에 가셔서 포교하고 계셨어요. 스님은 동부 프로비던스providence에서 선禪 지도를 중심으로 포교를 했어요. 차차 규모가 커지자 선센터를 열었어요. 캐나다 온타리오 젠센터도 열었어요. 그 무렵 도쿄에서 함께 공부했던 손 씨라는 선배가 출가하여 시카고에 불타사佛陀寺라는 절을 창건했어요.

 

사진 10. 시카고 불타사.

 

절을 운영하다가 내분이 생겼어요. 손 씨는 내게 불교의식을 배우고 싶다고 시카고로 오라고 그래요. 갔더니 3일 후에 그 스님은 간다는 말없이 떠나버렸어요. 불타사는 그만 무주공산이 되었어요. 신도들 자신들이 꾸려나가기 어려우니 나에게 불타사도 좀 살려달라고 간청을 해요. 2년간 신심 깊은 보살들에게 기도법을 가르쳐주고 하다가 일본에서 공부한 홍선스님을 초청하여 맡겼더니 불타사를 크게 확장했어요. 홍선스님은 나중에 귀국하여 중앙승가대학 교수를 역임했어요.

드디어 캐나다 시민권 증서를 받았어요. 당시 오자마자 영주권을 얻었는데, 여기서 한국불교를 포교하고 여기 신도들과 뼈를 묻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캐나다 생활 6년째쯤 받았어요.

 

인재양성을 위해 귀국

 

1982년 초 겨울밤에 지관스님이 국제전화를 했어요. 지관스님은 동국대 교수로서 불교대학장을 하고 계셨어요. 총장은 황수영 씨였고요. 그때 운학스님이 폐가 약해서 돌아가셨어요. 지관스님은 그 후임으로 동국대 교수로 오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어요. 내 입장에서 얼른 대답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했지요. 이만큼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불교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인재 양성하는 데 내가 필요하다고 하고, 캐나다 대각사도 이만큼 자리 잡혔으니 다른 스님한테 물려주는 것이 어떠한지 생각했지요. 신도들이 아쉬워하고 반대도 했지만 교수로 간다고 하니 막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이 기회에 내 공부의 빚을 갚아야겠다고 한국행을 결정했어요.

 

사진 11. 동국대학교 정각원장.

 

1982년 2월 말 경 개학하기 직전에 왔습니다. 신분이 외국인이니까 장기체류를 허가받아야 했어요. 지관스님이 정릉 경국사 주지를 1년 쯤 했을 때 나와 같이 있자고 했어요. 전 주지인 보경스님이 단청장이었는데, 생전에 쓰시던 단청용 목재와 도구들이 꽉 차 있는 헛간이 있었어요. 그 헛간방(환희당)에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지냅니다.

 

1982년 3월 1일부터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내가 동국대에 오기 1년 전에 승가학과가 선학과禪學科로 바뀌었어요. 선학과 2회 학생들은 선이회를 조직하여 오랫동안 모임을 하기도 했어요. 동국대 출근 이튿날 부교수로 발령받았어요. 동시에 정각원 원장 보직을 함께 받았어요. 이후 불교문화연구원장을 역임하고 또 일본 경도의 불교대학에 연구교수로 가기도 했지요.

 

사진 12. 대학원 제자들과 지리산 방문(1993).

 

정년퇴직할 때까지 방학 중에는 해외에 나갔어요. 외국 생활을 오래 해봤더니 해외에 한국불교를 포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절감했거든요. 1996년 8월에 정년퇴임했지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82년 이래 부산 내원정사 석암스님이 요청한 약사여래법회를 32년간 주재한 것, 오계파지五戒把持운동 국제본부를 한국에 설치한 것과 부산 화엄불교교양대학 등 여러 대학에 출강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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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현재 불교무형문화연구소(인도철학불교학연구소) 초빙교수. 저서로는 『원묘요세의 백련결사 연구』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호암당 채인환 회고록의 구술사적 가치」, 「보운진조집의 성립과 그 위상 연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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