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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 길라잡이 ]
분열된 사고와 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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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스님  /  2024 년 10 월 [통권 제138호]  /     /  작성일24-10-05 14:14  /   조회83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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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08예참문에 맞춰 절을 하는데,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부르지만 생각은 어떻게 하며 절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답변

“수행승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삼매를 닦으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 

- 『쌍윳따니까야』

 

수행이든, 공부든 불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에고에 물든 마음에서 에고가 없이 마음을 쓰는 상태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삼매三昧를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수행에서 삼매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이는 방향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따라서 바른 수행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삼매력이 없으면 경계를 대할 때 내 속에서 올라오는 단단한 습기習氣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삼매는 단순한 집중의 상태가 아닙니다. 삼매에는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통찰[관觀]’과 ‘멈춤[지止]’이 그것입니다. 집중을 해야 하는 이유도 바르고 깊게 관찰해서, 에고로 인한 이기적인 마음작용을 알아차려서 그쳐가기 위해서입니다. 의식이 산만한 상태라면 통찰과 멈춤이 바르고 깊게 제대로 될 수 없겠지요.

 

주인이 아닌 객으로 살아온 삶

 

평상시 우리의 의식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내 의식, 내 정신이 온전히 하나로 뭉쳐져 있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있는 겁니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습習이 우리로 하여금 어느 하나의 생각에 몰두하지 못하게 해서, 이것을 생각하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끔 만듭니다.

 

사진 1. 매일 일과를 하는 보살님 좌복에는 신심의 체취가 고스란히 쌓인다. 사진: 다음카페 정림사랑방.

 

심지어는 흩어진 나를 하나로 모아 가는 기도 중에도 나의 의식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따로 놀기도 합니다. 의식이 분열된 상태로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고, 그것이 이제는 강한 습성으로 자리 잡아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을 하고 능엄주를 하는데 왜 이리 망상이 많습니까?”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반증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평소에도 늘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도 드문 것 같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내 앞에 전개되는 세상이라는 외적外的 환경을 향해 치달리며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이라는 눈앞의 환경 속에서 나 자신의 위치는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높을까?’에서부터 ‘그 환경 속에서 나는 얼마큼 가졌고, 다른 사람은 무엇을 얼마나 가졌을까?’ 등등, 흔히 말하는 생존 경쟁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남들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 또는 남들보다 최소한 뒤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며 살아오지 않았나요?

 

그래서 자신의 마음(주인에 해당)을 위한 정신적인 삶에는 별 관심을 갖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는 생활의 변화 속에서 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고 상처받고 있으며, 외적 대상에 기웃기웃하느라 얼마나 산만하게 분열되어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관심의 시선을 ‘내 안의 세계’로

 

비로소 절에 나와 기도라는 것을 해보니 자신의 상태가 실감 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내가 내 의식을 내가 의도하는 방향대로 모아 가려 해도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내 것임에도, 내 소유임에도, 내 의식(마음, 정신)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내가 분열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 내 의식이 이것저것에 흩어져 있고, 그것을 하나로 모아 가기가 쉽지 않은 상태라는 것, 그래서 내 의식임에도 내가 내 마음대로 끌고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 오히려 외적 환경에 의해 내 의식이 지배를 당하고 끌려가고 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을 다소 심각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내 세상에서 내가 ‘주인’으로서 살지 못하고 ‘손님’으로서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공부 수행이 진행되면 될수록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대하는 대상보다 그 대상으로 인해 내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결국은 외적인 대상보다 그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내 마음의 움직임(인식과 반응)이 어떠냐에 따라 내가 평화롭기도 하고 불안정한 동요의 상태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외적인 대상을 무상無常의 관점으로 점점 더 보게 됩니다. 언젠가 사라질 것들이며, 집착할 만한 것들이 될 수 없다는 관점이 나의 의식에 점점 더 자리하게 되지요.

참고로 경전에서 말하는 삼법인三法印을 소개합니다.

 

세존: 존재는 영원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제행무상諸行無常)

제자들: 무상한 것입니다.

세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일체개고一切皆苦)

제자들: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변하고 괴로운 것을 가지고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옳은 견해이겠는가? 그릇된 견해이겠는가?(제법무아諸法無我)

제자들: 그릇된 견해입니다.

- 『쌍윳따니까야』

 

무상함이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할 때 비로소 ‘눈앞의 세상’이라는 바깥 경계로만 치달리던 나의 시선이 내면의 마음으로 돌려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관심의 시선이 ‘안의 세계’로 돌려져야 기도를 해도 제대로 꾸준히 간절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각각 따로 노는 마음을 하나로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절을 하는데, 입으로는 부처님 명호를 부르지만 생각은 어떻게 하며 절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리는 절을 할 때 『예불대참회문禮佛大懺悔文』에 맞추어 합니다. 입으로는 참회의 소리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합니다. 입은 하는 일이 있는데 그리고 몸도 절을 해서 하는 일이 있는데, 정신은 하는 일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니 ‘어떤 생각을 하며 절을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 질문에도 ‘분열적 사고’가 담겨 있습니다. 절을 할 때도 최소한 ‘나’는 이렇게 나누어집니다.

 

사진 2. 매년 퇴옹당 성철 대종사 열반 주기 때는 성철스님사리탑전에서는 『예불대참회문』에 맞춰 일체중생의 행복을 기원하는 3천배기도를 올린다. 사진: 하지권.

 

1) 예참문을 읽으며 하라고 하니 입은 소리 내어 읽는다. - 입은 소리를 낸다.

2) 그 소리를 들으라 하니 귀는 소리를 들으려 한다. - 귀는 그 소리를 듣는다.

3) 절 동작을 하려 하니 몸이 자세에 맞춰 움직인다. - 몸은 움직인다.

4) 생각은… - 생각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이 결국 누가 하는 것일까요? 마음, 정신, 의식이라 불리는 것이 합니다. 마음이 소리를 내는 것이고, 듣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리 내고, 듣고, 움직이는 것들이 제각각 이루어지는 것으로 은연중에 인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입은 입대로 놀고, 귀는 귀대로 놀고, 절하는 몸은 몸대로 논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에도 각각 따로 놀뿐더러 오히려 그렇게 하도록 조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각도 따로 놀아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깊게 물들어 있는 ‘분열된 사고의 습성’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이기에 제각각 따로 놀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울려 같이 놀아야 하는데, 즉 하나에서 흩어져 나오는 것들이 다시 합쳐져 하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마음에서 분열되어 나오는 것들을 합쳐서 다시 그 마음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생각을 못 하고 있습니다.

 

분열된 의식을 누가 하나로 통합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결국 나의 근원인 ‘마음’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성스러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게 하는 것이고, 그 성스러운 소리를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으라 하는 것이고, 성스러운 대상에게 절을 하는 자신의 동작을 의식하면서 하라고 하는 겁니다.

 

나의 생각을 이렇게 하는 데 붙들어 매어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듣고, 절하는 움직임에 내 정신을 집중시켜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다음과 같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경책할 수 있는 생각을 내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문제(잘못, 허물, 괴로움, 불행 등)는 내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나를 알기 위해서 이렇게 절을 하는 것인데, 어째서 나는 내가 하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는가? 내 소리를 듣고 내 움직임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주인인 나의 마음을 또렷이 파악하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로 『신심명信心銘』(장경각/성철스님 법어집 1집 5권)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마치겠습니다.

 

귀근득지歸根得志요 수조실종隨照失宗이니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 업식망정을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주1)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비춤을 따라가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다고 했습니다.

기도를 해도 절과 능엄주를 해도 ‘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는 것과 ‘비춤을 따라가기 위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귀근歸根하기’ 위해 하는가? 

나는 ‘수조隨照하기’ 위해 하는가?

 

공부(수행) 방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대상(경계)을 향하고 있는지, 대상을 접하는 마음을 향하고 있는지, 공부 과정에서 늘 살피며 체크해야 합니다. 

 

※정림사 일행스님의 글을 더 보실 분은 https://cafe.daum.net/jeonglimsarang을 찾아주세요.

 

<각주>

(주1) 『성철스님의 신심명 증도가 강설』(도서출판 장경각, 2015년 개정 1쇄,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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