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11명의 국사를 배출한 만덕산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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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11 월 [통권 제127호] / / 작성일23-11-04 20:26 / 조회1,950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37|만덕산 백련사 ①
백련사白蓮寺로 가는 길은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과 같은 설렘과 가슴이 시원한 발걸음이었다. 늘 그랬던 것 같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가면 덕유산과 지리산을 바라보며 충청과 호남의 넓은 평야를 지나 평온한 호남 땅 끝자락에 있는 강진康津에 다다른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바다도 있는 강진
산세로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한 기운이 호남으로 내려오면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으로 치솟고 다시 차분하게 숨고르기를 하다가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으로 그 기운을 있는 대로 토해 낸다. 우뚝하게 솟아 시원한 멋을 뽐내고 있는 월출산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수국水國의 바닷가에 다다라 남은 기운으로 장식하는 곳이 강진의 만덕산萬德山이다.
멀리 완도莞島를 바라보며 구강포九江浦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강진만을 앞으로 바라보는 해발 400미터 정도의 산이다. 이곳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사시사철 푸르고 고려高麗(나라이름이기 때문에 본시 ‘고리’라고 읽어야 옳다)시대 이래로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만덕산에는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가는 대나무와 왕대들이 울창하고, 동백나무가 가득하여 사철 내내 서로 푸르름을 더해 가며 참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滿洞皆松柏篠簜冬柏樹交加蒼翠四時如一眞絶境也].”라고 했다.
강진에 오면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바다도 있어 마음이 부자가 된 듯하다. 그 옛날에는 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해대는 바람에 사람들은 늘 살림살이를 챙겨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이 끝나고 강진에 물산이 풍부해지면서 이곳에는 진짜 부자들이 생겨났고, 일찍부터 서울로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사람들도 많았다.
백련사에는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내려가고는 했는데, 언제나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시는 우리 시대의 다승茶僧 여연如然 화상이 주석하고 있어서 즐거운 마음에 들락거렸던 것 같다.
백련사 인근에는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의 학문세계와 선생이 살아간 삶을 생각하게 해주어 다산초당에 들릴 때면 백련사에 오고 백련사에 오면 다산초당에 가고는 했다. 어느 해에는 서울대 법대 대학원의 제자들과 함께 백련사로 와서 며칠 지내며 세미나를 가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국가와 경세經世 그리고 법제도에 대하여 궁구한 다산선생의 학문과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리라. 이제 그들은 법학자와 법률가로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미래에는 그들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나말의 혼란한 정세와 선법의 전래
백련사는 통일신라시대 839년 즉 문성왕文聖王(김경응金慶膺, 재위: 839~857)이 즉위한 해에 낭혜무염朗慧無染(800~888) 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무염선사는 821년경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선사의 제자인 마곡보철麻谷寶徹(?~?, 8~9세기) 선사에게서 법을 전수받고 신라로 귀국하여 845년에 보령 성주사聖住寺에서 선법을 연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창조이다. 1800년대 초에 저술된 『만덕사지萬德寺誌』에는 무염선사가 당나라로 간 것은 824년이고, 당나라로 가서 백거이白居易(772~846)의 불가의 벗인 불광여만佛光如滿(?~?, 8~9세기) 선사에게 가서 도를 물었다고 되어 있다. 그 시절에는 마조선사의 문하에서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 동사여회東寺如會(744~823), 장경회휘章敬懷暉(754~815), 염관제안鹽官齊安(~842),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 대매법상大梅法常(752~839), 마곡보철, 불광여만 등 100여 명이 넘는 빼어난 선장禪匠들이 각처에서 종풍을 일으키며 가히 마조선馬祖禪 즉 홍주종洪州宗이 천하에 풍미하던 때였으니, 무염화상이 어찌 한 사람만 만나 공부했겠는가.
그건 그렇다 치고 무염선사의 행적으로 보건대, 839년에 무염선사가 만덕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부합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만덕사지』의 편찬에서 전체 감수를 맡은 다산선생도 무염선사를 백련사와 연관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아무튼 백련사는 창건된 후에는 만덕사萬德寺로 부르다가 고려시대에 와서는 ‘백련사白蓮社’라고 했고, 조선시대에는 다시 만덕사라고 했다. 오늘날에는 ‘백련사白蓮寺’라고 부르고 있다.
839년은 장보고張保皐(?~846)의 힘을 빌어 민애왕閔哀王(김명金明, 재위: 838~839)을 죽이고 왕이 된 신무왕神武王(김우징金祐徵, 재위: 839. 1~7.)이 6개월 만에 병사하자 그의 아들 문성왕文聖王(김경응金慶膺, 재위: 839~857)이 그 뒤를 이어 임금으로 즉위한 해이다. 이 해에 문성왕은 장보고 즉 궁복弓福이 자기 아버지를 도와 조정의 적을 없애 주었다고 격찬하고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에 임명하고 장복章服도 하사하였다.
840년에는 당나라 문종文宗(재위: 826~840) 황제가 홍려시鴻臚寺에 조칙을 내려 신라에서 볼모로 와 있던 사람들과 10년의 연한이 만료한 숙위 학생 등 총 105명을 신라로 돌려보내는 조치를 하였다. 3년 전인 837년에는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 11년에 사은사謝恩使 겸 숙위宿衛로 당나라 조정으로 간 둘째 왕자 김의종金義琮(?~?)이 신라로 귀국하였는데, 그 편에 원감현욱圓鑑玄昱(787~868, 도당 유학: 824~837) 대사도 함께 신라의 무주武州회진會津에 도착하였다. 현욱대사는 당나라에서 마조선사의 제자인 장경회휘 선사에게서 공부하고 선법을 전수받아 귀국하였는데, 귀국 후 홍척洪陟(?~?) 선사가 산문을 연 실상사實相寺에 주석하였다. 뒤에 그의 법을 이은 진경眞鏡 대사 심희審希(855~923) 선사가 김해 봉림사鳳林寺에서 봉림산문鳳林山門을 개창하게 된다.
문종을 이어 무종武宗(재위: 840~846)이 당 황제로 즉위하고 문성왕을 ‘상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 해주기도 했지만, 곧이어 불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회창폐불會昌廢佛’ 사건으로 외국 유학승들을 귀국 조치함에 따라 신라의 도당 유학승들도 대거 돌아오게 된다. 이 시기 당나라는 당쟁이 치열했고 환관들의 횡포로 나라가 심하게 흔들리던 때였다.
회창 2년(842)부터 무종이 죽을 때까지 자행된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사원寺院 4,600여 개와 사액 사찰인 초제招提 및 난야蘭若 40,000여 개가 폐지되었고, 환속된 남녀 승려는 260,500명에 이르렀으며, 수천만 개의 사전寺田은 국가에 몰수되었고, 민간인으로 편입시킨 절의 노비는 150,000명에 이르렀다. 이 난리통에 도읍인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 그나마 살아남은 절은 4개 정도였고, 지방의 주도州都에서는 1개씩만 살려두었다.
문성왕이 즉위하고 6년이 지난 해 그가 극찬해 마지않았던 궁복이 자기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고 청해진淸海鎭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혼란 속에 무주武州의 별가別駕 염장閻長(=閻丈)이 궁복의 목을 잘라 죽이면서 겨우 반란을 평정하였지만 왕실의 권위는 심하게 추락하고 있었다. 이 당시 신라는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 사망 이후에 왕위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문성왕이 병으로 죽자 그의 유조遺詔에 따라 신무왕의 배다른 동생인 김우정金祐靖(=誼靖)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1)이다.
걸출한 고승들을 배출한 백련사
조선시대 후기에 백련사에 주석하며 강백講伯으로 이름을 날린 아암혜장兒庵惠藏(1772~1811) 화상은, 백제百濟 최초의 절은 침류왕枕流王(재위: 384~385) 원년인 384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에서 백제로 건너와 경기도 한산漢山(지금의 광주廣州)에 마련한 난야蘭若이고, 법왕法王(재위: 599~600) 2년인 600년에 사비하泗沘河(지금의 부여)에 왕흥사王興寺가 지어지고 승려 30인이 출가하면서 비로소 한반도 남쪽에 처음 절이 지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호남의 사찰은 모두 그 이후에 지어졌기 때문에 어느 때 누가 백련사를 창건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백련사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어느 때부터 사세가 기울어지고 당우들이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오다가 고려시대 중기 1211년에 와서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1163~1245) 화상이 이 터에 절을 크게 중창하여 백련사白蓮社라고 하고 천태종天台宗의 종풍을 널리 펼치면서 비로소 대가람大伽藍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20년 동안 백련사의 8국사가 배출되는 기틀이 이때 마련되었다. 혜장화상까지 하면 11국사가 나온 셈이다.
요세 화상에 대해서는 최자崔滋(1188~1260) 선생이 지은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병서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並書」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최자 선생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충崔冲(984~1068)의 6대손으로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문벌을 이루었던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신이었는데 불교를 적극 성원하였다. 최씨 무신정권에 봉사한 이규보李奎報(1168~ 1241)도 최자 선생을 당대 최고의 인물로 꼽았다. 1259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였을 때에는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는 것보다 화친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에 섰다. 강화도로의 천도는 백성들의 피해가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최씨 무신정권의 이익을 지키려는 일로 보았다. 그의 문집으로는 『보한집補閑集』이 있다.
무신정권 시대를 살아간 요세화상
「원묘국사비」에 의하면, 요세화상은 고려 의종毅宗 (재위 : 1146~1170) 17년인 1163년에 합천에서 호장戶長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강양江陽 천락사天樂寺의 균정均定 화상에게로 출가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23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천태학을 공부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대의를 확철히 깨달아 명성을 얻었다.
이 시절 의종은 아버지 인종仁宗(재위: 1122~1146) 때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려고 종래의 권력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측근세력을 키우고 무신세력과도 가까이 하였다. 인종 때인 1135년에 서경파 세력들이 개경開京(지금의 개성)에서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으로의 수도 이전이 뜻대로 되지 않자 서경파 세력들에 의해 옹립된 왕사 묘청妙淸(?~1135)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개경파 최고의 문신 김부식金富軾(1075~1151)과 그의 동생 김부의金副儀(=金富轍 1079~1136) 등이 이들을 진압하였지만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아들인 의종에 와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실권을 가진 문신귀족 세력들의 견제로 실패하고 결국 이들을 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환관들과 심한 갈등을 하던 무신들이 문벌귀족들과도 충돌하면서 급기야 1170년 이고李高(?~1171), 이의방李義方(1121~1175), 정중부鄭仲夫(1106~1179), 이의민李義旼(?~1196) 등이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많은 문신들을 죽인 다음 왕의 동생을 명종明宗(재위: 1170~1197)으로 세웠다. 의종은 거제도巨濟島로 쫓겨 갔다. 1173년에 동북면병마사인 김보당金甫當(?~1173)이 주동이 되어 의종복위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모두 죽임을 당하고, 의종도 계림鷄林(지금의 경주)에 유폐되었다가 이의민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무신들은 최고 군사기구인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국가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경제적 권력도 독점하였다.
그 후 반란세력인 이의방이 이고를 죽이고 그의 딸을 태자비로 삼아 권력을 휘두르다가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鄭筠(?~1179)에게 살해되었다. 이의방을 제거한 정중부도 독점한 권력을 휘두르다가 1179년에 경대승慶大升(1154~1183)에게 죽었다. 이에 무신들이 경대승을 적으로 삼아 공격하였는데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방어하였지만 1183년에 의문사로 죽고, 이의민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요세화상이 승과에 급제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이의민도 1196년 최충헌崔忠獻(1149~1219), 최충수崔忠粹(1151~1197) 형제에 의해 살해되었고, 최충헌이 국가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에 명종과 희종熙宗(재위: 1204~1211)은 폐위되었다.
명실공히 무인천하武人天下가 되었다. 나랏일은 물리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말이 좋아 물리력이지 폭력에 다름 아니다. 강종康宗(재위: 1211~1213)이나 고종高宗(재위: 1213~1259)이 왕으로 앉아 있었지만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1129년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崔瑀(1166~1249)가 고종을 앉혀 놓고 정방政房을 설치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도방 등을 확장하며 개인 군대인 사병私兵체제를 구축하여 30년 동안 나라를 주물렀다. 1249년에는 그와 창기娼妓 사이에 태어난 최항崔沆(=萬全, 1209~1257)이 형 만종萬宗(?~?)과 같이 송광사로 출가한 후 무뢰배들과 어울려 백성들을 괴롭히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환속하여 집권자가 되어 8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였고, 1257년부터 그의 아들 최의崔竩(1233~1258)가 1년 동안 통치하면서 최씨 무신정권의 수명이 연장되었다. 이것을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고려가 굴러가고 있을 때인 1231년에 드디어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하였다. 요세화상이 68세 때의 일이다. 이 땅의 백성들은 이후 30여년에 걸친 기나긴 몽골~고려전쟁을 겪게 된다. 1232년에 최씨 정권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이전해 들어갔지만 백성들은 그대로 방치되어 전쟁의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대몽항전이 지속되면서 무신정권의 재정도 악화되었고 무엇보다 백성들의 피해와 고난이 실로 심각해졌다. 장기전에 따른 농민들의 반발과 문신들의 강화론講和論이 강해지는 가운데, 1258년에 최의가 삼별초三別抄를 앞세운 그의 부하 김준金俊(=金仁俊, ?~1268)에게 살해되면서 최씨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였다. 이로부터 13년 전에 이미 요세화상은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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