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정혜결사의 도량에 자리 잡은 나한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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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10 월 [통권 제126호] / / 작성일23-10-05 10:35 / 조회2,141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36| 팔공산 은해사 ④
바위에 의지한 중암암은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오래된 부도와 여말선초 시대로 보이는 삼층석탑도 있다. 이 높은 곳에 매달려 그 무엇을 찾고자 한 이들은 도대체 누구이던가? 1485년(성종 16)에 중창한 기록이 있는 묘봉암은 여기서 골짜기를 건너 저편에 있다.
기기암과 휴암스님의 장군죽비
기기암奇奇庵은 본찰에서 나와 개울을 지나 다시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한다. 소나무 울창한 그 길을 재미 삼아 걸어가기는 힘들다. 이런 곳에 작은 암자를 지은 것을 보면 범인은 오지 말고 수행자나 오라는 말인 것 같다. 이 산사는 원래 안흥사安興寺였는데, 1801년(순조 1)에 중창되었다. 현재 기기암은 수행승들이 참선 수행을 하는 도량이다.
조선시대에는 기성대사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유학자들도 들리곤 했다. 영조 때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을 지낸 치재恥齋 김상직金相直 선생도 은해사를 방문했을 때 기성선사를 만난 사실을 그의 문집에 써놓았다. 근래에는 이곳에서 수행한 당대의 선장禪匠 휴암休庵(1941~1997) 화상이 불교의 세속화와 기복화를 비판하며 『장군죽비』로 백호출림白虎出林의 포효를 하였으나 어이없는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다. 불교 혁신에서 큰 역할을 했을 선지식이 일찍 아미타불의 곁으로 떠난 것이 실로 안타깝다.
오늘날 은해사의 산내암자인 거조암은 원래 거조사居祖寺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최근에는 거조사라는 옛 이름으로 다시 돌아갔다.
고려시대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 화상이 1188년(명종 18)에 선수행을 하는 결사인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여 선종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 장소로 유명하다. 지눌화상은 당시에 불교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언젠가 뜻을 같이 하는 수행자들과 결사를 하고 불교혁신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당시 거조사의 주
지를 맡고 있던 득재得才 화상이 그 뜻을 함께하고 예천醴泉의 보문사普門寺에 주석하고 있던 보조국사를 거조사로 모시고 와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내걸고 본격적으로 불교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정혜결사가 시작된 도량 거조사
보조국사가 지은 그 유명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은 곳이 바로 여기다. 당시 국사의 종풍 혁신에 뜻을 같이하는 납자들이 날로 모여 들어 거조사의 공간이 감당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2년 후인 1200년(신종 3)에 그 장소를 순천順天의 송광사松廣寺로 옮겼다. 송광사로 옮겨가면서 결사의 이름을 정혜사에서 수선사修禪社로 변경하였다.
거조사가 나한신앙의 중심지로 된 것은 고려시대 후기인 1298년(충렬왕 24)에 원참화상이 아미타불의 정진에 힘쓰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 이후 1375년(우왕 1)에 영산전靈山殿이 창건되고 중수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안에는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이후 거조사는 나한신앙의 기도도량으로 번창해 갔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786년(정조 10)에 영산전의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조성되기도 했지만,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거조암의 절터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어 그 당시에는 거조사가 거의 폐사 지경에 이르렀던것 같다. 1920년대 사진을 보면, 거조사의 터에 영산전만 남아 건물에 바짝 붙은 흙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에 딸린 조그만 요사채만 보인다.
거조사 주차장에 도착하면 ‘영산루靈山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신축한 문루가 보인다. 적합한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거조사에는 근래까지 영산전만 남아 있어 그렇게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루 아래로 들어가 돌계단을 올라가면 영산전 앞마당으로 바로 들어선다. 주위에 다른 전각들이 없어서 그런지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영산전은 위엄 있게 서 있다.
‘영산전靈山殿’이라는 현판은 설현신薛玄愼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하는데, 해서체로 쓴 큰 글씨가 웅장하고 미려하다. 영산전은 붓다의 일생을 전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현재불인 석가모니불과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 미래불인 미륵보살의 삼세불을 봉안하는 것이 핵심인데, 거조사의 영산전은 이러한 삼세불 이외에 500나한을 봉안하여 500나한전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영산전의 공포는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주심포柱心包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중요한 문화유산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영산전은 봉정사 극락전(12세기), 수덕사 대웅전(1308), 부석사 무량수전(1376)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 건물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영산전 앞마당에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 하나가 서 있다. 중암암에 있는 3층석탑과 흡사하다.
나한재를 봉행한 영파대사
영산전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당시 운부암에 주석하고 있던 영파대사가 그간에 내려오던 나한재羅漢齋를 봉행하는 의례儀禮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오백성중청문五百聖衆請文』을 편찬한 일이다. 이 청문은 500나한의 명호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국내 유일의 자료이다.
영파대사가 영산전을 중창할 때에도 폐허가 된 거조사 터에 낡은 영산전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영파대사는 1801년부터 1804년 동안 당시 스님들과 힘을 모아 건물을 중수하고 석조나한상도 새로 수리하여 영산전을 정비한 다음 이를 맞이하는 의례를 올리게 되었는 데, 이때 그의 스승인 함월해원涵月海源(1691~1770) 대사가 주석하고 있던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에 내려온 의식집을 구하여 이를 기초로 『오백성중청문』을 편찬하게 된다. 석왕사는 조선왕조가 출범하기 전에 새 왕조의 탄생을 발원하면서 무학無學(1327~1405) 대사의 주도로 500나한상을 조성하고 500나한재를 지냈던 사찰인데, 그곳에 나한재를 지내는 절차를 적어놓은 의례집이 내려오고 있었다.
『오백성중청문』에 의하면, 이곳 영산전에는 나한상만 봉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 석가삼존상을 놓고 좌우로 10대 제자, 16나한상, 500나한상 등 모두 526구의 나한상을 봉안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현재의 나한상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데, 이러한 나한상은 의상義湘(625~702) 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의 도상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화엄종주였던 영파대사이었기에 그 배치도 법계도에 따라 한 것으로 보인다.
『오백성중청문』에 기록된 500나한의 구성과 명호는 고려시대에 정해진 이후 전승된 것으로 현재까지 중국이나 일본에서 전해오는 500나한의 구성과 명호와 다른 점이 주목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500나한의 구성과 명호가 모두 동일한데, 이 두 나라에서 봉안하고 있는 500나한에는 신라의 고승이 포함되어 있다. 당나라에서 정중종淨衆宗을 개창할 만큼 이름을 날린 무상無相(680~756) 대사와 밀교密敎의 고승인 오진悟眞(?~?) 화상이 각각 ‘무상공존자無相空尊者’와 ‘오진상존자悟眞常尊者’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있다.
천하의 무상대사의 사리탑은 지금도 중국 팽주彭州 단경산丹景山 금화사金華寺에 있다. 오진화상은 소년 시절에 당나라로 건너가 밀교의 고승인 불공不空(Amoghavajra, 705~774) 화상과 혜과惠果(746~805) 화상, 혜초慧超(704~787) 화상의 제자가 되어 공부하고 대흥선사大興善寺 등에 머물며 전국에 명성을 떨쳤으며, 789년에 인도의 중천축국中天竺國으로 가서 밀교 경전을 구해서 돌아오는 길에 티벳의 토번국吐藩國에서 열반하였다.
의상대사의 제자인 오진悟眞 화상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일본의 공해空海(774~835) 대사도 당시 밀교의 최고승인 혜과화상의 법을 이어받은 뛰어난 제자였는데 일본에 귀국한 후 진언종眞言宗을 개창하였다. 중국 밀교의 총본산인 대흥선사에는 오늘날 공해대사의 동상이 서 있다. 500나한의 수나 이름이 경전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대와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신라 출신의 이 유명한 고승이 우리나라에서 구성한 500나한에는 빠져 있고 중국과 일본의 500나한에는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한중일 삼국의 나한신앙
거조사에는 지금까지 나한신앙의 대표적인 사찰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러 오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거조사에서는 해마다 나한대재羅漢大齋를 거행한다. 사실 나한신앙은 인도에는 없었고,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형성되어 왕성하였다. 일본에서는 헤이안平安(794~1185)시대에 송나라에 유학을 온 일본 승려들에 의해 일본으로 전파되어 귀족들을 중심으로 나한의 그림이나 조각상을 모시고 나한들에게 귀한 공양물인 차茶를 공양하는 나한대재가 불교사찰에서 성행하였다.
중국에서 나한신앙은 천태종天台宗의 본산인 천태산天台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일본의 입송구법승入宋求法僧들이 찾아간 대표적인 곳이 천태산이었다. 천태종은 천태지의天台智顗(538~594) 대사가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교학을 완성시키고 『중론中論』을 지은 용수龍樹(Nagarjuna, 150?~250?) 보살을 종조宗祖로 삼아 개창한 것인데, 일본에는 사이초最徵(767~822) 대사가 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와 백제의 여러 승려들이 중국으로 가서 천태종을 공부하고 들어왔다.
고려시대 때에는 의통義通(927~988) 대사가 중국 천태산 운거사雲居寺로 가 공부를 하고 중국 천태종의 16조가 되어 고려 승려 제관諦觀(?~970) 대사와 함께 천태종을 중흥시켰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 화상은 중국으로 건너가 의통대사에게서 법을 전수받고 1086년에 귀국하여 1097년(숙종 2)에 개성에 신축한 국청사國淸寺의 주지가 되면서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대각국사가 1085년 송나라 수도 변경汴京으로 가서 계성사啓聖寺 등에서 일년 동안 머물고 있었을 때는 소동파 선생이 활동하고 있을 때인데, 서로 만나지는 못하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동파 선생은 고려 사람들이 송나라로 와서 자꾸만 자료를 달라고 하는 일 등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나라 말기에 많은 중국 전적들이 해외로 나가고 정작 중국 본토에는 남아 있는 자료들이 적었기에 그 폐단을 알고 그러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아라한의 존재를 떠올려보면 아라한을 이러한 기도와 기복신앙으로 연결된 것이 엉뚱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전파된 과정을 보면, 불교가 대중화될 때 어려운 불교철학의 체계를 문자도 모르는 대중이 알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기에 부처든 보살이든 나한이든 경배의 대상을 상이나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소원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리라. 나한신앙에서는 아라한들은 각자 다른 신통력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설정되어 있기에 이를 예배하고 기도하는 대상으로 한 것은 인간의 강렬한 소망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나한신앙이 강해지면서 16나한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수많은 소원에 상응하는 신통력과 공능功能을 가진 나한들이 더 필요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하여 500나한으로까지 확장되었는데, 고려시대에는 특히 권력을 가진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500나한상을 제작하여 봉안한 일이 많았다. 이 시절에 나한도羅漢圖가 많이 그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인도의 16나한은 현장법사에 의해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가 번역된 당 왕조 말기에 18나한으로 발전하여 송 왕조 때에는 500나한으로까지 나아갔고, 나한들을 봉안하는 건물을 따로 짓기도 하였다. 나한에 대한 그림과 조각상을 그리고 만들어 봉안하는 일은 오대五代(907~979)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불교가 철학이 아니라 신앙이 되는 종교가 되려면 ‘구원’(=구제, 사죄赦罪)과 ‘영생’(=부활, 극락왕생)이라는 요소가 있어야 하기에 나한신앙도 붓다의 가르침과는 달리 후세 인간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리라. 구원과 영생은 수천년 전 이집트, 그리스의 고대 종교에도 있었는데, 동서를 막론하고 종교적 신앙에서는 그 출발점에서 생성된 관념이기에 수행자들이 기복신앙의 폐단을 아무리 강조해도 대중들은 이를 쉽사리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불교의 진면목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그러하니 ‘방편’이라고 하며 타협을 하게 된다. 불교가 기복祈福종교가 아니고 기독교가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수행자나 종교이론가들이 아무리 강조를 해도 이에 귀 기울이는 대중은 흔하지 않다. 구원과 영생이라는 것이 인간 욕망의 저변에 흐르는 가장 강렬한 원망願望인데 이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선종에서는 이러한 것도 망상이니 모두 버리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 많은 나한상과 나한도를 봉헌한 사람들이 모두 복을 받았다는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붓다는 말했다. 무명에서 깨어나 지혜를 닦아 사성제四聖諦를 증득하고, 그를 이해했으면 이해한 너 자신을 등불로 삼아 굳건히 믿고 실천하라. 그러면 고苦는 없어지고 즐겁게 살게 된다. 간단한 가르침인데 욕망이 부글거리는 인간이 이것이 잘 안 되니 나한들만 붙들고 매달린다. 나무석가모니불〜
요즘은 500나한상이 그 표정이 각각 다르고 코믹하고 깜찍스럽다고 하면서 미술의 인물조각으로 전시도 하고 관람도 한다. 재미있는 모습이다. 아무튼 나는 영산전을 나오며 500아라한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기를 중생의 마음으로 기원해 보았다. 그 소원에 아라한과阿羅漢果(arhat-phala)를 얻기를 바라는 소원도 부디 들어 있기를 기대하면서.
보화루와 마주하고 있는 건너편의 적벽赤壁 아래 맑은 물을 조용히 보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른다. 송홧가루가 날려와 수면 위에 소리 없이 앉는 시간도 고요함이고, 가을날 단풍 사이로 맑은 물에 비치는 푸른 하늘도 고요함이다. 움직이든 멈추어 있든 물을 보고 있으면 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보게 된다. 물이 고요하니 물에 비추어진 내 마음이 드러나고 물이 흘러가니 내 마음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유가儒家든 불가佛家든 수양修養을 통하여 인간 완성의 길을 추구한 도학자道學者들은 고요함[靜] 속에서 물을 보는 ‘관수觀水’와 ‘관란觀瀾’을 높이 쳤을 것이다. 물가의 정자에 ‘관란정’이나 ‘관수정’이라고 하는 이름의 현판을 건 이유이기도 하다.
달빛 비치는 고요한 밤에 이 앞에 앉아 있어 보아도 좋다. ‘화영홀생지월도花影忽生知月到 죽초미동각풍래竹梢微動覺風來’라고 한 옛 사람의 시구가 딱 들어맞는다. ‘홀연히 꽃의 그림자 생겨남에 달이 머리 위에 이르렀음을 알겠고, 대나무 가지 끝이 살짝 움직임에 바람이 불어옴을 깨달았도다’라는 말이다. 서산에 해가 넘어갈 때 은빛 바다에서 노닐다가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니 구름은 보이지 않고 높은 하늘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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