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대승기신론』과 헤겔철학에 근거한 생명의 정신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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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3 년 8 월 [통권 제124호] / / 작성일23-08-04 21:12 / 조회2,207회 / 댓글0건본문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32 | 당군의 ③
동양의 정신현상학
당군의唐君毅(1909~1978) 철학은 ‘생명심령’이라고 하는 마음의 초월성에 근거한 종교철학, 문화론, 역사론, 도덕론이다. 그는 인류 정신의 차원에서 ‘생명심령’이라는 생명의 마음이 『대승기신론』의 체·상·용의 관조법에 따라 객관 경지, 주관 경지, 초주객관 경지, 그리고 그 경지 각각 하부에 자리 잡은 9단계의 층위를 단계적으로 상승하여 마침내 ‘도덕 종교’에 도달하는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
이것은 헤겔(Hegel, 1770~1831)의 정신철학을 이론의 기본 구조로 삼고, 중국불교와 서양철학의 다양한 학파에서 얻은 영감을 유학의 심성본체론과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당군의의 ‘9 단계의 마음 이론’(심통구경설心通九境說)은 또 하나의 동양의 ‘정신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의 삼라만상을 통일된 하나의 체계로 포괄하려는 그의 방대한 정신철학을 구성하는 철학적 요소들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중국불교 『대승기신론』의 3대(체·상·용), 그리고 유학, 양명학의 양지良知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객관 경지: 만물산수경, 의류성화경, 공능서운경
당군의의 ‘9단계 마음 이론’ 중에서 정신 활동이 전개되면서 생겨나는 최초의 경지는 객관 경지이다. 객관 경지는 크게 만물산수경, 의류성화경, 공능서운경으로 나누어지며, 만물산수경부터 점차 윗 단계로 올라가게 된다.
만물산수경萬物散殊境은 만물이 다양하게 흩어져 있는 세계이다. 우리가 흔히 현상 세계, 사물의 세계라고 부르는 세계이고, 내가 경험하는 세계이다. “이 경험적 나는 그 밖의 만물과 동류의 본성을 가지고 만물산수경에서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할 때의 나가 경험적 나이다. 이 경험적 나가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근거는 그 외 만물과 다르지 않다. 이 경험적 나와 그 외 만물의 개체성를 초월한 나에는 이러한 의미의 개체성이 없다.”
당군의는 인간에게는 경험적 나와 초월적 나라는 두 가지 이중성이 있다고 본다. 경험적 나는 ‘현실자아’, 또는 ‘당하當下자아’이고, 초월적 나는 이성자아, 또는 정신자아이다. 경험적 나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가 바로 만물산수경으로 나타나게 된다.
의류성화경依類成化境, 공능서운경功能序運境은 만물산수경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한 세계이다. 개체의 관점으로 이해하면 어떤 사물도 개체로 존재하고, 류類의 관점으로 이해하면 모든 사물이 다 일정한 류類에 속하게 된다. 또 공능의 관점으로 이해하면 모든 사물, 사건들이 다 인과 관계 중에 있게 된다.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무한한 인과 관계로 서로 연관되어 있고, 다른 사물들의 작용과 서로 인과 관계를 이루게 된다.
공능서운경도 만물산수경 속에서 인과계, 목적-수단계를 본 것이다. “한 사물의 의류성화를 보고 그곳에 반드시 인과가 있음을 본 것이다. 인간이 사물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목적에 도달하고, 원인에서 결과로 간다. 여기에 모든 공능이 순서대로 운행되는 세계, 또는 인과 관계, 목적 수단의 세계가 있다.” 이 인과는 생명의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작용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객관 경지는 인간 내면의 주관 경지에 의해 가능하게 된 것이므로, 두 번째 경지인 주관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주관 경지: 감각호섭경, 관조능허경, 도덕실천경
감각호섭경感覺互攝境은 주관 경지 중 첫 번째 단계로서 감각이 서로 포섭되는 세계이다. 감각은 인간의 주관적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관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고, 반드시 감각 주체와 감각 대상의 관계가 있어야 한다. 심신관계와 시공계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모든 존재들이 각각 감각 행위의 주체라는 사실을 이성으로 추론해서 안다. 이들 주체와 주체는 서로 포섭하면서 또 각각 독립하고, 흩어져 있으면서 상호 교섭한다. 따라서 이 경을 감각호섭경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당군의는 감각의 근원이 사람의 마음 활동에서 온다고 보았다. 인간의 마음은 사물의 형상에 대해서 ‘주체’, 즉 통일된 중심이 되고, 이는 대상에는 자체가 없지만 마음에는 본체가 있다는 의미이다. 내면의 마음과 마음, 마음과 각 대상은 서로 융통하는 관념임을 아는 것, 그것이 감각호섭경이 뜻하는 것이다.
관조능허경觀照凌虛境은 주관 세계의 두 번째 단계로서 사람들이 사물의 감성적 성질을 버리고 마음이 사물의 보편상과 의의를 직접 관조하도록 한다. 이때 생성되는 보편상과 의의의 세계는 높은 곳에 존재하는 관념이고, 이것이 바로 관조능허경이 된다. 관조능허경은 인식 영역에서 도덕실천 영역으로 진입하는 중간 단계이고, 당군의가 전통 유학을 넘어서는 단계이기도 하다.
“관조능허경은 세속생활의 경계와 초세속생활의 경계를 잇는 중간 경계이다. 인간의 순수 지식, 학술문화 생활이 주로 의탁하는 세계이다.” 당군의가 보기에, 논리이성이나 사변이성으로 보편상과 의의를 보는 관조능허경은 마음의 9단계 중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이전의 협애한 경험세계를 뛰어넘어 보편상과 의의를 관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부터 문자 언어, 문학, 예술, 수학, 논리 등 광대한 마음의 시야가 열리는 것이다. 언어 문자로 표현되는 문학, 철학, 논리학, 수학 등은 보편적 상과 의의를 간접적으로 표시하고, 음악, 미술, 예술 등은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세계는 인간의 마음 활동에 의해서 표현된 것이어서, 당연히 이 마음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도덕실천경道德實踐境은 감각호섭경, 관조능허경과 같이 주관 경지에 속하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감각호섭경은 자신의 감각 활동에 대한 이해이고 관조능허경은 자신의 지식 활동에 대한 이해이지만, 그들은 대상이 변화하기를 구하지 않는다. 반면에 도덕 이성의 활동은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만큼 대상의 변화를 추구한다. 따라서 도덕을 실천하는 경지인 것이다. 도덕은 인간의 생명, 인간의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이 도덕적 마음은 외부 세계와 감통하였을 때 다양한 덕으로 표현되고, 개인의 도덕적 마음인 동시에 인류 전체의 도덕적 마음이기도 하다. “도덕에 근본을 둔 인간의 양심, 일반적 도덕 관념, 윤리학 지식, 인간의 도덕 행위, 도덕 인격의 형성 등 모든 것이 이 경에 근본을 둔다.” 주관 경지에 속하는 이 세 경은 모두 주체가 객체를 함섭하는 경계로서, 주체 세계가 객체 세계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감각 세계, 학문 세계, 도덕 세계인 것이다.
초주객관 경지: 귀향일신경, 아법이공경, 천덕유행경
귀향일신경歸向一神境은 초주객관의 경지의 첫 번째 단계인데, 초주객관 경지는 주관 세계와 객관 세계를 포괄하면서 그 둘을 초월하는 경지를 말한다. “초주객관 경지에서는 주체가 객체를 포섭해서 나아가므로, 주체가 중심이 된다. 자각에서 초자각으로 가므로, 자각 속에 초자각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초주객관 경지는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절대주체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첫 번째 세계인 귀향일신경은 일신교에서 말하는 신神의 세계와 관련된다.” 귀향일신경은 마음이 활동하면서 초월적인 전지전능의 인격신이 만들어내는 경지를 본 것으로, 일신교의 경지이다. 당군의는 종교적 신, 상제上帝, 열반涅槃, 귀신의 경지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아법이공경我法二空境은 초주객관 경지의 두 번째 단계인데, 이것은 타인과 나, 주체와 객체의 분별을 초월하는 대단히 독특한 경지이다. “아법이공경은 법계法界를 본다. 이것은 불교에서 일체법계, 일체법상의 의미가 중요한 것과 연관된다.” 이 세계는 생명의 마음이 초월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정신세계와 물질세계가 모두 공환空幻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경지로서, 불교의 깨달음의 세계에 해당한다. 당군의는 아법이공경을 불교의 인연, 인과응보설, 무량세계, 삼세三世, 중생구제 개념을 포함해 설명하였고, 인과 관계 역시 인간의 주관적 마음에 귀결하였다.
천덕유행경天德流行境은 초주객관 경지의 마지막 단계로서 인간의 마음 활동이 궁극으로 도달하는 최종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 세계는 유학의 초월적 성향을 반영한 것으로, 이 초월적 경지는 기독교의 신, 불교의 아법이공我法二空의 경지와 동일하게 경험을 넘어선 초주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천덕유행경은 일신교의 귀향일신경이나 불교의 아법이공경과는 다르다. “천덕유행경은 주관과 객관, 자연과 인간, 사물과 나를 통하여 주객의 구분을 뛰어넘는다. 이 경은 진성입명경盡性立命境이라고도 한다.”
천덕유행경은 지금 이 자리에서 생명 존재와 현재 세계를 긍정하고 천과 인, 주체와 객체, 사물과 나의 간격을 관통하여 주객의 대립을 융통시켜 초주객관경지에 도달하는 지극한 도덕실천경이다. 초주객관경지는 인류 마음 활동의 최고 활동 단계이고, 그중에서도 천덕유행경이 최고의 경지이다. 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 경지가 초주객관 경지의 천덕유행경인 것이다. 인간 정신 활동의 최고 단계로서 “첫 번째는 일신교의 경계, 두 번째는 불교의 경계이며, 세 번째는 유학의 경계이다.”
‘9단계 마음이론’의 사회정치적 함의
당군의는 중국이 양무운동, 변법유신, 신해혁명, 5·4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서양의 문화를 수용한 근대라는 시간은 서양정신과 문화에 주목하지 않고 다만 공리적 동기에서 서양의 힘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중국의 정신과 생명은 비굴하게 변모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공리적 욕망’이야말로 중국의 정신문화를 천박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과 서양의 문화적 충돌을 심성론의 틀 속에서 해속하려고 노력하였고, 동양의 정신 위에 서양의 민주와 과학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의는 인류의 모든 문화 창조 활동을 도덕을 본성으로 하는 생명의 마음 이론 속에 포용하고자 하였다. 그 이론이 바로 ‘마음의 9단계 이론’인 것이다.
헤겔 철학에서 추구하는 것이 이론 이성이라고 한다면, 당군의 철학에서 추구하는 것은 도덕 이성에 해당한다. 당군의는 헤겔처럼 이성이 필연적인 자유를 인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도덕 이성이 현실을 꿰뚫어 생활을 도덕화, 종교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자신의 철학은 “헤겔의 철학과 같지 않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주관 정신, 인간의 ‘본심本心’, ‘인성仁性’은 생명의 마음에 유행하면서 모든 생명 존재의 밑바닥에 선험적으로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유학의 사유 방식인 동시에 불교의 불성, 여래장심, 특히 진여연기론과 통하는 것이다. 이 점이 당군의 철학이 유학에 속하면서도 진여연기론을 말하는 중국불교와 연관되는 접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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