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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심리학의 만남]
연기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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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조  /  2023 년 5 월 [통권 제121호]  /     /  작성일23-05-05 13:34  /   조회2,43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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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불교의 존재론, 인식론, 진리론을 연기, 세계, 인간과 함께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 2회에 걸쳐서 연기와 인간, 진리와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제까지 존재론, 인식론, 진리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면 이번 호에는 연기와 인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더라도 인간 자체에 대한 논의는 마음에 대한 논의의 바탕이 되므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분야이다.  

 

이지연기二支緣起 – 세계

 

연기는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십이지연기와 이지연기이다. 십이지연기는 시간적인 관점에서 이시적異時的으로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생멸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고, 이지연기는 공간적인 관점에서 동시적同時的으로 연기되어 있는 모습을 의미할 수 있다. 이지연기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할 때 저것이 멸한다’는 연기의 구절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것’, ‘저것’은 원래 십이연기의 각지各支를 대입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지만, 후대에는 각지와 더불어 존재 전체를 대입하게 되었다. 십이연기를 확장하면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대해서 성립하고, 이시적으로뿐만 아니라 동시적으로도 성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시적 상호의존성의 전형은 후대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존재, 여기서는 법계法界라는 세계가 중층적으로 끝없이 연기하고 개현하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 이는 연기적 관계가 무한하고 누진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법계연기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관계적 존재가 된다. 법의 생멸은 연기적 관계에 의해서 생멸한다는 것이다. 이는 법의 생멸의 기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연기적 관계에 의해서 모든 존재의 생멸이 설명된다. 존재와 운동이 함께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운동법칙이 존재의 법칙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는 법계연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물이 연기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시적 순서에 따른 생멸을 설명하는 동시에 동시적인 상호의존성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시적 생멸성의 전형은 붓다가 제시한 생로병사의 원인을 찾아가는 십이연기라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는 이시적 순서에 의한 십이연기에 의한 생로병사의 소멸에 초점을 맞춘다면, 대승불교는 동시적 상호의존성에 초점을 맞추어 세계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연기론은 법론에서 보여준 존재가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연기론은 법뿐만 아니라 법에서 파생되는 인식, 세계, 인간, 마음에까지 그 운동법칙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법의 특징이 법에서 파생되는 인식, 세계, 인간,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법론이 ‘생멸’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연기론은 ‘연기적 생멸’을 이야기한다. 생멸에 연기성을 추가한 것이다.

 

십이연기十二緣起 – 인간

 

시간적인 관점에서 원인과 결과로 보는 연기의 대표는 십이연기十二緣起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붓다가 자신과 모든 인간의 괴로움을 12단계의 원인과 결과로 파악한 것이다. 이는 ‘괴로움’이라는 결과의 원인관계를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자신의 문제의식인 생로병사의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간다. 붓다는 생로병사에서 무명無明까지 나아가는 연기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원인을 추적한다. 이를 통해서 붓다는 자신의 괴로움의 원인을 찾는다.

 

연기를 순관順觀, 역관逆觀이라는 순서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나, 즉 명색名色을 기준으로 보면 명색이라는 ‘나’의 몸과 마음이 가지는 육입六入이라는 감각기관에서 촉이라는 감각접촉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서 좋다, 싫다는 느낌이 일어나고, 이는 애착과 분노, 그리고 집착으로 나아간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존재가 발생하고, 이를 통해서 노병사라는 괴로움이 발생한다.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라는 사언절구로 보면, 명색육입名色六入이라는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촉수애취觸受愛取라는 감각과 감정이 나오고, 유생노사有生老死라는 새로운 괴로움이 시작된다.

 

그리고 ‘나’라는 명색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무명행식無明行識이다. 식識과 함께하는 행行이 무명無明과 결합될 때는 괴로움으로 나아가고, 식識과 함께하는 행行이 명明과 결합될 때는 괴로움의 소멸로 나아간다. 무명행식無明行識인지 명행식明行識인지에 따라서 괴로움으로 나아갈 수도 괴로움의 소멸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무명無明이 핵심이 된다. 무명이 십이연기의 첫 번째 각지各支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원인적인 것은 아니다. 붓다의 경우에는 괴로움의 소멸이 목표였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면 괴로움이 소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무명에서 연기의 과정을 멈추게 된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그날 초저녁에 자신의 전생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숙명지宿命智를 이루게 된다. 자신의 오래 전 삶의 모습[宿命]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서 붓다는 자신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심리치료적 함의가 있다. 내가 모든 존재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모든 존재에 대해서 수용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저 모습이 나의 모습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단죄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수용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다음으로 지금의 이 모습이 나의 모습의 전부라는 생각이 옅어지게 된다. 내가 수없는 생 동안 다양한 존재였기에 지금의 ‘나’라고 할 만큼 존재가 지속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의 모습을 취하였기에 ‘무아’라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고취될 것이다. 즉 타인과 자신에 대해서 수용과 무아라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붓다가 깨달은 날 한밤에는 모든 존재의 전생과 현재의 마음을 보게 된다. 자신의 전생을 모두 보게 된 붓다는 그 능력을 돌려 모든 중생의 전생을 보게 된다. 모든 중생의 전생을 보게 됨으로 인해서 그들 사이의 모든 연기적 관계가 붓다에게 드러나게 된다. 누가 누구의 부모이고, 이 원한의 원인이 무엇인지 등 모든 연기 관계를 알게 된다. 천안지天眼智로 인해서 붓다는 모든 존재들 간의 연기 관계를 알게 된다. 그로 인해 붓다는 자신의 앎의 끝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의 원인을 알 때, 결과의 원인을 알 때, 우리는 ‘알았다’라고 한다. 모든 존재들 간의 인과 관계를 알게 된 붓다는 앎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게 되고, 그 앎은 마무리된다. 붓다는 자신을 포함한 중생과 관련된 모든 앎을 마쳤던 것이다. 

 

숙명지와 천안지에서 보면 붓다가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순간은 연기가 바탕이 되는 앎을 알았을 때이다. 어떤 사건의 연기적 원인을 알았을 때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앎의 연기적 원인을 추적하는 것은 단순히 이번 생이 아니라 과거 생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분명한 앎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앎이 분명해질 때, 팔정도의 관점에서 보면 첫 번째인 정견正見이 해결되어야 나머지를 실행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여덟 가지가 상호 증장하는 구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가 첫 번째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이루는 그날 밤 팔정도의 첫 번째인 앎을 남김없이 알아버린 것이다.

 

사진 1. 그날 밤 이곳에서 저 별과 함께.

 

그로 인해 새벽녘에 붓다는 더 이상 알 것이 없어진다.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어둠[無明]에서 밝음[明]으로 나아가게 되고, 미세한 모든 번뇌의 원인까지 알게 된다. 번뇌의 원인을 알게 되면 결과로서의 번뇌가 풀리게[漏盡智] 되고, 녹아내리게 된다. 붓다는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연기적으로 알 수 있게 됨으로 인해서, 번뇌가 사라지게 되고 자신의 문제의식이었던 생로병사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의문이 들지 않게 되었다.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십이연기는 붓다의 문제의식에 따른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다. 여기에 더해서 모든 존재, 특히 유정의 연기관계를 앎으로 인해서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즉 붓다는 단선적 십이연기와 함께 모든 존재의 중층적 연기관계를 보게 된 것이다. 십이연기가 이지연기적 함축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 – 오온

 

진리론에서 인간을 기능적 존재, 가능적 존재라고 이야기하였는데, 불교에서 인간은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기능을 가진 존재를 인간이라고 한다. 오온은 인식론에서 인간을 감각기관을 가진 감각기능적 존재로 본 것을 넘어서 다른 기능을 가진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색色이라는 몸의 감각기관의 감각기능뿐만 아니라, 수受는 느끼는 감각기능을 말하고, 상想은 이미지와 사고를 감각하는 기능이고, 행行은 수많은 의도, 그것이 미세하든 거칠든 업을 만들어내는 기능이다. 식識이라는 미세한 감각은 색수상행色受想行을 모두 매순간 알아차린다. 식識에 의해서 매순간 감각되고 알려진다. 오온에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는 감각기능에 더해 수상행受想行이라는 감각기능이 있다. 그리고 이들을 감각하는 기관으로서 식識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의意에 의한 감각기능을 식識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몸에 의한 감각 이외에 수상행受想行이라는 감각을 더하고 있다.

 

이렇게 십이연기에서 육입六入이라는 색色의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대상을 만날 때, 십이연기에서도 오온에서도 수受라는 느낌을 느낀다. 수애취受愛取라는 십이연기의 관계는 다른 연기 관계에서는 수상사受想思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애愛는 오온의 상想과 동일하고, 사思는 행行과 동일하다. 이때 만들어진 행行은 다시 십이연기의 처음으로 연결된다. 오온의 행行과 식識은 십이연기의 행行, 식識과 동일하다.

 

사진 2. 십이연기와 육도윤회도.

 

식識과 함께하는 행行은 전생부터 전해지는 미세한 행에서부터 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거친 행까지 포함한다. 무명행無明行은 전생부터 전해지는 번뇌에서부터 거친 번뇌까지를 말한다. 이러한 번뇌와 함께하는 식識은 명색名色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십이연기에서 무명행식無明行識이 되면 오온은 오취온五取蘊이 되고, 십이연기에서 명행식明行識이 되면 오온은 오법온五法蘊이 된다. 십이연기는 이시적 관점에서 시간순으로 발생한다면, 오온은 동시적 관점에서 공간적으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씨줄과 날줄처럼 이 둘은 잘 맞아 들어간다. 

 

지금의 십이연기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三世의 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십이연기를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이라는 삼세에 걸친 연기로 보면 생멸하는 무명행식無明行識은 윤회의 주체 역할을 한다. 매 순간 생멸하는 식識은 생멸을 방해하는 무명無明에 의한 행行과 결합하면서, 무명행식無明行識은 윤회의 주체 역할을 한다. 무명행식無明行識이 되면서 ‘유지’가 된다. 그러나 명행식明行識이 되면 ‘유지’는 다시 ‘생멸’로 나아가고 윤회의 주체는 해체되어 버린다. 즉 십이연기의 역관이 성립하게 된다. 무명행식無明行識이면 오취온이고 윤회의 주체가 되는 반면, 명행식明行識이면 오법온이고 윤회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식은 불교마음학의 주제가 된다. 식識이 명행明行과 결합하게 되면 식識의 원래 모습이 드러나서, 번뇌가 없는 청정한 상태의 식識이 된다. 이러한 식識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오온의 가능성이 현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명明에 의한 행行, 육입六入, 수受, 상想으로 나아갈 것인가, 무명無明에 의한 행, 육입, 수, 상으로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마음의 본모습을 알고자 하는 마음학의 목적은 십이연기와 오온의 본래의 식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고, 보는 것이다. 이 모습을 발견한 이가 붓다이고, 이를 보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무명이 없는 행을 통해서 마음과 존재의 원래 모습을 발견하고, 본 것이다. 

 

심리치료적 함축은 명확하다. 붓다가 발견한 십이연기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문제의 원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번뇌를 없애는 방법이 있고, 마음의 원래의 모습을 보는 방법이 있다. 번뇌가 없으면, 즉 명행明行이 되면, 마음의 원래 모습, 즉 식識이 드러나게 된다. 식識의 원래의 모습을 보더라도 무명행無明行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다. 마음의 원래의 모습에 의지하여 수많은 무명행無明行을 명행明行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식識은 원래 명明이다. 마음은 원래 빛이 난다. 무명無明은 항상 행行과 함께한다. 식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무명행無明行일지, 명행明行일지는 이후의 부지런한 번뇌 다루기에 달려 있다. 견성을 돈오頓悟라고 할 수 있다면, 돈오점수頓悟漸修인 것이다. 불교심리치료에서는 견성見性이라는 마음학의 측면과 점수漸修라는 심소학의 측면을 모두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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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조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ㆍ석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석ㆍ박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불교상담학전공 지도교수. 한국불교상담학회 부회장, 슈퍼바이저. 한국불교학회 부회장. 저역서로 『불교심리학연구』, 『불교의 언어관』, 『불교심리학사전』 등이 있다.
heecho12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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