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근대 중국불교에 대한 일본불교의 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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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3 년 5 월 [통권 제121호] / / 작성일23-05-05 11:45 / 조회2,111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28 | 오구루스 코쵸
오구루스 코쵸小栗栖香頂(1831~1905)의 최대 성과는 최초로 중국에 일본불교를 포교한 일이다. 오구루스의 중국 진출은 고대부터 이어진 교류사적 측면에서, 혹은 일본불교가 아시아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홋카이도 개척
오구루스 코쵸는 오이타현 정토진종 오타니파(동본원사) 묘쇼지妙正寺에서 태어났다. 14세(1844)에 유학자 히로세 단소広瀬淡窓가 설립한 함의원咸宜園에 들어가 한학을 배웠다. 함의원은 메이지 이후 일본의 지도자를 대거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데, 오구루스는 그중에서도 ‘함의원 삼재三才’로 불릴 만큼 뛰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6년간 수학하면서 마츠모토 핫카 등과 친교를 맺었다. 22세(1852)에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동본원사東本願寺의 기숙학교에 입학해 수학했다.
39세(1869)가 되던 해, 메이지 정부는 정토진종의 종파명을 ‘일향종一向宗’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종 내부는 정부의 명령에 수긍하기 어려웠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오구루스 혼자 반대운동을 추진해 종명을 회복시키는 결과를 얻어냈다.
이듬해 메이지 정부는 동본원사에 홋카이도北海道 개척을 명했다. 정부가 이러한 강제적 명령을 내린 데에는 징벌적 성격과 재정 조달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메이지 정부에 유연했던 서본원사와 달리, 동본원사는 여전히 구 에도막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토바·후시미 싸움鳥羽伏見の戦い에서 에도막부가 메이지 신정부에 패하면서, 동본원사의 문주인 오타니 코에이大谷光瑩는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써서 신정부에 보냈다. 이 토바·후시미 싸움을 기점으로 2년여에 걸친 내전[戊辰戦争, 1868~69]이 일어났고, 메이지 신정부는 전비戰費로 인해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다.
1869년 6월, 동본원사 측은 ‘홋카이도 개척 의향서’를 제출하며 정부의 명령에 순응한 듯 보였다. 홋카이도 개척은 동본원사에 있어서도 양날의 검이었다. 장기적으로는 교세를 확장하는 이점이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그 어떤 성과도 얻을 게 없었다. 더해서 조죠지增上寺 등도 개척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개척사업에는 뛰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본원사가 이 일을 착수한 데에는 메이지 정부를 향한 충성심 표시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종단 내 개혁파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측면도 컸다. 당시 정토진종 서본원사가 빠르게 교단 개혁에 착수한 것과 달리, 동본원사는 여전히 봉건세력이 강했다. 오타니 코에이는 홋카이도 개척사업을 통해 구세력을 잠재우고 개혁파를 치켜세워 내외적으로 동본원사가 개혁노선을 걷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이는 구세력과 개혁파, 양측으로부터 집행부에 대한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가 컸다.
1870년 2월, 100여 명의 개척단이 교토에서 출발했다. 이후 도쿄·야마가타山形·니가타新潟를 거치면서 1만 명 이상의 개척단과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다. 동본원사는 개척사업을 판화로도 제작해 홍보했는데, 이는 종무 기구 개혁을 요구하는 개혁파의 주장을 일시적으로나마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오구루스는 교단의 상황을 설명받고 홋카이도 개척이 진종 포교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오타니 코에이를 수행해 홋카이도 개척에 참여했다. 홋카이도 개척에 대해, “이 사업은 천년에 걸친 국가의 치적이고 우리 종단이 재흥할 기회이다. 사람들은 모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내가 안을 내자면 스스로가 동북지방의 모든 단월들을 방문해서… 이는 종단을 위한 것이다. 누군가가 분발 흥기해야 한다.”라고 코에이에게 진언하고 이를 직접 수행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홋카이도 개척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개혁의 요구 역시 봉쇄하지 못했다. 이듬해(1871~72) 구세력과 개혁파가 종정의 주도권을 놓고 크게 격돌했고, 오구루스의 홋카이도 개척도 여기에서 막을 내렸다.
중국불교의 재인식
오구루스는 본격적인 중국 포교에 앞서 1873년(43세)에 중국 유학을 떠났다. 상하이와 텐진을 경유해 북경에 도착한 그는 용천사龍泉寺에 머무르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북경 체재 중에 『북경기사北京紀事』·『북경기유北京紀游』·『지나개종견입支那開宗見込』 등을 저술했다.
당시 중국불교의 현황은 오구루스가 일본에서 막연히 동경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상이했다. 상하이에서 북경까지 오구루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서양인과 그리스도교의 위세였다. 상하이에는 큰 사찰은 없고 대신 교회가 다수 존재했고, 서양인에게 혼나는 중국인의 모습은 이질감이 들었다. 더욱더 기함하게 한 존재는 회교(이슬람교)였다. 그는 텐진과 북경을 비롯한 중국 서북부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종교가 불교가 아닌 회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회교의 교조인 마호메트는 불교의 우상숭배를 나쁘게 보고, 산에 숨어서 코란을 쓰고 자신을 하늘의 사자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알라를 숭배하게 하고 육식은 하지만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다. 병사를 동원해 난을 일으키고 다른 회교국을 공격했다. 또 유럽과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이집트를 약탈했다. 그의 제자들이 가는 곳곳 포교를 해서 인도인 절반은 회교도가 되었고, 몽고와 청국까지 회교가 퍼졌다. … 커튼 안은 신을 숭경하는 곳이지만, 나쁜 회교도는 커튼 안으로 여성을 불러 낮부터 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아아, 혼세에 사악한 무리만이 성행하는구나.” -『북경기사』 중 일부-
그의 저서에는 회교에 대한 편견 또한 읽히지만, 회교에 대한 이해는 비교적 구체적이다. 북경에 도착한 이후 오구루스는 라마교의 위세가 기존의 중국불교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다시 한 번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가 일본에서 들었던 라마교는 기괴하고 인간으로 변한 도깨비라는 기피하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직접 라마사원을 방문해 라마승과 회견을 하면서 라마교가 청淸 조정의 존경을 받고 대단한 정치력을 가졌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상하이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오구루스는 각 지역의 사원을 방문했다. 중국어가 능통하지 않아 주로 필담으로 주고받았지만, 그는 이 여정에서 중국불교의 무력함과 쇠퇴함을 체감하고 이를 본국에 보고했다.
“북경에는 백여 개의 사원이 있으나 학문을 하는 곳은 내가 머무는 용천사龍泉寺가 유일하다. 그 외에는 글을 모르는 어리석은 승려들뿐이다. 오대산은 육백 개, 아미산은 삼백 개, 보타산은 이백 개, 구화산에 삼백 개의 사원이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고승은 없다. 구습만이 남아 장례식의 관을 1년간 사원에 두고 현세의 행복을 기원한다. 승은 무엇을 목적으로 염불하는 것인가. 속은 마음 안에 불법이 없다.” -『북경기사』 중 일부-
기대가 큰 만큼 실망과 좌절도 컸다. 일본의 중국불교에 대한 동경은 오구루스의 여정 루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문수신앙의 성지 오대산, 보현신앙의 성지 아미산, 관음신앙의 성지 보타산, 지장신앙의 성지 구화산. 그가 불교 성지에서 만나길 바랐던 고승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고, 대사찰에 남아 있는 승려들도 스무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가 만난 중국 승려들은 사찰의 장경과 경전을 팔았고, 유서 깊은 불상은 청소한 지 오육십 년이 넘었다고 통탄했다. 심지어 텐진에서 만난 승려는 아편을 피우면서 오구루스에게 권하기까지 했다.
여행의 끝에 오구루스가 내린 결론은 “불립문자의 선종이 중국불교 전체를 쇠퇴시켰다.”였다. 중국불교에 대한 동경은 사라졌고 오히려 다양한 종교를 경험했다. 중국불교는 일신할 기력조차 없고 생명이 다했다고 느꼈다. 아니, 자신이 속한 정토진종 동본원사 역시 일신하지 않으면 중국불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중국불교에 대한 이질감을 가지고 오구루스는 일본으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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