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 저편 티베트 불교]
티베트 민족의 새해맞이 걀와로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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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12:20 / 조회2,557회 / 댓글0건본문
4월에 열리는 9번의 새해맞이 행사
2023년 티베트 민족의 ‘걀와로사르(Galwa,또는 Galpo Losar)’가 2월 21일부터 시작되었다. ‘로사르’는 ‘로(lho: 해, 나이)’와 ‘사르(sar:새롭다)’가 합쳐진 티베트어로 ‘새해’를 뜻한다.
그러나 비크람력Bikhram(주1)에 의한 네팔의 공식적인 새해는 4월 14일로 네팔의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네와리족의 설날을 기준으로 하는 날짜이다. 그렇지만 네팔의 소수민족들은 따로 설날을 정해 각기 새해맞이를 벌인다. 정부 따로 소수민족들 따로 노는 ‘따로국밥’인 셈이다. 그래서 네팔 정부도 그들 중 9개 민족의(주2) 설날만을 비공식으로 인정해 주고 있다.
네팔 생활 8년차인 나의 관심은 당연히 티베트 민족의 설날인 ‘걀와로사르’에 있다. 따라서 해마다 로사르 때가 되면 난민촌을 찾아 그들과 함께 명절기분을 만끽한다. 그들은 새해가 다가오면 집안 곳곳과 마을 어귀에 오색 깃발 ‘다르촉’을 새로 바꿔 달고, 곡식을 빻은 ‘짬파가루’를 허공에 뿌리면서 “끼끼소소 라걀로”라는 벽사闢邪의 주문을 외우며 새해맞이를 한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갖가지 곡식으로 만든 ‘체마’라는 것을 현관에 설치하여 손님을 맞고, ‘모모’란 고기만두와 ‘캅세’란 꽈배기를 만들어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나아가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며칠 동안을 새해맞이를 즐기는데 우리 한민족과 연결고리가 많아 흥미롭다.
티베트 민족의 망명사태
나라를 잃은 지 70여 년이 된 민족이 낯선 나라에서 민족의 고유풍속을 지키며 그들만의 설날을 맞는다면 그 감회는 과연 어떨까?
7세기 전후 당나라와 어깨를 겨루던 막강한 투베吐蕃 제국이 분열되면서 쇠약해진 티베트는 13세기에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근대에 들어 다시 청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았지만 그래도 주권국가의 정체성은 고수하고 있었다.
특히 13대 달라이라마 둡텐걈초(1875~1933) 통치 시기였던 청나라 말기에는 중국 각지에서 내란이 일어나 나라가 쇠약해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티베트에 주둔하고 있었던 청나라의 군대를 몰아냈다. 그리고는 세계만방에 외교사절단을 보내 주권국가임을 알리기도 했다. 그 당시 티베트 정부가 발행하고 여러 나라의 입국비자 도장이 찍혀 있는 실제 여권의 실물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주3)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그 여세를 몰아 1950년 인민해방군이 다시 밀려들어오자 순순히 국토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해에는 이른바 ‘17개 조 평화협정’이라 불리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중국에 예속되어 버렸다.
그러자 붉은 중국의 통치에 대한 티베트 민족의 저항과 분노는 산발적으로 이어졌고, 1959년에는 대규모 무력시위까지 벌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국왕의 통치권을 이양받은 14대 달라이라마 텐진갸초와 정부 각료들은 중국 군대의 무력 진압과 체포설에 두려움을 느껴 1959년 티베트 본토를 탈출하여 인도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에 티베트인들은 국왕이자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하늘같이 신봉하는 달라이라마를 따라 고국을 떠나 히말라야를 넘어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티베트 민족의 대규모 망명사태이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티베트를 탈출해 온 초기 난민들이 8만여 명에 달하고 이어서 대규모 저항운동이 벌어진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사이의 제2기 난민들이 18,700여 명에 이르렀다.(주4) 그러나 티베트 국경지역의 경비가 강화된 2008년부터는 난민의 숫자가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지만 암튼 망명사태가 고착화된 당시 전 세계에는 12~15만 명의 티베트 망명자들이 발생하였다.
난민 초기에는 구미제국과 인도와 네팔은 이들 난민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각지에 임시 난민촌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대국화에 따른 압력으로 네팔 당국은 1998년 이후에는 더 이상의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음에 따라 난민문제는 갈수록 해법을 찾기 어려워지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공식적인 난민촌에 소속된 망명자들에 비해 이런저런 사정으로 공식 난민증이 없는 난민들은 불법체류자(주5)가 되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모든 난민들은 인도 다람살라의 중앙정부로부터 ‘랑쩬락뎁’이라는 등록증을 발급받는다. 이 등록증으로 각종 증명서와 중앙정부기관의 취임권, 투표권, 공립학교, 사원, 직업훈련 시설 등의 참가권, 티베트 중앙정부 공인의 비정부기관(NGO) 등에 대한 등록권 등 각종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등록증이 네팔 정부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주6)
포카라 근교 티베트 난민촌
200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네팔에는 전체 티베트 난민의 10%에 해당하는 2만여 명이 11개의 난민촌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개7)의 난민촌(Tashi Palkhiel, Tashliling, Paljorling, Jampaling과 이외에 20여 명이 거주하는 아주 작은 규모의 Tashi Gaug)에 나눠 살고 있는데, 나와 인연이 깊은 따시빨키엘Tashi Palkiel 난민촌도 그중 한곳있는데 나와 인연이 깊은 따시 빨키엘Tashi Palkiel 난민촌도 그중 한 곳이다.
이곳은 1962년에 형성되었고, 현재 750여 명의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비교적 큰 마을이다. 이곳에는 ‘마운트 카일라스Mount Kailash’라는 이름의 초·중고, 기념품점, 카페트 공장, 전시장 등이 있다. 신앙의 중심지로는 겔룩종파와 샤캬종파의 사원이 있고, 부대시설로 유아원과 양로원도 있다
나는 지난 5년간 이곳에 소속된 마운트 카일라스 학교에서 미술강사 노릇을 하였다. 내 경력이 말해 주듯 나는 ‘네팔통’이라기보다 ‘티베트통’이기에 자연히 어떤 끌림에 의해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것 같지만 전생이나 내생에 관련된 인연설이야 누가 확답할 수 있겠는가?
이 학교는 유치원부터 7학년까지 130여 명이 재학하고 있는데, 이들 중 과반수 학생들의 집이 아주 먼 곳에 있어 기숙사에 머물고 있다. 나는 주로 이들을 돌봐주면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곤 하였다. 그렇기에 언젠가 인연이 무르익으면 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고 싶은 꿈을 꾸고 있다.
티베트 난민들의 미래
중국화된 지 70년이 지난 티베트 본토의 상황은 어떨까? 물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경험한 일제치하 36년간에 비하면 70년이란 기간은 한 민족의 정체성을 오롯이 지켜내기엔 너무 긴 세월이다.
필자가 라싸에 거주했던 1995년의 경험으로는 한족들의 인해전술은 가공할 정도였고, 나아가 티베트 민족 중에서 특히 중국식 교육을 받고 자라난 ‘상류계급의 중국화’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더구나 2005년 개통된 이른바 ‘하늘열차’의 본격적 운행 이후로는 한족의 인구 유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6백만 티베트인의 2배를 넘는다고 알려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올해 88세를 맞은 달라이라마 성하의 후계문제도 복잡다단하다. 그 향배에 따라 성하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사는 수많은 난민들의 미래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성하께서는 제15대 달라이라마 후계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티베트의 종파적 속셈과 중국정부의 검은 책략의 결과로 적어도 2명 이상의 15대 달라이라마가 옹립 될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연임된 국무총리 삼동 린포체 인터뷰를 보면 미래의 청사진은 어느 정도 읽히기는 한다. 이른바 성하가 주창한 ‘중도정책’을 지지하면서 중국 측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대책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건 티베트의 분리 독립이 아니다. 중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티베트를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특별자치구로 만들어 전통문화와 민족성을 지켜나갈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책이 실현되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바로 달라이라마에 대한 절대적 믿음으로 이른바 ‘달라이라마의 113세 해방론’이다. ‘네충신탁’에 의하면 달라이라마 성하가 113세가 되기 전에 티베트는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설이다. 과연 ‘네충’이란 한 무당의 입에 민족의 미래를 거는 것이 종교적 믿음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단순한 미신적 행위로 보아야 할지는 티베트 매니아들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는 요즘의 한국 정치권의 현상과 오버랩되면서 뭔가를 곱씹어 보게 만든다.
<각주>
(주1) 네팔은 비 크람력Vikram Sambat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데 태양력과 비교하면 56.7년이 빠르고 날짜까지 다르다.
(주2) 그 외에도 이 ‘로사르’를 설날로 삼는 소수 부족들로는 따망족, 따카리족, 세르빠족, 욜모족, 부띠아족, 마가르족, 마나기족, 무스탕족, 와룽기족 등이 있지만 날짜는 각기 다르다.
(주3) 1947년 티베트 정부의 재무부장관 왕축데덴이 소지했던 여권으로 영국, 미국,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의 입국허가 스탬프가 찍혀 있다.
(주4) 인도의 네루 수상은 ‘Tibetan Rehabilitation Society’를 조직하여 1960년 12월 16일 데라둔 모소리Dehradun Mussorie에 최초로 난민촌을 세워서 3천여 명을, 다시 미싸 마리Missamari에 6천여 명 그리고 과거 영국 전쟁포로 수용소이자 부탄 국경인 서부 벵갈 부사두아르Buxa Duar에 9천여 명을 수용하였다.
(주5) 네팔의 공식 난민증이 없는 티베트 불법체류자들이 5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주6) 박선영,「고의적 망각과 희망의 아이덴티티 -네팔 포카라 티베트 난민을 중심으로 -」(중국사 연구, 제92집, 2014, pp.311~338).
(주7) 4개의 난민촌(Tashi Palkhiel, Tashliling, Paljorling, Jampaling, Tashi Gaug)에 나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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