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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사막이 숨긴 불교미술관 ]
돈황 문화의 형성과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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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  2024 년 9 월 [통권 제137호]  /     /  작성일24-09-05 11:12  /   조회1,54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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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사막, 돈황敦皇에 불교미술의 보고가 세워지게 된 원인은 바로 그 특수한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돈황은 간쑤성甘肅省 북서부에 위치하며, 고대 중국에서 서역, 중앙아시아, 유럽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로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곳은 동서 교역의 유일한 통로일 뿐만 아니라 종교는 물론, 문화예술을 융합하고 복합해내는 중요한 장소였다. 

 

황량한 사막 위의 찬란한 빛

 

‘돈황’은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서 비단 무역이 성하던 시대에는 끊임없는 대상隊商들의 상행商行과 구법승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중원에서부터 인도, 그리스, 페르시아의 예술과 문명이 수천 년 동안 혼합되면서 돈황 특유의 문화예술을 형성하였다.

 

2,000여 년 전 중국의 비단이 서방으로 수출되면서 실크로드가 탄생하였지만 이후 실크로드를 통해서 유형무형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 가치가 그 길을 통해 동서로 오고 갔다. 그중에서도 중위도 지방에 펼쳐진 아열대 초원, 스텝 지역을 지나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의 아랫부분의 길도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타클라마칸은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 그만큼 험악한 환경으로 유명하다. 고대 지중해와 동방을 잇는 실크로드를 따라 낙타로 여행하는 대상들도 이 사막만은 피해 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광주에서 떠나서 인도를 지나서 지중해 연안의 바닷길로도 교역이 이루어졌다.

 

사진 1. 막고굴 전경. 사진: 돈황연구소.

 

인도불교의 경우, 인도 중심부로부터 서북 루트를 타고 간다라로 들어와 서방의 그레꼬로망Greco-Roman 문화와 접촉하면서 기원 전후 불상 조각을 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간다라로 이어지는 길 핫다Hadda의 불교사원에서는 헤라클레스 상이 나타나는 등 소위 싱크레티즘syncretisim이라는 종교의 결합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어서 3〜4세기부터는 중앙아시아 키질석굴, 돈황석굴 등이 조영되었다.

 

이중 돈황은 실크로드의 관문에 해당되는데, 즉 오아시스 루트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실크로드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나타날 수 있는 유동적인 역사 현상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된 것에는 왜? 어떤 필요로 이동되었는가? 또 그와 더불어 그 물건들이 끼친 영향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진 2. 실크로드의 관문 돈황 막고굴.

 

특히 불제자들의 동서교류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가령 파르티아의 스님, 중국 후한 시대 역경승인 안세고安世高(fl. 148년〜180년), 소그드의 강맹상康孟詳, 박트리아Bactria의 지루가참支婁迦懺 등은 2세기 때 낙양에서 역경譯經 사업을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 중국에서 인도로 떠난 동진 때의 승려 법현法顯(337~422), 현장玄奘(602~664), 그리고 신라의 혜초慧超/惠超(704~787) 등도 중앙아시아를 오가며 불교를 전파하였다.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두 가지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위쪽을 실크로드 북로, 아래쪽을 실크로드 남로라고 부른다. 이 실크로드 북로와 남로가 함께 만나는 곳에 바로 돈황이 위치하고 있다.

 

위쪽으로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은 일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에 덮여 있어 옛날에는 바이산白山 또는 쉐산雪山이라고 불렸으며, 당나라 때는 저뤄만산折羅漫山이라고 불렸다. 동서주향東西走向의 습곡단회(주1)로 이루어진 산맥으로 천산산맥의 최고봉인 터무얼봉은 포베다산으로 7,443m이다. 아래쪽으로는 곤륜산맥崑崙山脈인데, 무쯔타거산木孜塔格 역시 7,723m나 된다. 이렇게 곤륜산맥이 쭉 이어져 있어서 사막이 아니면 갈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험한 곳이다. 다행히 실크로드와 북로에는 오아시스 국가들이 일찍부터 성립되어 있어 돈황에 이르는 길을 제공해 주고 있다.

 

사진 3. 돈황 막고굴 96굴 7층 북대굴. 사진: 필자.

 

타클라마칸 사막의 중심부에는 석굴을 착굴할 만한 곳이 없으므로 사막 주위에는 거대한 산맥의 산록에 주로 뚫었다. 보통 돈황하면 돈황석굴 하나만 생각하는데, 주변에는 많은 석굴들이 개착되어 있다. 이 사막으로 통하는 통로인 하서회랑河西回廊(주2)의 석굴들, 예컨대 난주의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무위의 천제산석굴天梯山石窟, 장액의 마제사·금탑사 석굴, 주천의 무수산석굴, 옥천의 창마석굴 등 유명한 석굴이 있으며, 돈황석굴, 유림굴과 함께 베제크릭, 키질, 쿰트라석굴 등이 열리게 되었다.

 

원래 불교의 석굴은 기원전 2세기 때부터 인도에서 사당 격인 차이티아caitya 굴과 승방 격인 비하라vihāra 굴의 두 형식으로 출발하였다.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4세기에 중국으로 들어온 뒤 다시 7~8세기 초에 신라로 전해졌다. 이렇게 불교에서 석굴은 천여 년 동안 전파와 수용을 통해 동서의 넓은 지역에 전해진 하나의 보편적인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 예술의 진주 막고굴

 

돈황의 아름다움은 그 이름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돈황이라는 단어는 『사기대원열전史記大宛列傳』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동한東漢의 학자 응소應邵는 돈敦은 ‘대大’ 즉 크다는 뜻이며, 황煌은 ‘성盛’ 즉 번성함을 뜻하므로 ‘더 이상 최고가 없는’ 가장 크고 빛나는 석굴이라는 의미로 풀이했다고 전한다. 돈황의 아름다움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막고굴 내內 천년의 벽화에 있다. 이 막고굴 벽화는 사막에 숨겨진 미술관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는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40,000㎡가 넘는 벽화가 보존되어 왔는데, 이는 각 시대마다 무명의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보물이다. 그래서 여기를 ‘불교미술의 보고’라고도 한다.

 

사진 4. 중수막고불감비重修莫高窟佛龕碑(698). 사진: 돈황박물관.

 

현재 돈황 막고굴에는 10개 왕조에 걸쳐 채색된 소조인 채소彩塑 작품 2,000여 점, 부조 작품 1,0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수량이나 그 본존 상태가 양호함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이 생명력이 넘치는 다채로운 조각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로 하여금 고대인의 신앙과 예술과 교감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미적 탐구 대상이 되고 있다. 

 

막고굴이 개착된 시기는 기록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366년에 개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돈황석굴의 개굴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698년 측천무후 성력원년聖歷元年에 세워진 ‘중수막고굴불감비重修莫高窟佛龕碑’가 있다. 이 석비의 기록에 의하면 전진前秦시대 366년에 낙준樂僔이라는 승려가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다가 명사산과 마주 보고 있는 삼위산三危山이라는 곳을 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앞을 바라보니 명사산 쪽에서 금빛이 찬란하게 일어난 것이 마치 천불千佛이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 산에 천불千佛이 있는 듯한 감상을 조성한 것이 돈황 천불동, 혹은 막고굴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사진 5. 돈황 막고굴 풍경(감숙성 돈황시). 사진: 문종순.

 

이 천불동은 북위北魏, 양진两晋, 오대五代, 수隋의 통치자들과 그 귀족들, 그리고 변경 관리들이 불교를 신봉하며 굴을 개착하고 중수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 지속적인 교체를 통해 돈황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다. 그 후 법량선사法良禪師는 낙준이 개굴한 바로 옆에 다시 석굴을 조성했다고 한다. 북위 시대에는 이곳 자사刺史였던 건평공建平公과 동양왕東陽王이 심혈을 기울여 석굴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양왕은 북위 때 주천 일대의 지방 장관이었던 과주지사 원태영이고 건평공은 서위 때부터 북주 때의 우의로 추정되고 있어서 석굴의 중수 개착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제156굴 밖 북쪽벽에 새겨져 있는 「막고굴기莫高窟記」 중 865년 기記에 따르면 서진 태안 2년(303년)에 진의 사공 벼슬을 살던 색정索靖이 선암사라는 글자를 벽에 새겼으며 이후 조상 활동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 무렵 돈황보살로 명성이 자자하던 축법호竺法護가 돈황에서 포교와 역경사업에 진력하다가 장안으로 들어가 불교를 크게 선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돈황불교의 성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석굴이 어느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사진 6. 막고굴의 표석과 묘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굴로는 268굴, 272굴, 275굴로 추정되고 있으며 268굴 등은 북량北涼(397~439) 때의 것으로 판단된다. 적어도 5세기 전반기의 석굴이 남아 있는 셈이다. 당시 화서주랑河西走廊을 중심으로 중국쪽 실크로드 상에 석굴 조성의 붐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조성되기 시작한 막고굴은 북조를 거쳐 수·당 대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당 중기 이후 장의조張議潮와 조의금曹議金 정권과 그 가족들이 불교를 숭상하며 개굴과 불상 조성을 통한 구원 행위는 돈황 막고굴의 보호와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1,600여 년 동안 찬란하게 이룩한 막고굴은 원대에 이르면서 중원 제국의 군사 역량 내지 집권한 통치자의 의식 형태 변화로 인해 돈황과 실크로드는 점차 방치되고 쇠락했다. 막고굴은 필연적으로 적막하고 매일매일 부는 모래바람에 매몰되고 점차 황폐해지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갔다. 

 

<각주> 

편집자 주 1 : 습곡단회(folding and faulting). 지각이 강한 압력을 받아 휘어져 생긴 층상 구조를 말한다. 마치 책장이 휘어진 것처럼 층층이 쌓인 지층이 휘어져 있는 모습을 가리킨다.

편집자 주 2: 실크로드 초입인 난주에서 돈황에 이르는 길고 좁은 평원을 말한다. 간쑤성甘肅省의 란저우시蘭州와 하서4군河西四郡(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을 포괄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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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동국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수료,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동국대학교 연구교수, 창원대학교 외래교수, 경상남도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경상남도 전통사찰보존위원회 위원, 창원민속역사박물관 자문위원, 한국불교미술협회 회장, 한국교수불자연합회 감사 및 불교미술 작가로 활동 중이다.
seonhik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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