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禪, 禪과 시]
산호 베갯머리에 흐르는 눈물, 절반은 그대 생각 절반은 그대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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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 2023 년 3 월 [통권 제119호] / / 작성일23-03-03 11:24 / 조회3,501회 / 댓글0건본문
사람은 나이가 들면 경험이 많아집니다. 경험이 많아지면 아는 것도 많아지고 오염이 심해집니다. 오랫동안 세상에서 굴러먹은 사람은 세속의 때를 씻기 위해서 스스로 경계를 바꾸려는 시도를 해 봐야 합니다. 산행, 예불, 기도, 독서, 운동, 혹은 차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합니다. 대구에서 가까운 군위에 사유원思惟園이라는 수목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300년 이상 된 모과나무 108 그루가 있다고 해서 만나고 싶어 찾아갑니다. 모과나무를 향해서 나 자신의 밖으로 한번 미끄러져 나가 보려는 것입니다. 삶에서 설렘을 느끼려면 자신을 조금 높은 곳으로 감아올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나무와 햇살과 풍경
각자 자신의 취향과 체력에 맞추어 출발하기 전에 동선動線부터 결정하는 게 좋습니다. 어떤 일이나 어떤 행위를 할 때, 한 걸음 느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감각을 깨우기 위해서는 느릿느릿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평상시 호흡으로 천천히 다닐 작정입니다. 호흡이 가팔라지지 않도록 언덕길은 더욱 천천히 올라갑니다.
사유원의 최초 부지 10만 평에는 원래부터 리기다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습니다. 쭉쭉 뻗은 리기다소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또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답던지요.
“저기 저 햇살 좀 봐!”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은 놓치면 안 됩니다. 이 햇살은 어떤 인위적 조명으로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런 햇살을 코모레비木漏れ日·木洩れ日라고 부르며 좋아합니다. 에밀리 디킨슨도 ‘비스듬히 비추는 한 줄기 햇살’에 사로잡힌 시인이었습니다. 우리도 리기다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나무를 통과하는 햇살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소나무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로 공기는 또 얼마나 깨끗하고 상쾌한지 모릅니다.
아아, 여기, 오길 잘했습니다.
걸어가면서 보이는 겨울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입니다. 나목裸木이 늘어선 스카이라인이 황량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건물이나 표지판도 저요, 저요 하고 나서지 않는 수줍음 같은 것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정향대呈香臺에 올라서자 우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두 그루 소나무 사이로 팔공산 정상 비로봉(1193m)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광활한 경치가 장관입니다. 사실은 이곳뿐만 아니라 사유원 곳곳에서 비로봉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팔공산 파노라마는 사유원 전체에 광활함과 생기를 더해 줍니다.
능선을 훑어보는 파노라마 시야는 우리를 편안하고 차분하게 해 줍니다. 파노라마 시야란 주변의 모든 광경을 받아들이는 시야를 의미합니다. 눈을 혹사하는 초점 시야와는 달리 편도체를 진정시켜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줍니다.
소사나무, 느티나무 등을 바라보며 감탄하다 보면 어느새 정상입니다. 사유원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승효상이 설계한 명정瞑庭이 있습니다. 돌벽을 따라 걷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이는 것은 콘크리트뿐입니다. 명정은 무덤에 들어가듯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지만 천장은 활짝 열린 공간입니다. 바닥으로 내려가면 돌과 물로 이루어진 소박한 공간 하나가 나타납니다.
돌과 물로 만들어진 이 단순한 공간이 사람들의 생각에 깊이를 더해 줍니다. 피안을 상징하는 붉은색 벽은 강렬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붉은색 벽 아래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꿈결인 듯 그윽합니다. 흐르는 물은 망각의 강인 레테를 형상화한 것일까요, 이하백도二河白道를 형상화한 것일까요. 물은 꽁꽁 얼어 거울처럼 빛나고 무심한 듯 달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뜰 앞의 모과나무
사유원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입니다. 6천 평 부지에 수령 300년 이상의 모과나무 108 그루가 신선처럼 서 있습니다. 수백 년이 응축된 모과나무는 압도적인 경외감을 주고 생각에 깊이를 더해 줍니다. 한 그루의 나무에 수백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심오함이 느껴집니다. 신이 있다면 이런 곳에 있지 않을까요.
여기 있는 모과나무는 대부분 분재처럼 키운 것입니다. 분재는 주인에게 매이고 나무의 미래는 주인의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분재를 오랫동안 다루면 관심의 초점이 자신에게서 벗어나 탈아脫我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나무에 대한 관심, 옛사람이 해 놓은 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집니다. 자아가 작아지면 불안 걱정과 같은 부정적 사고가 사라집니다. 자신을 덜 생각하기만 해도 천국처럼 느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주1)
훌륭한 분재를 바라보면 순간적으로 시공간의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이 얼마나 멋진 경험입니까. 우리가 탈아하게 되면 고통스러운 자아에서 벗어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그대로 좌복坐服이자 예배당이자 설법입니다.
선사禪師들의 말씀을 통해 더 멀리 한번 내다보겠습니다. ‘뜰 앞의 측백나무’라는 유명한 화두가 있습니다. 이 화두에는 시적 정서의 뒤엉킴이 있고 존재 심층의 열림이 있습니다.
조주(778~897)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와서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답했다.
“뜰 앞의 측백나무다.”(주2)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이 다섯 글자 안에 선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불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에 뜰 앞의 측백나무라는 대답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측백나무가 바로 도’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무문(1183~1260)도 “만약 조주가 답한 바를 딱 알아차릴 수 있다면, 과거불인 석가도 미래불인 미륵도 없을 것이다.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는 진실을 잃고, 어구에 사로잡히는 자는 헤맨다.”고 덧붙였습니다.(주3)
사실 도는 만물에 골고루 다 있는 것입니다. ‘도는 측백나무’라고 말한 것은 마침 조주의 눈에 측백나무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주로 번역한 것처럼 잣나무라고 해도 좋고, 모과나무라고 해도 좋습니다. 망아忘我의 경지를 향한 소망은 생각을 벗어나서 바로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평온함을 누리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상태가 되면 의지는 모조리 포기되고 순순한 인식주관, 즉 세계의 청명한 눈만 남게 된다고 말합니다.(주4)
산호 베갯머리에 흐르는 눈물,
절반은 그대 생각 절반은 그대 원망
아이고, 범부에게 화두는 정말이지 너무도 난해하고 너무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아름다운 경계가 일단 우리 눈앞에 전개되기만 하면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 해도 근심 걱정이 없는 순수 인식 상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범부는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로 되돌아오는 순간 마법은 끝나 버리고, 우리는 다시 범부가 되어 모든 고난을 짊어지게 됩니다. 수행 중이라 하더라도 마치 기초 저음처럼 “나는 결코 깨달을 수 없어!”라는 절망적인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계속 울려옵니다. 이 언저리가 공부의 즐거움이자 무서움입니다. 그래서 이 언저리를 읊은 다음의 선시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산호 베갯머리에 흐르는 눈물,
절반은 그대 생각 절반은 그대 원망(주5)
나는 이 공안을 『가려 뽑은 송나라 선종 3부록』 ② (장경각, 2019)에서 처음 읽었습니다. 한 편의 연시戀詩로 읽어도 빼어나지만 수행시修行詩로 읽어도 기가 막힐 정도로 절묘한 표현입니다. 좋은 시는 이처럼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와 문학은 원래 서로 떼어낼 수 없는 연리지連理枝입니다. 어떤 종교든 널리 보급되고, 독자적 풍격을 형성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그 종교가 가진 문학적 가치에 의지합니다.
모과나무와 보낸 한나절은 축제와 같았습니다. 떠나기 싫었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소요헌逍遙軒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소요헌은 긴 상자와 같은 두 개의 구조물을 Y자로 연결한 콘크리트 공간입니다. 건물 전체가 단순화, 상징화, 추상화된 형태를 보여줍니다.
소요헌 안에 작은 중정中庭이 있습니다. 정향나무, 미선나무, 미스킴라일락 등 향기가 좋은 식물이 심어진 공간입니다. 우리는 이 공간을 천천히 걸어봅니다. 작디작은 정원이지만 무한을 느끼게 해 주는 공간입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자그만 정원의 생명력을 극대화시켜 줍니다. 육체의 인간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를 이 공간에서 느꼈습니다. 마치 눈앞에서 여러 해가 한꺼번에 흘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내려오는 길, 대화가 끊어진 빈자리는 풍경이 채워줍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건물 하나하나, 모두 심원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신선 같은 모과나무가 벌써 그리워집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왔다 가는 기분으로 산 아래를 멍하니 내려다봅니다. 어디선가 작은 새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옵니다.
아아, 여기, 오길 잘했습니다.
<각주>
(주1)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2) 無門慧開, 『無門關』, 第37 庭前栢樹 :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州云 庭前柏樹子.”
(주3) 上揭書, 第37 庭前栢樹 : “無門曰 若向趙州答處 見得親切 前無釋迦 後無彌勒 頌曰 言無展事 語不投機 承言者喪 滯句者迷.”
(주4)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주5) 釋惟一, 『宋詩紀事』 卷九二 : “珊瑚枕上兩行泪 半是思君半恨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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