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동병상련의 당부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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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3 년 2 월 [통권 제118호] / / 작성일23-02-03 15:12 / 조회3,214회 / 댓글0건본문
며칠 전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역사 안으로 내려가는데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계단 쪽에 사람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몰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또 무슨 사고가 났나?’ 싶어 더럭 걱정이 앞섰습니다. 때마침 “전장연 시위로 지하철이 지연되고 역사가 혼잡하니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 달라.”는 안내방송을 흘러나와 안도가 되었습니다. 몰려 있던 사람들이 서두르거나 다투지 않고 조심조심 양보하며 길을 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난해 겪은 사고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새삼 크게 다가왔습니다.
30년 전 큰스님 다비식의 기억
모두가 안전하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파에 섞여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30여 년 전 큰스님 열반과 다비식 그리고 49재 동안 진행했던 사리친견법회 때가 떠올랐습니다. 큰스님 열반 소식이 일간신문 사회면에 실려 세간에 알려지자 생각지도 못한 숫자의 조문객이 연일 해인사를 찾았습니다. 다비식 때는 연화대 주변이 사람으로 병풍을 두른 듯했고, 사리친견법회 때는 새벽부터 몰려드는 인파에 새끼로 줄을 만들어서라도 신도들의 안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절 그때를 그렇게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통도사 극락암 명정明正 스님의 당부 한마디에 힘입은 바가 매우 크지 않은가 싶습니다.
1982년 7월 17일,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고 계셨던 경봉스님께서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는 한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드시니 세수 91세, 법납 75세였습니다. 소납은 성철 은사스님의 시자로서 큰스님께서 손수 쓰신 추도사를 들고 다비식에 참석했습니다. 극락암에서 운구가 시작되어 통도사 다비장까지 이르는 연도에는 문상객들이 밀물처럼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좌우에 늘어선 고목나무에는 스님의 떠남을 조금이라도 멀리까지 전송하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아 두려는 남자들이 가지를 부여잡고 올라가 엉겨 있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지금껏 여러 차례 큰스님 문상을 다녔지만 그렇게 많은 조문객이 모인 것은 그때까지 어느 다비식에서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습니다.
그로부터 5~6년의 세월이 지나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경봉 큰스님의 맏상좌인 명정스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명정스님께서 먼저 한 말씀 하셨습니다.
“나나 원택스님이나 큰스님을 모시는 시자로서 그 동병상련의 마음을 내 잘 알고 있지. 큰스님 모시다가 나중에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다녀만 오지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시지 않도록 할 것을 내 경험상 당부드리네. 큰스님 계실 때는 그렇게 극락암이 미어터지도록 보살과 처사들이 오더니만 몇 년 못 가서 인적이 점점 끊어지더군. 참 참담한 경험을 했지. 내 말을 잘 새겨듣고 큰스님 떠나신 뒤 백련암 살아갈 준비를 해 두시길 바라네. 우리가 또 언제 만나겠어. 원택스님을 만나면 이 말은 꼭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님은 백련암 찾아오는 신도들이 3,000배를 해야 겨우 만나 주시지 그전에는 어느 누구도 만나 주지 않으시니 백련암에 오는 신도들은 열에 아홉은 문 앞에서 섭섭하게 그냥 돌아가십니다. 경봉 큰스님께서는 삼소굴三笑窟에 계시면서 지나가는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을 손수 불러들여 법문도 해주시고 붓글씨도 써주시고 낙관까지 크게 찍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백련암은 거두어드리는 신도보다 내친 신도가 9:1로 훨씬 많으니 백련암은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그날로 문전에 먼지만 쌓이지 않겠습니까? 저도 걱정은 태산 같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스님을 오늘 이렇게 뵈오니 경봉 큰스님 다비식 날 길목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던 통도사의 그 날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우리 상좌 스님들은 물론이고 통도사 산중의 대중스님들도 다 놀랐다 말입니다. 근방 주민들까지 통도사 창사 이래 최대의 인파라고 놀라워했지요. 그때가 여름철이었는데 오래도록 가뭄이 들어 논에 벼가 다 말라가고 있었거든. 그런데 거화擧火 후 오후 내내 소나기가 흠뻑 내려 군민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네. 원택스님도 다비식장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구먼. 큰스님들의 덕화德化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듯하오. 우리 큰스님께서도 덕화가 크실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문상 올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소? 성철 큰스님께도 우리가 모르는 깊은 덕화가 계실 것이오. 그러니 해인사 다비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원택스님 생각대로 하지 마시고 산중의 어른스님들과 의논하여 만에 하나 우리가 모르는 성철 큰스님의 덕화로 경봉스님처럼 인산인해로 문상객이 밀려올 때를 대비하여 반드시 ‘출구’를 하나 만들어 놓는 것이 큰스님을 모시는 상좌의 역할이 아니겠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 귀한 말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산인해를 대비한 출구
조계사 행사장에서 우연히 명정스님과 만나 대화를 나눈 5~6년 후에 성철 종정 예하께서 1993년 11월 4일에 열반에 드시고 7일장으로 다비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다비장(연화대)은 해인사 산문 밖 3㎞ 지점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큰길가에서 다비장까지의 거리는 폭 4~5m에 400m의 외길 언덕으로 이어집니다. 개울 건너 반대편에서 출발점을 0m로 하면 종점은 8~9m로 보이는 절벽길이 됩니다. 다비장까지는 오직 이 길로만 오르내려야 하는데 인산인해의 많은 군중이 모인다면 오고 가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외통길이 되고 맙니다.
상주인 상좌들부터 과연 문상객이 얼마나 올지 가늠하지 못하니 다른 어른 스님들도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한 3일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50m 높이의 다비장에서 서쪽으로 개울을 따라 산언덕이 낮아지는데 그 개울물에 강 바윗돌을 모아서 넓은 징검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남쪽에서 올라와 다비장에 예를 표하고 서쪽으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너서 500m쯤 내려오면 원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준비를 했습니다. 명정스님께서 당부하신 ‘우리가 모르는 큰스님의 덕화로 인산인해의 문상객이 밀려올 때를 대비한 출구’를 겨우 만들어 놓았던 것습니다.
거화를 하고 한참을 울먹이며 연화대의 불길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무 탈 없이 돌아가야 할 텐데…’라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거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다비장 바깥 사정이 궁금해졌습니다. 주변을 살피는 길에 경찰 관계자를 만났더니, “일대가 온통 난리입니다. 3㎞의 산길을 메운 인파만 10만여 명, 해인사 인터체인지에서 해인사까지 차들이 꽉 찼고, 고령 인터체인지에서 해인사 인터체인지까지 신도들의 차가 밀려서 옴짝달싹도 못 한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봉 큰스님 때와는 또 다른 인파가 해인사 다비장 쪽으로 파도가 넘실거리듯 밀려들었습니다. 성철 큰스님은 평생을 “산승은 산에 머물러야 한다.”며 세상으론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셨는데, 그런 큰스님께서 극락세계로 가시는 길에 해인사 창건 이래 최대의 인파가 몰려 추모를 하다니 정말 알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다리쉼을 하고 계시는 노보살님들이 “원택스님!” 하고 불러서 갔더니, “원택스님요, 오늘 우리가 6·25 전쟁 때 피난 가던 시절보다 더 걸었구만요. 이렇게 힘들 바에야 큰스님 살아계실 때 백련암 가서 3,000배하고 친견할 것을…” 하시면서 애통해하셨습니다.
해인사 율주스님으로 오래 계신 종진 큰스님께서 원소스님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내가 출가한 후 불교 신도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애도를 표하고, 해인사 들어오는 수십 리 길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다비장을 찾아와서 애도를 표하는 모습은 장엄함 그 자체였다. 비구니 스님들이 정성을 다하여 연잎과 연꽃으로 꾸민 큰 석종형 연꽃 봉우리 연화대는 조계종 큰스님 다비장을 처음으로 장엄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큰스님의 거룩한 다비식에 정말 어울리는 장엄이었다. 내가 평생 보아온 어느 다비장에서도 보지 못한 구름같이 모인 조문객들의 안타까운 모습과 연화대의 장중한 모습, 모든 스님들의 장엄한 염불소리에 맞춰 성철 종정 예하가 서방정토로 떠나시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성스럽고 장엄하고 근엄하였다고 생각한다.”
다비식을 다 마친 후에 경찰 현장 책임자로부터 “한 사람도 다친 사람 없이, 이슬비 내리는 길에 넘어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이, 다비 행사를 잘 마쳤습니다.”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나라
이태원 참사를 TV를 통해 목격하면서 30년 전 큰스님의 다비식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올해는 성철 종정 예하가 열반에 드신 지 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마침 음력 2월에 윤달이 들다 보니 30년 전 큰스님께서 홀연히 입적하신 바로 전날인 11월 3일이 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소납에겐 큰스님 다비식 날의 풍경은 어제 일처럼 여전히 생생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때 만약 명정스님의 ‘동병상련의 우정어린 한마디’를 미처 듣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해인사 다비장으로 올라가는 400m 낭떠러지 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왕좌왕 엉켜서 오도가도 못하고 난리가 났을까? 만약 누구 하나라도 넘어지거나 발을 헛디뎠더라면 아마도 불교사에 치욕으로 남을 사고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큰스님을 모시는 동병상련의 시자로서 ‘모두의 안전’을 생각하도록 힌트를 주신 명정스님께 늦게나마 감사를 드리며, 우리 모두 평안하고 안전하게 서로 온기를 느끼며 모든 이웃과 자비를 나누며 사는 나라가 하루 빨리 오기를 부처님 전에 기원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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