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심우소요]
봉은사의 폐사를 막은 백곡처능의 「간폐석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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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2 월 [통권 제118호] / / 작성일23-02-03 11:27 / 조회2,840회 / 댓글0건본문
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28 |봉은사 ④
오늘날에는 봉은사가 도심 사찰로 번성하고 있지만, 역사에서 보면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문정왕후가 죽고 보우대사를 때려죽이고 난 후 유생들은 끝없이 불교를 공격하였다. 병자호란과 인조반정을 겪고 효종이 즉위하자 바로 송준길宋浚吉(1606~1672)선생이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 약 30년간 나라를 주무른 서인의 훈구세력 김자점金自點(1588~1651)의 축출을 들고 나왔다. 결과적으로 김자점 세력이 제거되고,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고 청나라에 망한 명나라에 대해 의리를 지키자는 기치를 들고 나온 효종의 북벌론에 송시열宋時烈(1607~1689), 송준길 이른바 ‘양송兩宋’을 우두머리로 하는 노론세력이 합세하면서 국가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가혹했던 조선의 억불정책
1657년 송준길 선생은 먼저 봉은사에서 불상은 남면南面하면서 선왕의 위패는 북면北面하고 있는 점을 문제삼았다. 원래 남면하는 임금을 부처 밑에 두는 것이므로 당장 조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효종은 바로 봉은사에 있는 선왕의 위패를 철거시켰다. 선왕의 위패가 없어졌으니 봉은사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문인 묵객들이 다투어 시로 읊었던 거창했던 원래의 봉은사 당우들은 이미 1636년 병자호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사라졌고 방만 몇 칸 남아 그 이후 경림敬林 화상이 몇몇 건물들을 새로 지어 놓은 형편이었다.
드디어 효종이 죽고 현종顯宗(재위 1659~1674)이 즉위하자 다음해 조정에서는 전국에 있는 원당願堂의 철폐를 공론화시켜 결국 원당을 철폐하고 불교와 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승려들은 환속시켰다. 이해에 천하의 벽암각성 대사가 생의 인연을 다하고 영겁회귀의 세계로 떠났다(사진 1). 그리하여 속세에서 벌어지는 그 다음 장면은 보지 못했으니 차라리 편했으리라. 그리고 다음 단계로 1661년(현종 2)에 도성 내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완전히 해체했다. 40세 이하 비구니는 환속시켜 시집가게 하고, 40세 이상 비구니는 도성 밖의 절로 쫓아내 버렸다.
원래 인수원은 태종의 후궁들과 궁녀들을 머물게 하면서 시작되었고, 자수원은 세종의 후궁들과 궁녀들을 살게 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왕을 잃은 후궁과 궁녀만큼 불쌍한 존재도 없으리라. 돌아갈 때 없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는 처지로 이러한 곳에 모여 종년終年까지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 기도하며 마음을 달래는가 하면 이 생의 인연을 접고 삭발 비구니로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물러난 후궁들과 궁녀들이 날로 넘쳐나면서 자수원과 인수원은 도성 내의 큰 비구니 사찰이 되었다. 불교를 없애려면 왕실과 연관이 남아 있는 이것부터 없애 버려야 했다. 자수원을 해체한 목재를 봉은사에 보낼 것인가가 논의되었을 때 송준길 선생은 이것도 못 하게 강력히 저지하였고, 결국 3년 후에 성균관의 부속 건물을 짓는 데 썼다.
공격하는 입장에서 보면, 일찌감치 함포 사격으로 주요 거점은 없애 버렸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선종의 수사찰과 교종의 수사찰을 찍어 없애 버리고 승려들도 환속시켜 버리면 불교는 완전히 뿌리를 뽑을 수 있게 된다. 새 임금이 출범하자 그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속에 이골이 난 인간들이 서슬 시퍼런 칼을 들고 나선 상황이다.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가는 보우화상이 당했듯이 당장 그 자리에서 ‘두들겨 맞아 죽을’ 상황이었다.
불법佛法을 위하여 죽을 것이냐 땅바닥에 기면서 생명을 부지할 것이냐? 차라리 전쟁에 나가 싸우다 죽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무상보시無相布施로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상황은 인간들의 권력놀음으로 초래된 강요된 물음이기에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것이리라.
백곡처능 선사가 목숨을 걸고 쓴 「간폐석교소」
그렇지만 모두가 겁에 질려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나 옳고 그름을 말해야 하는 것이 ‘정언正言’이 아니겠는가. 이때 죽기로 결심하고 떨쳐 일어나 임금을 상대로 옳고 그름을 말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백곡처능白谷處能(1617~1680) 대선사였다! 처절한 현실 앞에서 이미 삶과 죽음의 강은 지났다(사진 2).
1661년(현종 2) 대둔산大芚山 안심사安心寺에 주석하고 있던 선사는 붓을 들고 8,150자의 장문의 글을 써내려갔으니, 이것이 바로 역사에 남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이다(사진 3). 불교의 철폐에 대하여 간하는 상소라는 뜻이다. 생사의 강을 지났으니 비장할 것도 없다. 평온한 마음에 맑은 총명으로 이치만 분명히 남기면 된다.
연전에 총무원장 원행圓行 대종사의 말씀으로 이 글을 처음 알게 되어 읽은 적이 있다. 문사철文史哲에 정통하고 유불도 삼교를 회통한 박학다식한 글이었다. 법학자인 나에게는 그 빈틈없는 논리가 더욱 감동적이었다. 박학다식한 변려문騈儷文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의 글을 따를 사람이 없지만, 치밀한 논리로 지식을 구사하는 점에서는 이 글에서 더 강한 힘을 느꼈다.
백곡선사가 누구이던가? 총명이 넘치는 젊은 나이에 불법을 공부하고 다시 유학자이자 학예일치로 명성이 높은 낙전당樂全堂 동회東淮 신익성申翊聖(1588~1644)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유학을 공부하고, 다시 천하의 벽암각성 대사의 문하에서 수행을 한 분이다. 백곡선사 문장의 뛰어남은 당시 유학자들도 다들 인정하였는데, 어설프게 유학 운운하며 백곡화상에게 대들어 끝장논쟁을 벌일 만한 유학자가 과연 있었을까. 그래서 백곡선사를 ‘때려죽이자’고 한 말은 나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신익성 선생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할 수 없다고 하여 그의 동생 동강東江 신익전申翊
全(1605~1660) 선생과 함께 ‘척화오신斥和五臣’으로 찍혀 심양瀋陽으로 끌려갔으나 그에도 굴하지 않았다(사진 4, 5).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모습이다. 그의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선생이다. 백곡선사는 스승인 낙전당 선생의 이런 지행합일의 모습도 보았으리라. 백곡선사는 스승의 높은 학덕과 고매한 인품을 읊기도 하고 심양에 끌려가고 없는 스승의 텅 빈 집을 지나면서 슬퍼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현종은 이 정직하고 치밀한 상소를 읽어보았다. 그날 이후 봉은사와 봉선사를 없애는 조치는 사라졌다. 그래서 봉은사와 봉선사가 살아남았고, 더 나아가 이 땅에 불교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으리라. 역사의 이 장면을 살아낸 그들의 삶은 이렇게 치열했다. 그런데 1665년(현종 6) 화재로 봉은사의 전각들은 또 불타버렸다. 이듬해 백곡선사에게는 남한산성의 승려를 총괄하는 승통僧統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92년(숙종 18)에 와서 왕실의 시주로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불, 약사여래불 등의 삼존불상을 겨우 봉안하고, 1702년(숙종 28) 왕이 절에 전백錢帛을 하사하여 봉은사의 중건을 할 수 있었다.
백곡처능 선사의 비표碑表를 쓴 기연
세상은 우리를 쉬게 놓아두지 않는다. 1600년에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아시아 경영에 나섰고, 1609년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천체망원경을 만들어 우주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1636년에는 근대 철학과 과학문명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천재 데카르트(René Descates, 1596~1650)가 『방법서설方法序說(Discourse on the Method)』을 출간하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제1원리’로 인류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눈을 떠라! 허황된 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났다. 봉은사 주지인 원명元明 대화상으로부터 백곡처능선사비를 봉은사에 세우는데, 비의 전면 글씨를 써달라는 전갈傳喝이 왔다.
다시 『백곡집白谷集(=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을 읽어 보고 고민하였다. 백곡화상은 불교의 대선사이기도 하지만 대학자이기도 하다. 박학다식, 명징함, 삼교회통, 논리적 완벽성, 곁을 내주지 않는 엄정함, 지식을 초월한 초월지, 앎과 행의 일치. 이러한 점들로 선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글씨는 그러한 점들이 스며 있도록 써 보았다. 이렇게 하여 천학비재淺學菲才한 후학의 둔필鈍筆로 ‘호법성사대각등계護法聖師大覺登階 백곡처능대선사비명白谷處能大禪師碑銘’이라고 비표碑表를 썼다(사진 6). 이 비는 봉은사의 비들이 있는 곳에 보우대화상의 탑비 옆에 서 있다.
백곡 대선사의 부도는 그가 입적한 김제의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와 오래 주석했던 안심사, 공주의 계룡산鷄龍山 신정사神定寺(오늘날 신원사新元寺) 세 곳에 나누어 세워져 있다. 그의 비문으로는 신익전 선생의 아들인 분애汾厓 신정申晸(1628~1687) 선생이 지은 ‘백곡처능사비명병서白谷處能師碑銘幷序’와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崔鳴吉(1586~1647) 선생의 손자이자 당대 거유巨儒인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1646~1715) 선생이 지은 ‘백곡선사탑명白谷禪師塔銘’이 있었으나 비로 세워지지는 못하였다(사진 7).
봉은사에 얽혀 있는 여러 역사의 장면을 생각하면서 지금이라고 인간들이 다를까 하는 자문을 해 보았다. 봉은사를 세우고 내세의 복을 빌었던 선릉과 정릉의 무덤도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모두 파헤쳐져 현재 내부에는 왕과 왕비의 시신은 없이 비어 있는 형편이다. 문정왕후도 이장까지 한 남편의 능인 정릉 묘역에 묻히지 못하고 태릉泰陵에 묻혔다. 왕이 되어서도 친모에게 휘둘리며 살았던 명종은 강릉岡陵에 묻혀 친모 곁에 누워 있다. 사찰을 세우고 많은 공양供養을 올리며 내세의 복을 빌어도 소원성취所願成就와 극락왕생極樂往生은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붓다가 무엇을 말했는지를 바로 보라! 직지直指! 아수라阿修羅의 인간세상에 대한 백곡선사의 생각이 엿보이는 시가 있다.
병객춘무사病客春無事 병든 객이 봄날에 할 일 없어
공산주엄비空山晝掩扉 오는 이 없는 빈 산에 사립문을 닫는다.
세풍화편편細風花片片 살랑이는 바람에 꽃 이파리 낱낱으로 떨어지고
미우연비비微雨鷰飛飛 가는 비 오는데 제비들이 하늘을 난다.
물외소영욕物外少榮辱 속세 떠난 이곳에는 영욕이 적다마는
인간다시비人間多是非 인간세상에는 시비가 많구나.
백두감적막白頭甘寂寞 흰머리 늙은 몸이 적막함은 달게 받거니와
임하한지귀林下恨遲歸 속세 떠난 이곳에 늦게 돌아옴이 한스러울 뿐이다.
사실 백곡선사는 이미 세계지도인 ‘만국도萬國圖’를 보고 『시경』이나 『서경』 그리고 그 많은 역사서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은 사실들에 놀라고, 공자가 돌아다닌 천하라는 것도 지도상의 세계에 비하면 하나의 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정도로 당시 사람들의 논의가 얼마나 한심한 수준인가를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한심한 인간들아!’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해야 할 말만 명징明澄한 목소리로 남겼다.
온갖 상념에 쌓여 터벅터벅 일주문을 나서는데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아 뒤돌아서서 미륵대불을 향해 정례頂禮하고 원願을 빌었다.
“미륵부처님, 부처님께서 오시기를 수억 년간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오래 걸립니다. 지금 바로 이 세상에 나투어 이 중생들을 구해 주소서~.”
응답이 왔다.
“이 사람아, 자네는 헌법학자가 아닌가. 그러면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 여기’에서 답을 내놓아야지 자네까지 나에게 매달리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일모도원日暮途遠일세, 이 딱한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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