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탄잔의 불교관과 인도철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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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3 년 1 월 [통권 제117호] / / 작성일23-01-05 09:07 / 조회2,667회 / 댓글0건본문
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24 |하라 탄잔原坦山(1819~1892) ②
지난 호에서 하라 탄잔이 불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도쿄제국대학에서 불교학을 강의하게 되는 과정을 소개했다. 이번 호에서는 하라 탄잔의 최대 성과 중 하나인 근대 일본의 인도철학이라는 학문의 탄생과 관련한 일련의 과정들을 소개하겠다.
인도철학의 성립
일본에 인도철학이 학문으로서 성립한 연유를 알기 위해서는 도쿄대학 내의 인도철학 강좌가 정착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쿄대학은 1877년 메이지 정부의 교육령에 따라 설립된 최초의 관립대학으로 설립 당시 법과, 이과, 문과, 의과 총 4개 학부가 개설되었다. 이중 탄잔이 강의한 불서강의는 문학부 제2과 화한문학과和漢文學科에 포함되어 있었다.
문학부는 1885년 학과가 안정화되기까지 거의 격년으로 조직개편이 일어났고, 불교 관련 강좌는 1879년 제2과의 불서강의를 시작으로 1881년 제3과의 철학교 과목 안에 인도 및 지나철학 강의가 신설되었다. 1882년에 이르러 기존의 철학이 서양철학으로 개칭되고 인도철학, 중국철학, 동양철학의 교과목이 개설되었다. 1901년에는 범어학 강좌가 개설되는 등 인도철학이 하나의 학과로서 독립할 수 있는 발판을 서서히 마련해 나갔다.
도쿄대학 내에 불교학 강의가 개설된 데에는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이 하라 탄잔을 발탁한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1836~916)의 공이 크다. 당시 도쿄대학 총장이었던 가토 히로유키는 『경력담』에서 “화한和漢의 역사, 문학, 제도 등을 가르칠 수 있는 교원이 부족하게 되었다.”라며 불서강의를 개설한 이유를 밝혔다. 다시 말해 히로유키의 판단에는 불교의 대중화나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함보다는 서구 학문이 유입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응하는 일본의 전통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바탕이 된 것이다.
인도철학은 중국, 동양철학과 함께 1900년까지 지속된다. 이때 강의를 담당했던 이들이 탄잔을 비롯해 요시타니 가쿠주, 무라카미 센쇼, 마에다 에운, 다카쿠스 준지로, 도키와 다이죠, 호리 겐도쿠, 기무라 타이켄 등이었다. 이들은 향후 일본의 제국주의 입장에서 국가불교의 역할을 전개했는데, 탄잔이 발탁했거나 탄잔의 강의를 들은 이들이었다. 즉, 일본불교가 국가불교로서의 역할론을 주창한 배경에는 하라 탄잔이라는 시발점이 존재한다.
1906년 인도철학은 강좌명이 변경돼 인도철학종교사로 개설되었다. 이 교과목의 개설로 인해 일본에서 인도철학이라는 학문이 출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문적 출발과 달리, 학과의 독립은 1917년에 이루어진다. 실업가 야스다 젠지로安田善次郞와 임제종 승려 샤쿠 소엔釋宗演의 기부에 의해 인도철학 강좌가 1917년, 1921년에 개설되고, 1926년에는 국비에 의한 인도철학이 재개설되었다.
이후 1932년 인도철학과 범문학를 합병해 인도철학범문학과라는 독립적 학과가 설립된다. 인도철학범문학과의 탄생에는 하라 탄잔의 ‘불서강의’가 시발점이다. 탄잔이 이 강좌명을 ‘인도철학’으로 바꾸면서 학과 탄생에 기반을 다졌다.
탄잔의 인도철학
탄잔에게 있어 인도철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역종교학, 즉 인도 불교학이나 인도 종교학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불서강의’가 ‘인도철학’으로 강좌명이 바뀐 후 탄잔이 선택한 교재는 『대승기신론』과 『원각경』이었다. 더해서 도쿄대학철학회에서 「인도철학의 제학과 그 차이印度哲學の諸學と徑庭ある說」(1884)를 발표했을 때, “인도철학(즉 불교)의 대략은 교·이·행·과의 4종으로 나뉜다.”라며 인도철학이 포괄적 의미의 불교를 지칭한다고 했다. 인도철학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인도철학의 요령印度哲學の要領」에서 좀 더 철학적 관점으로 발전한다.
“인도는 상고上古로 문화의 면에서 가장 상고에 속한다. 지금 불교의 성질을 살펴보면 석가씨는 자성의 실리를 발명하여 불교를 만들어 심성의 실험을 보리·열반·진여·불성이라고 이름하고 각종으로 교화하였다. 그런데 석가의 출세는 상고 아직 미개한 시대로 사람들 모두 기괴한 것을 받아들였지만, 후세 학과 분립에 이르러서는 대체로 종교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불교는 다른 종교와 같이 유명황망幽冥荒茫한 믿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올콧 씨가 ‘종교라는 것을 불교에 쓰는 것은 타당치 않고 불교는 오히려 도의 철학으로 칭해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심성철학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며, 본교에서 인도철학이라고 개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인도철학의 요령」(1887) 중에서
탄잔이 불서강좌를 인도철학으로 개칭한 연유와 함께 불교를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관점에서 심성철학心性哲學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1880년대 말에 ‘일본이 근대국가로 나아감에 있어 종교를 어떻게 채용할 것인가’라는 논의가 무르익었다. 이 물음에 대해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1858~1919)는 불교가 기독교를 이기기 위한 도구로써 종교라는 용어를 채용할 것을 주장했다. 즉, 종교가 영어의 religion이란 용어로 정착하는 데는 이노우에의 공이 컸다.
반면, 탄잔은 이 논의에 대해 전혀 참전하지 않다가 이후 이노우에와 결이 다른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불교의 비종교성을 주장하기 위해 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탄잔의 주장을 간략히 요약하면, 기독교가 모델이 된 서양의 종교개념이 서양이 아닌 곳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심각한 한계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헨리 스틸 올콧Henry Steel Olcott(1832~1907)이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나눴던 『불교문답』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닌 ‘도의철학(moral philosophy)’이 적당하다고 언급했다. 당시 탄잔이 올콧의 과학적 종교로서 불교를 이해한 점에 크게 흥미를 느꼈지만, 전면적으로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학문으로서의 인도철학과 불교의 관계에 대한 탄잔의 시각은 어떠할까. 이에 대해서는 「학교의 이동, 불교 제교의 이동學敎の異同佛敎諸敎の異同」(188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학문의 실험, 사색, 비교는 사물의 진리를 규명하는 것이고, 학문의 목적은 지智에 있고 교법의 목적은 신信에 있다고 했다.
다만 그는 서양의 종교와 불교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지 않았다. 서양의 종교는 천주상제天主上帝를 귀의처로 하는데 인간의 견문각지가 미치지 않는다면 신에게 머무는 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불교는 서양의 종교처럼 신에게 머무른다고 보기 어렵다고 둘 사이의 구분을 지었다. 그 이유에 대해 “불씨佛氏의 경론에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차서가 있어 신을 초급이라고 하고, 증을 마지막이라 한다. 불교의 본질은 신해행증의 증의 경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는 서양종교의 믿음의 경계와 다르다.”라고 언급했다.
불교가 인간 마음의 지력智力을 중시하는 종교라는 탄잔의 강의는 향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서양의 기독교와 대비되는 불교의 보편적 특질로 일반화된다. 다카기시 준지로에게 사사받은 우이 하쿠쥬宇井伯寿(1882~1963)는 탄잔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도쿄대학의 불교와 인도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불교철학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당시는 기독교와의 관계상 곤란해졌다. 그래서 불교는 인도의 철학인 까닭에 마침내 인도철학이라는 이름이 발명된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인도철학이라는 이름은 실로 불교철학을 의미하며 후에 이것이 강좌의 이름으로 되었다.”
- 『인도철학에서 불교로』(1976) 중에서
탄잔에게 있어 인도철학은 인간 내면의 심성에 대한 철학적 이해라는 보편적 개념의 불교였다. 동시에 종교라는 용어가 주는 ‘서양적’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채택했다. 그가 처음부터 학문적 개념으로 인도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인도철학이라는 학문의 성립과 학과가 개설되는 데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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