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중국 근대불교의 시대정신을 천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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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3 년 1 월 [통권 제117호] / / 작성일23-01-05 09:15 / 조회2,752회 / 댓글0건본문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25 태허太虛
중국 국민정부는 1946년 선종 사찰 설두사의 주지인 태허太虛(1889~1947)에게 항일전쟁 승리 훈장을 수여하였다. 다음해 3월, 태허가 세상을 떠나자 정부는 태허의 업적을 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붓다의 구세 정신, 전쟁 제지와 평화 추구
“태허는 항전 시절 승려들을 독려해 구호대를 조직하였다. 승려들이 가사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기까지 그의 공이 매우 컸다. 그는 1928년 이래 수십 년간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호국의 공이 가상하다.”
1928년은 산동에 진입한 북벌군이 교전을 일으키다 철수하였을 때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일본군이 들어와 6천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세계불학원 설립을 마치고 귀국한 태허는 경악하였고, 일본불교연합회에 전문을 보냈다. “고도古都가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변했다. 철병을 간곡히 요구한다. 일본 당국에 압력을 행사해 주기 바란다.” 물론 일본에서는 이에 대한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3년 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였을 때도 태허는 ‘대만과 조선, 일본의 4천만 불교도들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일본과 조선, 대만의 불교도들은 붓다의 구세정신을 계승할 의무가 있다. 모두 일어나 군벌을 폐출하고 전쟁을 제지하여 세계평화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주사변 2년 후,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태허는 승려로서 산속에서 염불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 참여를 적극 권하였다. “동북아에서 벌어진 사건이 중국과 일본 양국의 안전을 위협한다. 전쟁은 승리자가 없고, 모두 패배자로 전락한다. 일본 당국은 중국의 동북 지방을 원래 모습대로 회복시키기 바란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이 산해관山海關을 침범하자 태허는 불교와 호국을 연관시키며 전국의 청년 불자들에게 ‘불교청년호국단’ 조직을 권하였다. 종군과 모금, 선전 활동을 독려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자, 태허는 당시 사람들에게 ‘정치 승려’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해 저명한 문학자인 노신魯迅은 태허를 높이 평가하며 “그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의 사상의 폭과 깊이는 끝을 헤아리기 힘들다.”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태허를 함께 만났던 노신의 수제자는 “많은 사람들이 태허를 정치 승려라고 깎아내리지만 가당치 않은 말이다. 태허 법사는 ‘근대 화상’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온갖 명성을 누리면서도 큰스님의 위엄은 한 조각도 찾기 힘들다. 봄바람처럼 모두를 푸근하게 해 준다. 그의 말이라면 뭘 해도 도리에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승려의 전쟁 참여를 둘러싼 논의
항일전쟁이 본격화되고 국공연합이 결성되자 중국정부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징집령을 내렸다. 승려들도 장정이니 장정대에 편입해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방침에 대해 승려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정부 방침에 찬성하는 이들은 “우리도 국민의 한 부분이다. 국민 병역의 의무가 있다.”라고 하였고, 반대하는 이들은 “우리는 이미 출가해서 붓다의 자비를 봉행하는 사람들이다. 전선에서 적을 살상하는 것은 불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태허는 훈련총감부에 서신을 보내 불교계의 입장을 전하였다. “승려들끼리 훈련을 받겠다. 복장은 우리에게 맡겨라. 간편하되 원형은 유지하고 싶다. 두 가지 사항만 허락하면 일반인과 똑같이 훈련에 참여하겠다. 단 훈련을 마친 후 전투부대에는 배속시키지 말아 달라.”고 청하였다. 정부에서는 태허의 요청을 수용하였다.
그 뒤 태허는 전국 사찰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출가한 몸이지만, 국가를 뒤로 하지는 않았다. 신해혁명 이후 계속된 우리의 근대화는 일본의 파괴에 직면했다. 비분을 가눌 길 없다. 비바람이 외로운 등불을 핍박한다. 목탁 두드리며 희생된 항일 전사를 추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마귀와 마주하면 용기가 솟는 법이니, 정부의 통일된 지휘하에 난민 구호와 전쟁 지식을 습득하기 바란다. 몸을 던져 국가와 인민을 구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길이다. 의학 상식과 군 기본동작을 익히고, 삼민주의와 정치사상 같은 학과도 소홀히 하지 마라. 밥값은 각자 부담하고 부족한 부분은 사찰에서 지원하라.” 태허의 이러한 말에 전국의 사찰에는 승려훈련반이 발족하였다. 근대불교가 마주한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불교 혁신운동의 전개
중국 근대불교의 ‘시대 정신’이라고까지 불렸던 태허는 1889년 절강성 숭덕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다음해 아버지가 병사하였고 젊은 어머니는 4살까지 그를 키우다가 개가해서 태허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도교에 독실한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1904년 영파 천동
사天童寺에서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 은사 스님은 그가 허약하여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태허太虛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한다. 그는 사찰에서 전통 불교를 공부하는 것 외에도 당시 젊은이들이 많이 보았던 톨스토이, 바쿠닌, 푸루동 등의 사회성 짙은 글들을 탐독하였다. 또한 당시 서세동점의 시대적 고민을 짊어지고 있던 청년 지식인들을 격동시켰던 글들을 빠짐없이 읽었다.
태허의 말에 따르면 “민국이 성립되기 4년 전(1908년)부터 민국 3년(1914년)까지 강유위의 『대동서』, 담사동譚嗣同의 『인학仁學』, 손문의 『삼민주의』, 엄복의 『천연론』, 장태염의 『오무론』, 『민보』, 양계초의 『신민총보』 등의 영향을 받았다. 선종, 반야경, 천태를 통한 불교 이해로써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면학의 분위기 속에서 태허의 불교 혁신의 사고가 싹텄다고 할 수 있다.
1909년 태허는 양인산楊仁山 거사가 설립한 금릉각경처 내 교육기관인 ‘기원정사’에 입학하였다. 당시 열 명 남짓한 학생 가운데 절반 정도가 스님이었는데, 이후 중국 근대 불교계의 양대 산맥이라 할 구양경무와 태허가 양인산의 제자로서 그곳에서 함께 수학하였던 것이다. 구양경무는 거사로서 재야의 불교 연구를 대표하였고, 태허는 승려로서 출가자를 대표하였다. 그곳에서는 양인산 거사가 직접 『능엄경』을 가르쳤고, 소만수蘇曼殊(1884~1918)가 서양 학문에 접근할 수단인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반년 만에 기원정사는 문을 닫았고, 태허는 양주에 있는 승려사범학당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태허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단체인 불교협진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신구 대립이 심해서 불교개혁의 첫 시도는 실패하였다. 당시 이런 혼란을 타개하려던 고승 경안敬安이 입적하자 태허는 “자신의 불연이 이렇게 끝나는가.”라는 생각마저 할 정도로 방황하였다.
고승 인광印光(1861~1949)의 도움으로 보타산 법우사를 폐관하고 그는 3년 동안 참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중국불교 경전인 『능엄경』, 『대승기신론』 등을 처음 본 듯 다시 읽었으며, 엄복이 번역한 서양 사회과학 책들도 탐독하였다. 실제로 태허는 자신이 엄복과 장태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자술하고 있다. 1917년 3년 만에 폐관을 풀고 나온 태허는 확실히 방향이 섰고 더이상 방황할 일이 없었다. 1918년부터 그는 불교개혁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불교계의 3대 혁명
태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상해에 ‘각사覺社’를 창립하는 것이었다. 각사 창립에는 그가 존경하던 장태염 등 재가 불교인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각사는 불교개혁운동의 근거지로서 불교 수행과 연구, 그리고 불교 잡지를 간행하는 일을 주된 업무로 삼고자 하였다. 1920년에는 각사에서 발간하던 『각사총간』을 『해조음海潮音』으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간행물로서 현재도 대만에서 출간되고 있다. 근대 한국불교 지식인들도 한두 권씩은 다 보았던 잡지로서, 『해조음』은 당시 시대 문제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논의를 전개하며 불교계몽을 전면적으로 이끌었다.
중국 학자들은 태허를 유럽 종교개혁의 선구인 마르틴 루터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태허의 불교개혁운동을 마르틴 루터의 카톨릭 비판과 신교 수립만큼이나 중요하고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1913년 경안스님의 추도회에서 기존 승단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불교계의 혁명을 주장하였다. 당시 유명한 삼대혁명이 제기되었는데, 이른바 ‘교리敎理 혁명’, ‘교제敎制 혁명’, ‘교산敎産 혁명’이 그것이다.
불교 교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 승단 제도에 대한 개혁, 불교계 재산의 합리적 관리 등에 관한 것으로, 불교계에 제기된 가장 강력한 자기반성이자 개혁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삼대혁명의 발표 이후 중국 불교계에서는 논란이 뜨거웠고 보수파에서는 태허의 주장을 마귀의 학설이라고 맹폭하였다.
* 이 글은 김영진의 『중국 근대사상과 불교』와 김명호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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