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원산의 극장집 아들로 자란 유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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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1 월 [통권 제117호] / / 작성일23-01-05 09:42 / 조회2,749회 / 댓글0건본문
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5 |인환스님 ①
호암당顥菴堂 인환印幻(1931∼2018)스님은 일본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77년 캐나다로 건너가 대각사를 창건하고 해외포교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1982년 귀국하여 동국대 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을 위해 매진하였습니다. 동국대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불교학술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11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위촉되었습니다. - 필자 주
스님의 삶과 학문에 대한 회고는 스님의 생시인 2011년 10월부터 1년간 기록되었습니다. 스님의 삶 속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아린 기억과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격동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스님의 삶을 통해 격동의 근·현대사와 현대 불교사의 전개를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원산의 갈마반도와 명사십리 해당화
▶ 인환스님, 바쁘신 중에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 고향은 어디신지요?
요즘 인터뷰에 따라 카메라 촬영이 유행하는군요. 최동순 교수가 이 기법을 익혀서 취재하면서 첫 순서로 나를 택한 모양입니다.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팔십을 지내는 동안 이런 일이 없었어요. 이런 시절 인연을 만나 일생에 대한 인터뷰를 하게 되었으니 저도 회고록을 쓰는 마음가짐으로 인터뷰에 임하도록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출생지가 원산元山입니다. 함경남도의 가장 남단에 있는 항구도시인데 지금은 삼팔선이 갈라놓은 북쪽이지요. 북에서는 ‘북강원도’라고 하였고, 해안 도시이며, 일정 때부터 개항지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그때 아마도 인구가 이십만 명쯤 됐을까요? 그때만 해도 그리 큰 도시는 흔치 않았어요. 바다에서 육지를 보는 방향에서 왼쪽으로는 ‘갈마반도’가 나와 있어요. 여기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비행장으로, 군용 비행장이 되어 일반 사람들은 접근하지 못했지요. 그 옆에는 수십 리 백사장이 있고, 방풍림 소나무가 쭉 있었어요. 그 앞에는 가슴팍쯤 높이의 해당화가 십리 길에 쭈욱 있어서 유명했습니다. ‘명사십리 해당화’가 있는 곳이 바로 거기입니다.
▶ 명사십리 해당화라는 노랫말이 나온 곳이군요?
내가 자랄 때만 해도 거기는 군사시설이었어요. 일반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아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진짜 명승지였습니다. 그 옆에 원산 시가지를 끼고, 오른쪽에는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송도원松濤園’이라는 곳인데, 그곳이 유명한 이유는 해수욕장의 수심이 얕아요. 긴 곳은 약 3백 미터까지 수심이 천천히 깊어가는 그런 곳이었어요. 그러니까 깊은 곳까지 들어가려면 물속으로 한참 걸어야 했지요. 해수욕장으로는 대단히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요.
삼월 삼짓날이 생일이 된 사연
고향 생각하면 그곳이 제일 추억에 남아요. 인터뷰를 시작하며 태어난 고장 자랑 좀 했네요. 저는 그런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인걸人傑은 주위의 환경에 많이 좌우됩니다. 나는 그런 고장에서 태어나 구김살 없이 자랐어요. 저는 1931년생, 우리 간지로는 신미생으로 흔히 말하는 양띠에요. 호적상에는 생일이 3월 3일이지만 실제 내가 태어난 날은 양력으로 9월 13일이고, 음력으로는 팔월 초이틀이에요. 그런데 왜 호적에 그렇게 올라 있느냐. 여기에는 사연이 좀 있습니다. 피난을 와서 나는 얼마 있다가 입산해서 스님이 되어 세속하고 인연 없이 살았지요.
그런데 부친하고 내 위에 형(채정수 동아대 교수), 저 이렇게 부산으로 피난 와 있었는데, 이 피난민들이 모두 호적을 정리해야 하는 일이 생겼어요. 아버지와 형님이 호적을 만들어 올리는데 산중에 있는 제 것까지 같이 올렸어요. 그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형제라도 다른 형제 생일을 확실하게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니 형이 호적에 올리는데,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생일이라는 거 사실은 숫자놀음 아니냐? 그래서 그때, 좋은 날 가려서 올렸다.”는 거예요. 형은 사월 초파일을 자기 생일로 하고, 내 생일은 삼월 삼짇날이 괜찮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잘했다고 그랬지요. 뭐, 가을 염소가 봄 염소가 된 것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일은 1931년 3월 3일생, 이렇게 됐습니다.
개항지 원산에 정착하게 된 사연
▶ 부모와 형제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형제는 여덟 명이었어요. 우리 어머니께서 여러 자식들을 낳아 기르시느라 고생 참 많으셨어요.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늙은 나이에도 눈물이 날 때가 있지요. 그 여덟 형제 가운데서 세 번째 아들이 일곱 살 쯤에 디프테리아라고 하는 병에 걸렸어요. 병원 치료를 했지만 애석하게 먼저 갔어요. 그래서 7형제가 남았지요. 할아버지는 채병준이라고 하는데, 본관은 평강 채씨입니다. 평강은 강원도 금강산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그곳이 조상 대대로 살던 고장이지요. 할아버지가 그때 시대로 꽤 머리가 열린 분이에요. 가산을 이어받으면서 괜찮게 살았는데 평강은 산중이라 앞으로 자손들을 제대로 기를려면 ‘이 산골 평강에 묻혀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는군요. 그래서 그곳을 떠나 일가를 솔가해서 당시 새롭게 항구가 열려 사람들이 모이는 개항지 원산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원산 와서 아드님 둘을 뒀어요. 아들들 교육에 열심히 힘을 쏟았어요. 그중 한 분이 채낙진이신데 제 부친입니다. 부친은 당시 입학이 쉽지 않았던 원산상업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에는 ‘구제중학교’로 5년 과정이었어요. 지금 중학교는 3년이지요. 그때 5년 중학을 졸업하면 그 다음에 전문학교가 있어요. 전문학교 나오게 되면 대학에 들어가요. 그 전문학교는 대학의 예비과하고 비슷하지요.
그런데 부친이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는 젊은 패기로 사업을 일으켜 아주 잘 되셨어요. 원산에서는 손꼽히는 이름 있는 사업가가 됐어요. 여러 가지 사업을 하셨는데 그중에 영화관, 극장을 하셨어요. 당시 인구가 한 20만 되는 도시에 극장이 둘 있었어요. 당시는 오락이란 게 별로 없을 때 거든요. 원산 시내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데, 위쪽은 관내關內라고 일본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살았어요. 그 반쪽 왼쪽은 우리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대강 그렇게 됐어요. 그 가운데에 큰 굴다리가 있어서 밑으로 기차가 다니고 다리 위를 건너서 오고 가고 했어요.
원산관 영화관 집 아들로 성장하다
▶ 그 당시 극장문화는 어떻했습니까?
일본 사람들 사는 지역에 영화관이 하나 있었는데 대승관이라고 그랬어요. 일본말은 ‘다이쇼깐’이라고 그랬지요. 우리 한국사람은 당시에 ‘조선사람’이라 그랬는데, 조선사람들 사는 동네에 영화관이 하나 있는데 ‘원산관’입니다. 그때 영화 산업이 대단히 호황일 때입니다. 뭐, 오락이 그거 밖에 별로 다른 게 없는 때이니까요. 그런데 소학교나 중학교 학생들은 출입을 엄하게 금지해서 맘대로 영화관에 못 가게 했어요. 영화관에는 꼭 뒷좌석 어두운 데 경찰관이 와서 임검이라고 하고서 학생들을 불러내곤 했지요. 또 학교 훈육주임이 가끔 나와서 학생들을 쫓아내고 그랬지요.
어려서 소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장을 크게 보려면 (아버지로부터) 돈을 좀 받아 와야 하니까 어린 나를 시켜서 “야 택수야, 아버지한테 가서 장 볼 돈 좀 달라고 그래라.” 하셨어요. 쪼르르 달려갔지요. 우리 집에서 원산관까지 걸어서 15분이나 20분 정도 됐을 거예요. 극장에 가면 다른 애들은 어림없는데, 극장문 지킴이 있잖아요? 일본말로 ‘기도’라고 그럽니다. 큰 몸에 부리부리한 것이 딱 버티고 서 있었어요. 내가 가면 극장주의 아들이니까 어서 사무실로 들어가라고 하지요. 지금 기억에 그때 조금 크게 장을 보는데 얼마를 주시느냐면 50전을 주셨어요. 지금 오백원 동전만한데 당시 대단히 큰돈이었지요. 그게 보통 일용의 장 보는 돈이 아니라 좀 큰 장을 볼 때는 50전을 주시더라고요. 그걸 받아서 어머니께 가져다드리고 했지요.
그러다가 보니까 어려서부터 중학생 때까지 다른 애들과는 달리 나는 좋은 영화가 오거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는 원산관에 가요. 가면 “어서오십쇼!” 하지요. 그때부터 영화는 많이 봤어요. 그러니까 어려서 자라면서부터 문화적인 분위기는 다른 애들보다 좀 나았다고 할 수가 있지요.
원산냉면의 엎어말이
그리고 또 하나는 집에서 원산관 가는 길에 거의 다가서 왼쪽에 원산냉면이라고 하는 냉면집이 있었어요. 아, 지금도 그 고향에서 먹던 냉면 생각이 나요. 들어가면 뜨근뜨근한 방, 길쭉한 방에 앉아 냉면을 먹었지요. 그 어렸을 때하고 지금과는 혓바닥이 좀 차이가 있어 그러는지, 지금 여기서 냉면 먹어도 어렸을 때 고향에서 먹었던 그 냉면 맛이 잘 안 나요. 메밀만 가지고는 냉면이 안 됩니다. 밀가루에 메밀을 조금 섞는데, 밀가루를 되도록 적게 해 가지고 메밀가루가 많이 들어가도록 해서 아주 구수하고, 육수도 참 좋았지요.
당시 늙수그레한 할아버지가 냉면집 주인이었는데, 딱 입구에 카운터처럼 된 곳에 앉아서 손님 오시면, 부엌 향해서 “몇 그릇 섞어라.” 이러고 앉아 계셨어요. 언젠가 가니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그러더라고요. 스님네들도 여기 들리는데, 스님네들 주문할 때 “엎어말이 하나요?” 하고 들어가신다는구만요. 그렇게 하면 주인도 알아서 주방을 향해 “엎어말이 하나요.”라고 한답니다. 엎어말이가 뭐냐면. 그릇에 냉면 넣을 때, 밑에 여러 가지 것을 넣는 거야. 여러 가지면 그거, 알지요? 하하하.
▶ 하하 재미 있군요?
그런 거 안 들어간 냉면을 ‘민자’라고 그럽니다. 민자를 턱 올려놓고 육수 국물을 부어 가지고 내 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뭐 아무렇지도 않지요. 먹는 사람은 밑에 놓인 것을 섞어가며 자연스럽게 먹는다고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때는 냉면을 참 많이 먹었어요. 한 겨울에도 아주 차가운 걸 먹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피난 내려와서 부산까지 왔더니 광복동이 번화가의 중심이었어요. 그 뒷골목에 일본식 가옥 2층 전부에 원산냉면이라고 하는 간판을 내건 냉면집이 있더라구요. 눈이 번쩍 뜨여서 가 봤더니, 역시 원산에서 냉면을 하던 집이 피난 내려와서 영업을 하더군요.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가서 냉면을 먹곤 했지요. 그 집이 지금도 영업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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